Chapter 23. 사랑하는 임을 위해
185화
“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마리즈의 물음에 단제는 휘두르던 검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마호세르디로 도망이라도 치면 좋잖아요, 아니면 노헤스카나. 그것도 아니라면 두 가문 말고 다른 곳이라도 좋고요.”
황궁에 있는 것만 아닐 뿐 지금 단제의 위치는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랑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수도를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단제뿐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그나마 체드란 대공과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해 시간이라도 벌 수 있겠지만 당신은 아니라고요.”
마리즈는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단제를 설득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더는 검을 휘두를 상황은 아니란 생각에 단제는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마리즈를 마주 보았다.
“그대는 이야기하자고 했지.”
“갑자기요?”
“시간이 많으니 이제라도 이야기를 해 보지.”
스스로 반란 혐의를 벗겠다고 했으니 단제는 수도에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가 도망치는 순간 반란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황제의 충견으로 살았던 사람일세.”
가족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결국 그는 근위대 기사로 황제를 지키며 살았다.
“그런 내 삶을 버리면 나에겐 무엇이 남는가.”
“그건…….”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가족을 버릴 수도, 근위대 기사로 살았던 내 삶을 버릴 수도 없네.”
그래서 단제는 이곳을 택했다. 기사로서 살았던 자신이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나의 근간은 황제를 지키는 기사일세. 그것을 버리면 배신자 단제 마호세르디가 남겠지.”
“가족도 남잖아요……?”
“가족이 내 신념을 대신하고 나의 근간을 대신해 주진 않네. 껍데기만 남아 사는 것이 살아있는 것인가?”
맹목적이고 확고한 신념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른 이유이자 기사로서 쟁점에 올랐던 이의 근간이었다.
“황제가 죽고 난 다음에는요?”
“적어도 기사로서의 신념을 지켰지.”
“가족이 죽으면요?”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보네. 다들 강한 사람들이야. 검으로만 강했던 나와 다르게.”
마리즈는 단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너무 올곧고 바르기에 휘어지는 것보다 부러지는 걸 택할 사람.
“그래서 황태자 전하의 청도 거절한 건가요?”
“그것까지 알았나?”
“황태자 전하께서 당신을 설득해 달라고 하셨으니까요.”
“괜한 짓을 하셨군.”
마리즈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단제의 선택과 이유를 조금은 알 듯한 지금도 마음을 바꿔 주길 바랐다.
그런데 무슨 말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그대에게 하는지 아는가?”
“모르죠.”
“떠나라는 말일세. 내 선택에 그대까지 죽음을 각오할 필요는 없네.”
바보 같은 사람. 마리즈는 목구멍까지 그 말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당신은 대체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었어요?”
“무슨 말을?”
“내 선택은 당신이었고, 난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택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내가 해 온 것들은 다 의미 없는 행동이 되어 버리니까요.”
“억지일세.”
“아뇨, 이건 내 신념이죠. 당신이 당신의 신념이 있는 것처럼 나도 잃어버리면 껍데기만 남게 되는 신념이 있어요.”
어쩌면 두 고집쟁이의 말싸움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신념을 위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말싸움.
“당신의 신념이 중요하다면 내 신념도 존중해 줘요.”
“그대가 내 선택으로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목숨을 걸었어요. 지금까지 한 짓을 들키면 푸르텐가나 황제가 나를 가만히 둘 것 같아요?”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하니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당신이 죽음을 택했다면 내 선택도 죽음이에요. 난 당신에게 모든 걸 걸었으니까.”
단제는 그런 마리즈를 곤란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세간은 어리석은 부부라고 하겠군.”
마리즈의 눈동자가 살짝 동그래졌다. 단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라는 것처럼.
“죽음을 코앞에 둔 나에게 목숨을 걸겠다니, 그대도 똑똑한 편은 아니군.”
“그래도 뭐…… 저승길에 친구 정도는 되겠네요.”
“저승길 부부겠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단제의 뒤에서 마리즈가 입을 벌렸다. 저 인간의 입에서 부부라는 말이 나오는 걸 다 듣다니,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마리즈가 황급히 그를 쫓았다.
“근데 진짜 나까지 죽게 만들 거예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 안 칠 거냐고요. 대공비께서 설마 큰 오라버니가 죽는 걸 내버려 두겠어요?”
아니면 마호세르디 공작이라도.
단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고 싶은 건지 죽음을 각오한 건지 헷갈린다는 표정으로.
“그럼 체력 단련이라도 해 놓든가.”
“체력 단련이요?”
“그 체력으로 달리기는 할 수 있을까 싶네만.”
“같이 도망갈 건가요?”
마리즈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대 하나는 도망치게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듯 저물어 버렸다.
*
“남부 귀족들은 전부 군력을 제공하라니,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는가?”
아가산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시게. 그 대단하던 마호세르디 공작님도 미쳐 버렸다는데 대공 전하라고 멀쩡하시겠나.”
“하지만 남부 군사력이 두칸으로 몰리면 노헤스카의 군사들은 갑자기 놀게 되는 게 아닌가? 그들을 이끌고 수도로 진격하면 어쩌냔 말일세.”
“나라고 뭘 알겠는가. 들리는 이야기로는 노헤스카 군사들도 완전히 빠지는 건 아닌 모양이야. 다만 체드란 대공께서 더는 전쟁을 이어 갈 심리 상태가 아닌 듯하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두칸에게 체드란 대공 전하가 어떤 의미인지.”
체드란이 약해진 지금, 두칸의 공격이 거세질 거란 얘기였다. 노헤스카의 군사들을 남겨 둔다고 해도 이 틈을 노릴 두칸에 대비해 군사력도 늘릴 겸 남부의 귀족들은 죄다 군력을 보태야 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남부에 돌아가 봐야 하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게나.”
아가산 백작의 인사에 상대도 인사를 건넸다.
둘 사이에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혹시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떠나는 아가산 백작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세.”
아가산 백작이 먼저 상대를 떠나보낸 후 본인도 준비해 둔 마차로 향했다. 남부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부인과 인사를 나눴다.
“당신은 안전한 수도에 있게. 남부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아가산 백작 부인이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혼란스러운 남부 정세에 휩쓸려 부인이 고생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걸세.”
사랑하는 부인과 마지막 인사를 끝낸 그는 마차에 타는 순간까지 부인을 바라보다 출발을 명하며 문을 닫았다.
그의 기사들이 말에 올라타고, 곧 마차가 남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차는 어디서 나셨습니까?”
아가산 백작은 앞에 앉은 나엘라에게 물었다.
“백작 부인이 넣어 주었네.”
나엘라의 옆에 앉은 그녀의 하녀가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귀족가의 마차가 아무리 크고 좋다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마차 안이었다. 그런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차를 우리고 따르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마시는 나엘라도 마찬가지였다.
“페즈몽레 백작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엘라의 물음에 아가산 백작은 오늘 아침까지 알아봤던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노헤스카 가신 가문들에게 제일 먼저 징집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페즈몽레 백작은 평상시 대공 전하께 큰 신임을 얻고 있었던 만큼 직접 전장까지 출전하는 모양입니다.”
“그자가?”
“대공 전하께서 전장이 안정되기 전까지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역시……. 체드란은 어찌 그리 똑똑한지 모르겠군.”
나엘라는 페즈몽레를 조심하라는 말과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만 알려 주었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을 체드란이 잘 써먹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페즈몽레 백작을 대공령에서 빼내는 것까지 할 줄 몰랐다.
“전장은 늘 참혹하지. 어제까지 같이 밥을 먹던 동료가 죽기도 하거든.”
페즈몽레 백작이 전장에서 죽을 거라는 예고였다. 그를 죽인 사람이 두칸일지 노헤스카의 기사일지는 아무도 모를 테지만.
“그나저나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황제가 유난히 조용합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꼼짝도 않으니 불길합니다. 꼭 폭풍이 일어나기 전처럼요.”
“그러게 말일세. 아버지가 미쳤다고는 하나 마호세르디로 돌아가게끔 놔두다니.”
“감옥에서 풀어 준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반란의 증거를 만들었다면 써먹어야지요. 저 같으면 절대 안 놔줬을 겁니다.”
“그것도 내가 손을 써 놨네.”
증거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공작과 단제를 가둬놓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황제를 위해 친히 증거를 만들어 저택 집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반란 증거는 가짜일세. 그 가짜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아버지의 손에 있었지. 마호세르디 공작을 감옥에서 죽여버릴 수도 없고, 혹여 가짜 증거로 휘둘렀다는 게 알려지면 황제 역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풀어줄 수밖에.”
그러니 공작이 마호세르디로 내려가도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을 거다. 잔뜩 열 받은 황제가 밑에 사람들을 갈구며 날뛰고 있을 게 뻔하지만, 나엘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짜 증거라는 게 밝혀지면 황제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오명을 쓸 수도 있었겠군요.”
“열 좀 받았을 거야. 그러게 잘 알아봤어야지.”
“증거가 떡하니 있는데 의심하진 않았을까요?”
“다른 서류들 사이에 섞여 들어간 것처럼 껴놨지.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만들기도 했고.”
의심이 많은 자를 상대하는 건 이래서 피곤하다. 덫을 이중삼중으로 쳐야 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답니까?”
“황제는 황태자를 건들지 못해. 명분이 없어.”
“저는 살짝 이해가 안 됩니다. 제 형제들을 다 죽이고 황제가 된 사람이 보이는 것에 예민하고 명분을 중시하다니요.”
나엘라도 사피오가 건네준 자료를 보기 전까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과거 이력을 보고 나니 왜 그랬을지 얼추 예상이 되었다.
“황제의 형제들은 언제나 비겁하게 황제를 곤란에 빠트렸어.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괴롭혔지. 모욕은 둘째 치고 말일세.”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진 않겠다는 겁니까?”
“그런 마음이었으면 좋은 왕이 됐어야지.”
“그럼요?”
“그들보다 자신이 낫다는 우월감일세. 속 알맹이가 없는 사람일수록 겉치레를 따지니까.”
적어도 자신은 명분을 갖추고 나섰으니 그들보다 똑똑하고 나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이 근간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본인이 황제의 재목이었다고 느끼고 싶었던 걸까. 낮은 자존감을 어떻게든 채우려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같은 사람으로 엮이며 손가락질받기는 싫다는 그 속내가 훤히 보였다.
“내 눈엔 똑같지만.”
그리 말하며 나엘라는 차를 마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