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88)화 (188/220)

187화

“백작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담이 작아서 어떡해요?”

제니의 물음에 다른 이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아가산 백작이 놀라 소리치던 모습이 기억에 남은 듯했다.

물론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대공비가 마차에서 뛰어내렸으니 놀라지 않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가산 백작은 멀쩡한 모습으로 달리며 마차와 멀어지는 그녀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차 문을 닫았다.

‘몸조심하십쇼!’

마지막까지 그렇게 외친 것으로 보아 확실히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 검문소까지 들리진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는 게 문제였을 뿐.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가린은 달리는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페즈몽레 백작저가 있는 도시에 ‘골드’라는 여관이 있다고 합니다. 단원들이 전부 흩어져 머물고 있지만, 그곳에 오언이 있어요.”

“돈에 환장한 서튼이 좋아할 것 같은 여관이네.”

“맞아요. 서튼이 정했습니다.”

“뭐?! 서튼은 황도 톨레로 상단에서 대기하라고 했잖아?”

만일의 사태를 위해 황궁에서 일하는 클로에, 큰 살롱에서 일하는 미아, 톨레로 상단에서 일하는 서튼은 남겨 두고 왔다.

그런데 서튼이 정했다니?

“기어코 따라온 것 같습니다.”

“아오.”

열이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톨레로 상단은 데테로아를 대피시켜야 하는 순간, 움직이기로 예정된 곳이다. 그를 위해 실력만큼은 믿을 만한 서튼을 남긴 것이었는데 기어코 말을 안 듣다니.

“너희는 왜 안 말렸어?”

이걸 가린이 알고 있다는 건, 작정하고 나엘라에게 비밀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나엘라 님이 아이안 공작에게 납치당했을 때 우리끼리만 움직였다고 한참을 시달렸어요.”

그때 소문을 내기 위해 움직였던 이들이 체드란과 서튼을 마주쳤다고 했었다. 나엘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것에 체드란에게 털리던 와중, 서튼에게까지 한참 시달렸단다.

익명으로 협박 편지가 오거나, 틈만 나면 찾아와 서운하다고 몇 시간씩 징징거렸다고 들었다. 전부 서튼이 할 법한 짓이라 할 말이 없었다.

가린뿐만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함께 시달렸던 건지 다 같이 핼쑥해졌다.

“그럼 톨레로 상단은 어떻게 한대? 아무 생각 없이 나오진 않았을 거 아니야.”

“말리를 앉혀 놨답니다. 말리도 엄청나게 시달렸어요.”

오언과 말리는 상대적으로 더 기사에 가까웠다. 도주와 같은 일엔 서튼이 제격이라 굳이 배정한 것이었거늘 기어코 말리와 역할을 바꾸었단다.

“징하다, 진짜.”

“톨레로 상단에서 내내 대기하기만 하니 지루하대요.”

“만나기만 해 봐. 가만 안 둔다.”

몇 대 맞을 게 뻔한데도 오래간만에 신난다며 헤죽헤죽 웃고 있을 그 얼굴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어쨌든 얼른 움직이자.”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이들이 모여야 하니 시간이 없었다. 나엘라는 발걸음에 더 속도를 높였다.

*

쿠당탕, 한 대 얻어맞은 서튼이 과장하여 바닥을 구르며 우는소리를 냈다.

“아이고! 왜 맨날 저만 미워하십니까? 이런 잠입은 제가 더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저번에 감시자들 은신처를 불태울 때도 절 두고 가셨으면서!”

서튼의 징징거림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저으며 각자 무기들을 점검했다.

이곳에 모인 인원만 열 명가량. 서로 오랜만에 만난 터라 정겹게 인사를 나누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모른 체했다.

서튼은 나엘라에게 온갖 욕을 먹으며 맞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라엘 단장님이라 불러야 하는 겁니까? 혹시라도 들키면 안 되잖아요.”

서튼은 풀쩍 위로 뛰어 종아리로 날아오는 발을 피했다. 하지만 목으로 날아오는 검집까지 피하진 못했다.

“컥! 아니 뭔 말만 하면 때리고 그래요!”

“그냥.”

뭔가 얄미워서.

계속 투덜거리는 서튼을 무시하며 나엘라는 단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수도에서 몇 번 본 오언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지금 페즈몽레 백작가의 기사단은 백작과 함께 두칸과 전쟁 중인 지역으로 향한 상태다. 게다가 부인은 수도에 있으니 지금처럼 절호의 기회는 없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백작가 상주 인원들의 경계 상황이 어떻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엘라와 단원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입한 뒤, 어떤 소란도 없이 빠져나와야 했다.

“우리가 페즈몽레 백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황제에게 들켜서는 안 돼.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우리의 잠입이 들켜선 안 돼. 즉, 될 수 있는 한 죽여서도 안 된단 의미야.”

물론, 피치 못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 목격자가 있는 것보단 낫지.

“문제는 증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황제는 대부분의 서신이나 자료를 받는 즉시 불태우라고 명령한 것 같아.”

에스토가 황제의 서신을 전했을 때도 받은 이들은 확인만 한 후 바로 불태웠다고 했다. 태우기 전까진 감시자가 자리를 뜨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고도 말해 주었다.

“그나마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건 황제의 서신이 페즈몽레 백작 부인의 편지와 함께 보내졌을 가능성이야. 감시자들을 통해 전달된 게 아니라 증거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 황제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도 페즈몽레 백작이 노헤스카를 칠 준비를 했다는 정도여도 좋아.”

잠입과 정보 수집에 관한 건 제 단원들을 따를 자는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첩보전을 목적으로 모은 기사단이었다. 그렇기에 나엘라는 자신의 이름 없는 기사단을 믿었다.

“오랜만에 하는 본업이지? 하지만 실수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을게.”

실력이 녹슬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다며 나엘라가 너스레를 덧붙였다. 보통이라면 발끈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이들은 되레 더 엄살을 떨었다.

“죽겠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아무래도 손이 막 떨려요.”

“줄 타는 건 못할 것 같습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도 됩니까?”

“요즘 사람이 무서워졌어요. 여차하면 저만 도망가도 되나요?”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분위기에 나엘라는 피식 웃었다.

매번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던 수하들. 이들에게는 높은 충성심보단 생존을 먼저 가르쳤다.

동료가 잡혀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부상자는 두고 가라, 그렇게. 다른 기사라면 기겁할 규정을 뼈에 새기게 했다.

이들을 구하는 건 나엘라가 할 거니까. 그들은 정보를, 나엘라는 보호를 맡아 손발을 맞추었다.

그런 교육 때문인지 이들은 나엘라가 언제든 구해 주리라 믿는 경향이 강했다. 동료를 버리는 짓도 믿을 수 있는 상관이 있어 더 쉽고 거침없이 행했다.

다른 이들이 보면 잔인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은 나엘라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들이었다.

“이번 일 끝나고 은퇴할 사람들은 미리 말해. 돈 귀신 서튼이 그 몫까지 추가 근무할 거니까.”

“아싸! 은퇴할 놈 누구야? 빨리 말해!”

추가 근무를 좋아할 사람은 서튼밖에 없으리라.

다른 이들이 서튼 좋은 일은 시킬 수 없다며 결의를 다지는 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출발한다. 페즈몽레 저택을 아주 샅샅이 뒤져야 해. 필요하다면 백작의 속옷까지 뒤지는 거 잊지 마.”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나엘라와 단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필 오늘 센텐의 회의가 열리다니. 하일모라와의 이혼을 뭐라 변명한단 말인가.

테너는 초조한 얼굴로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앉아 있는 이들이 금방이라도 제 목을 물어뜯어 무능력을 욕할 것 같았다.

“세레노피 백작, 표정을 풀지. 다른 이들이 어찌 생각하겠나.”

먹잇감을 보는 듯한 여러 시선을 느낀 테너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비록 틈을 보이긴 했으나 저 늙은이들에게 밀릴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요즘 머리 아픈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부인과의 이혼 말인가?”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애초에 이 대화를 위해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습게 보일 수는 없었다.

“예. 여자란 어찌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부인은 지고지순하기로 유명하지 않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혹스러울 따름입니다. 정신이 없어 딱 한 번 기념일을 안 챙겼다고 이 난리가 났습니다. 더군다나 친구가 반란에 투신까지 했으니 제정신이 아닐 법도 했죠.”

“흐음, 기념일을 안 챙겼다고?”

“그것보단 감정 조절을 못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 참, 여자들이란…….”

별거 아닌 양 넘기려 했지만 상대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맨 처음 말을 걸었던 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모습까지 보였다.

울컥 짜증이 올라왔지만 지금 감정을 드러내선 지는 것밖에 안 된다며 테너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레노피 백작 부인은 나엘라 대공비가 투신하기 전에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고 알고 있네만?”

빌어먹을. 하일모라가 하녀들이 보는 앞에서 이혼하자고 공표했으니 감시자들에게도 이야기가 들어갔으리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저택을 감시하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대놓고 언급한다는 건 그를 낮잡아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게 기념일을 못 챙겨서였죠. 기념일 한 번 못 챙겼다고 이혼하자는 건 진짜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일모라가 이혼을 얘기할 때 제대로 된 사유를 얘기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았다고 했나? 핑계를 대면 넘어갈 수 있을 법했다.

“그럼 이혼을 이야기할 때 나엘라 대공비 얘긴 왜 나왔나?”

테너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감시자들에게 정보를 들었대도 하일모라와 나눈 대화를 너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자세히 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감시자들이 가져오는 정보는 1차로 그들의 은신처로 들어갔다가 리더를 거쳐 황제에게 전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정보들은 센텐에게도 넘어오고.

그런데 자신은 모르는 감시자들의 정보를 이들이 알고 있다?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대가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거 말인가?”

테너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자신을 의심했으며, 저택에 감시자들은 얼마나 늘려 놨던 걸까.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건 집사와 하일모라의 권한이므로 결혼과 함께 손을 뗐었다. 황제의 감시자들이 들어와 있으리라는 건 예상했으니 일부러 쳐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단 말인가.

테너는 최대한 여유로운 척 웃었다.

“의외입니다.”

“뭐가 말인가.”

“저는 첩자로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저만 의심당할 바엔 죄다 진창 속에 처박아 버려야 속이라도 후련하지 않겠나. 테너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남작님, 저번 달에 갑자기 재산이 늘어나셨던데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 그건 사업이 잘됐을 뿐입니다!”

“톨레로 상단이랑 거래하셨죠?”

“톨레로의 수완이 좋아서……!”

작정하면 수없이 많은 비밀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저들도 수를 숨겼는데 자신이라고 숨겨 둔 패가 없겠는가.

“그만하게. 이러는 건 세레노피 백작, 자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 결국, 서로 갉아먹을 뿐이지.”

조금 전까지 테너가 당할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다른 이들에게 화살을 돌리자 헤르만 후작이 말려 왔다.

이제야 주변을 정리할 생각이 들었을까?

하지만 테너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헤르만 반쇼 후작님, 황제 폐하께 센텐 내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건 후작님이 아닙니까?”

“자네가 그걸 어떻게……!”

“센텐의 수장이 황제 폐하께 모든 걸 보고드린다고 해서 신용이 높을 거라 생각하진 마시지요.”

테너의 비웃음에 헤르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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