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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87)화 (187/220)

186화

파르로시가 가파른 산을 오르며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자, 잠시만…….”

여린 그녀의 모습에 옆에 있던 몇몇 마호세르디 기사들은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에스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에스토가 마호세르디에 있을 땐 꼬박꼬박 부단장으로 부르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에스토가 돌아오자마자 잘 돌아왔다는 인사보다 앞으로 어린 에스토에게 부단장이라 안 불러도 된다며 신나하던 이들이었다.

다시 부단장이 되기 전에 어디 한번 당해보라며 아무렇지 않게 웃던 사람들.

에스토는 제 어린 시절부터 쭉 보았던 이들을 만나며 다시 안정을 찾았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과 함께.

그래서인지 예전의 모습이 드러나며 조금 유해졌지만, 파르로시에게만큼은 여전히 차가웠다. 주변 기사들이 안쓰러워할 만큼.

“황녀님이 택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마호세르디령으로 돌아가 지엘라 황녀님과 함께 계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지엘라와 하일모라까지 있었다.

지엘라를 따라왔던 황실 기사단은 황제가 나엘라의 반란을 공표하고 공작과 단제를 투옥한 순간 설 자리를 잃었다. 저택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숙소를 배정받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중이었다.

그래서 파르로시가 돌아가도 거리낄 것은 없었다.

“잠시만 휴식을 줘.”

하지만 파르로시는 끝내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엘라와 하일모라가 불편해서일까. 파르로시는 아득바득 에스토를 따라왔다.

“이제 여기만 지나면 마호세르디 공작가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인 레디움 남작가입니다. 남작가에 잠입해야 하니 그 뒤부터는 쉴 시간 따위 드리지 못합니다.”

차가운 그 말에 파르로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오히려 어쩔 줄을 모르며 에스토를 끌고 갔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황녀님이라며?”

“저는 이 태도를 유지할 겁니다. 도와주려면 경이 도와주세요.”

“아이고, 무슨 일인데 그래?”

“황녀님은 저를 미워하셔야 합니다. 이런 곳에서 생사를 함께했다고 미워할 상대를 헷갈리는 것보단 낫습니다.”

완강한 에스토의 모습에 기사는 결국 고개를 젓고 두 손을 들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라. 네가 그럴 수 있는 성정이면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야. 너도 힘들 거다.”

기사의 눈에는 에스토가 용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냉정하게 대해 놓고 본인이 더 괴로워하는 게 훤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호세르디 기사들의 가족은 에스토다. 황녀가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나 그보다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에스토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재할 수 있는 선도 여기까지였다. 파르로시와의 문제는 결국 에스토 본인의 문제였다. 기사는 어딘지 내려앉은 에스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들이 자리로 돌아가자 어느새 파르로시는 휴식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가요.”

본인이 짐밖에 안 된다는 걸 파르로시는 잘 알았다. 그녀의 욕심 때문에 데리고 다닌다는 것도.

그러니 자신 때문에 더 지체되게 할 순 없다.

“난 준비됐어요.”

파르로시를 힐끔 본 에스토는 다시 산을 넘기 시작했다.

*

다나한의 편지를 읽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던 지엘라는 맞은편에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곤 표정을 갈무리했다.

“절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러는 겁니다.”

하일모라는 스쳐 가는 사람들이 걱정할 만큼 살이 쏙 빠졌다. 만일 나엘라가 봤다면 기겁을 하고 식사 때마다 감시하려 들었을 수준이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

“예?”

“아니에요.”

지엘라가 나엘라처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밥은 좀 먹고 있는 거예요?”

“그럼요.”

“누구도 안 믿을 거짓말은 하지 말아요.”

“먼저 물어보셔 놓고…….”

하일모라가 설핏 웃자 지엘라도 어쩔 수 없다며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동안은 하일모라가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건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모른 체하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비명횡사라도 할 기세니까.

“그대는 강한 사람이니 잘 이겨 낼 거라고 대공비에게 들었어요. 하지만…… 더 보고 있을 수가 없네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으니, 그 상처가 그리 쉽게 나을 리가 없죠.”

“저는…….”

“괜찮다고 하지 말아요.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하일모라는 또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떻게 괜찮을까. 그렇게 사랑했던 남편의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데.

“사실 지금도 믿기진 않아요.”

하일모라는 계속 눌러 참았던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속으로 계속 변명을 만들어요. 그것만 가지고 판단한 건 너무 성급했던 게 아닐까. 테너가 했던 행동들이 내 착각은 아닐까. 그 사람과의 처음과 마지막까지 전부 거짓이라는 게 말이 되나. 그 사람도 조금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일모라는 잔잔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지엘라는 되묻는 것 하나 없이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건,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지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뛰어가 묻고 싶어 하는 저예요. 그럼 그 사람은 당연히 사랑했다고 말하겠죠. 그걸 알기에 더 못 묻겠어요. 진심이 얼마나 있을지, 전부 거짓일지 판단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나엘라의 투신과 공작, 단제의 투옥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하일모라의 이혼은 이제야 알려졌다.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체 왜 하일모라가 이혼을 택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아직 이혼이 진행된 것도 아니니까.

테너 세레노피 백작은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이혼은 없다고 말했으나, 하일모라가 그 발언을 모두 일축했다. 그간 인연을 만들어 놨던 귀부인들을 통해 기정사실화시켰다.

밥도 못 먹을 만큼 힘들어하고 있음에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이 또 그녀다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엘라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픔 없는 사랑은 없어요. 사랑할수록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게 되죠. 나랑 다나한 경만 해도 많이 돌고 돌아 이제야 재회했잖아요. 어릴 적 나는, 다나한 경에게 사랑을 돌려받길 매번 기대하고 또 실망했어요. 하지만 아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주저앉아 있을 틈이 없었어요.”

“멋진 여자였네요.”

“그러다 황실의 강요로 타국의 사람과 혼인을 하게 됐어요. 나를 데리고 도망가지 않는 다나한을 원망하기도 하고 실망도 했죠. 그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요.”

잠시였지만 다나한을 원망했을 때도 있었다. 그도 나를 사랑했더라면, 둘만 있어도 행복하다면 모든 걸 버리고 함께 도망을 택했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그를 사랑해 버렸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때려치우라고 할 테지만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 보라 말하고 싶어요. 각자의 방식은 다르고, 세레노피 부인에게도 부인의 방식이 있는 거잖아요.”

세레노피 부인이라 부른 것에 눈치를 살폈으나 하일모라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내 말은…… 묻고 싶다면 뭐가 됐든 물어보라는 거예요. 물론 지금 말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요.”

확실히 판단이 안 선다면 묻고 또 물으면 된다. 답이 나올 때까지 묻다 보면 결국 직시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끝내 버리면 나중에 하일모라가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 지엘라는 하일모라에게 후회가 남지 않기를 바랐다.

“고마워요.”

하일모라가 옅게 웃었다. 지엘라의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에게 털어놓다 보면 조금씩 마음 정리가 되리라 믿었다.

“아,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게요.”

“뭘요?”

“나는 다나한의 편지나 그와 관련된 일에 행복을 감출 생각이 없어요. 물론 세레노피 부인의 앞이라면 자중하긴 하겠지만.”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으니까 미리 사과하는 거예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힘들게 사랑을 이뤘어요. 그 오랜 기다림과 고통이 간신히 지났는데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행복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사랑을 하는 지엘라는 황실에 갇혀 있을 때보다 훨씬 빛이 났다. 새삼 황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칭호가 와닿을 만큼.

“검만 쓸 줄 알았다면 당장 전쟁터로 뛰어갔을 거예요. 그곳에 다나한 경이 있으니까.”

지엘라는 지금이라도 검을 배워야 할지 고민 중이라며 웃었다. 저 멀리 전쟁 중일 다나한을 떠올리며 웃는 그녀를 보며 하일모라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검을 든 지엘라 황녀님이라……. 꽤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렇죠? 어쩌면 대공비보다 검을 잘 쓸지도 모르죠.”

검을 배워 나엘라에게 도전해 볼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유쾌한 상상이라 둘은 어느새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

아가산 백작은 몇 번을 물었던 것을, 새삼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는 답하기도 귀찮을 정도여서 나엘라는 됐다며 창문 밖이나 살폈다.

어느새 세 번째 검문소였다.

언제 설치해 남쪽으로 가는 모든 행렬을 확인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시가 꽤 철저한 것이 문제였다. 그간 나엘라는 매번 검문소를 지나기 전에 따로 떨어져 산길을 넘거나 강을 건넌 후 아가산 백작과 다시 합류해 왔다.

하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이제 이 길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페즈몽레 백작의 영지였다.

“페즈몽레 백작이 황제와 밀약을 맺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해. 급하게 전쟁터까지 끌려갔으니 증거를 완전히 없애진 못했을 거야.”

모든 정황이 페즈몽레를 가리킨다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를 제거할 순 없다. 만에 하나 에스토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했을 수도 있고, 나엘라의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심 많은 적을 상대하다 보니까 나도 의심이 많아지는 기분이야.”

나엘라가 머리를 털며 한숨을 쉬자 옆에서 무기를 점검하던 지안이 답했다.

“나엘라 님께선 원래도 의심이 없지는 않았는데요?”

지안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어 나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사방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지, 원래 첩보전을 할 적엔 모든 증거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완벽을 기해 왔기 때문이었다.

“흠흠. 대공비 전하, 곧 검문소입니다.”

다행히 아가산 백작의 환기로 현재 상황을 다시 직시할 수 있었다.

나엘라는 어두운색의 로브 안에 질긴 가죽 워커와 기동성 좋은 바지, 편안한 티와 이것저것 고정해 놓은 하네스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곤 검문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벌컥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백작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대, 대공비 전하……!”

나엘라는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 가장 뒤에서 짐마차에 몸을 싣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상대도 준비됐다는 걸 확인하고는 창문 안으로 다시 몸을 넣었다.

“너, 너무 대담하신 것 아닙니까?”

대담하다고? 하긴 백작은 나엘라를 잘 모를 테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나엘라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이제 마차를 멈추겠습니다. 그 틈에 얼른…….”

“그럴 필요 없네.”

“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마차의 문이 열렸다. 지안이 먼저 상체를 내민 채 나엘라를 돌아보자 백작은 기겁하여 입만 벌렸다.

“가.”

그 한마디에 지안은 머뭇거림 없이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앞뒤에 따라오던 호위 기사들이 놀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잠시만요, 전하! 제가 페즈몽레 영지에 사람을 보내 두겠습니다! 가서 만날 위치를……!”

나엘라는 다시 한번 그를 막았다.

“됐네. 이미 내 기사단이 와 있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엘라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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