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하…… 그래서? 지금 센텐이 내부적으로 분열 위기다, 이 말인가?”
황제의 분노 가득한 음성에 헤르만은 답이 없었다.
기껏 수장으로 앉혀 놨던 헤르만은 몇몇 의견이 맞는 센텐의 일원과 손을 잡고 세레노피 가문에 보내는 감시자들의 수를 늘리지 않나, 센텐의 감시자 역할을 하도록 붙여 놓은 테너는 황제가 전해 준 이야기를 홧김에 떠벌리지 않나.
이건 뭐 어중이떠중이 단체도 아니고 황제의 비밀 기관이라는 자들이 그랬단다.
“폐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내게 할 말이 남았다는 게 더 신기하군.”
“왜 제가 한 얘기를 세레노피 백작이 알고 있는 겁니까.”
센텐 내에 황제의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뻔히 예상했으면서 이리 물어 오는 이유가 뭘까. 그야말로 황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시작이었나.
그래, 나엘라가 절벽으로 뛰어내렸던 날, 제게 도전적으로 눈을 빛내며 이빨을 보였을 때부터였다. 봐주고 또 봐주니 스스로 가축인지를 모르고 이리 날뛰는 것이 아닌가.
나엘라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곳으로 뛰어내렸던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잘 아니까.
무슨 방법이라도 있었겠지 싶지만 찾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다른 가축들까지 영향을 받아 짖어 대는 꼴이라니.
황제는 웃음을 안 터트릴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멍청했군. 내가 안일했어.”
황제는 비틀린 웃음을 얼굴에 걸고 광인 같은 눈동자를 퍼렇게 빛냈다.
더는 명분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가축들이 제 입장을 모르니 이제는 찍어 누를 수밖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헤르만이 주춤거리며 물러났지만, 황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봐라!”
황제의 외침에 밖에서 대기하던 근위대가 뛰어 들어왔다.
“당장 단제 마호세르디를 붙잡아 오고 지엘라 황녀를 끌고 오너라! 오늘부터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 협력하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제국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
단제는 할 일이 없으니 자꾸만 혼자 검을 휘둘렀다. 보다 못한 마리즈에게 질질 끌려가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견디질 못했다. 가만히 서서 호위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차를 마시고 있는 건 성정에 맞지 않았다.
오늘도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 검을 휘두르던 단제는 땀을 닦아 냈다. 이제는 침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담을 넘는 것이 보였다. 하필 단제가 있던 곳이 저택에 있는 작은 연무장이라 넘어오는 이가 한눈에 보였다.
“부관?”
담을 넘은 자는 지금 황제를 호위하고 있어야 할 그의 부관이었다. 부관의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기에 단제가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가?”
“피하십시오, 단장님.”
“뭐?”
“황제 폐하께서 단장님을 잡아들이고 지엘라 황녀님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는 반란군으로 선포하셨고요.”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정보에 단제는 상황 파악을 하려 노력했다.
“갑자기 말인가?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갑자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황제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더 이상 증거 같은 것에 연연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단장님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표정을 어둡게 굳힌 단제는 가라앉은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와 말을 전해 주기까지 고생했을 게 뻔하지만, 단제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어떤 일이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네.”
“단장님의 가족들은요? 단장님은 결국 인질일 뿐입니다.”
“내 가족들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네. 여차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야.”
“단장님, 말도 안 됩니다.”
부관의 설득에도 단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잡혀간다 한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기에 당당했다.
아, 나엘라의 부탁에 시녀장을 만나게 해 줬던가.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근위대가 도착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요즘 들어 익숙해진 인영이 다가왔다.
“아직 검을 휘두르는 거예요? 대체 언제 자려고 그래요. 그거 훈련 중독 아니에요?”
툴툴거리며 다가오던 마리즈는 부관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예요?”
마리즈. 단제는 갑작스레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마리즈는 위험했다. 그 황제가 마리즈를 놔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과연 모진 고문을 버틸 수가 있을까.
푸르텐가에서 그녀를 위해 힘을 써 줄까. 되레 자신과 내통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며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을까.
그녀가 죽게 되면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까.
“당신, 괜찮아요?”
제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마리즈의 모습에서 제 표정이 많이 안 좋겠거니 생각할 뿐.
“빌어먹을.”
단제의 욕설에 부관과 마리즈가 깜짝 놀랐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부관에게 묻자, 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시간도 없다면 당장 말을 꺼내 와 달려야 할 것이다. 아직 성문이 막히지는 않았을 터. 바로 간다면 도망칠 수 있다.
“그대도 자리를 비웠으니 의심을 샀을 걸세. 말은 가져왔는가?”
“아니요. 집결하던 중에 몰래 빠져나온 거라…….”
부관은 검을 가지고 있었고, 경갑도 착용한 채였다. 완전 무장은 아니었지만, 몸을 지키는 데는 나쁘지 않을 터였다.
단제는 가볍게 입은 제 옷을 훑어보곤 혀를 찼다. 그나마 검을 가지고 있는 게 다행인가.
“내가 말을 두 마리 가져올 테니 그대는 마리즈를 데리고 후문을 열게.”
마리즈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리즈, 체력 단련은 잘하고 있었으리라 믿겠네.”
시간이 없었다. 단제는 부관이 곧장 마리즈를 이끌고 후문을 알려 달라며 재촉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굿간을 향해 달렸다. 잘 준비를 하느라 얇은 옷을 입고 있던 마리즈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
나엘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서신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른 증거를 찾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노헤스카 대공령의 저택은 여전했다. 미리 보내 놨던 사피오는 전쟁에 함께 나간 마든을 대신해 집사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사이 황제의 첩자 같은 것은 없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후 함께 저택으로 온 이름 없는 기사단이 저택에 스며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라면 나엘라가 잠깐 자리를 비워도 노헤스카는 문제가 없으리라.
“가실 겁니까?”
서튼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엉겨 붙는 바람에 허락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암살로는 일가견이 있기에 어차피 데리고 가려고 하긴 했지만, 괜히 심술을 부리다 배로 당했다. 얼마나 징징거리던지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서튼이 씨익 웃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좋을까. 전쟁터에 나가는 건데.
페즈몽레 백작에게 인수인계를 해 주기 위해 체드란은 아직 전쟁터에 있었다. 그래서 페즈몽레 백작을 직접 처리할 겸 체드란을 마중 나갈 겸 나엘라는 움직이고 있었다.
“오언,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루부스 후작저로 가서 에스토에게 전해 들은 계획이 사실이었음을 전해. 확실한 정보인 걸 확인했으니 본격적으로 대비해야지.”
오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발 준비를 마저 했다. 나엘라가 떠나는 때에 맞춰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제니, 아버지께 가서 마호세르디 쪽 배신자는 찾았는지 물어봐. 이쪽은 페즈몽레가 맞다고도 전하고. 아, 지엘라 부인과 하일모라는 어떤지도.”
그러고 보니 그곳엔 파르로시도 있지 않나? 에스토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가린과 지안, 다른 이들은 정찰대를 교육하고 이상이 없는지 끊임없이 확인해.”
이번에는 다들 할 일이 따로 있어 나엘라와 서튼, 둘만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단원들이 불만을 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페즈몽레 백작의 숨을 끊으려면 어쨌든 전쟁터 한복판에 잠입해야 한다. 그런 곳에 여자들이 돌아다닌다면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자신이야 키가 크니 의심을 덜 받겠지만 제 하녀들은 누가 봐도 여성의 체구였다.
“주변 영지들 동향, 수도 동향, 하나도 빠트리지 마. 수도 저택에 있던 노헤스카 기사들은 모두 도착했지?”
“예. 미리 빠져나왔던 이들은 수월하게 도착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수도 저택에 있는 자 중 나엘라의 호위로 남아 있던 노헤스카 기사들을 빼면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사조차 황제의 첩자인 마당이 아닌가.
기사들이 한 번에 빠져나가면 라르바가 의심할 게 분명해 오기 전 창고에 가둬 두었다. 하루 정도 시간을 벌자 싶어 저지른 짓이지만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지금쯤 구출은 됐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없어도 수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응해. 이러려고 노헤스카에 성벽 쌓은 거 아니겠어?”
노헤스카 대공저가 성벽도 아니거늘 도시 전체에 성벽 같은 것을 지어 놨다. 처음 봤을 땐 대체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피오와 마든의 합작이란다.
무기 만든다고 돈도 엄청나게 쓴 것 같은데 그 돈은 어디서 난 건지. 톨레로 상단의 황도 지부가 조금 부실해 보이던데 혹시 그 때문일까?
어쨌든 본의 아니게 천혜의 요새가 된 까닭에 마호세르디가 쳐들어와도 몇 달은 버틸 것 같았다. 국경 지역도 아닌 다른 가문이 공성전을 잘할 것 같지도 않아 더더욱.
“공성전은 역시 마호세르디인데.”
제스라의 국경 지역 영지들은 죄다 성벽을 쌓아 공성전을 치르는 편이었다. 마호세르디의 주적이 제스라 왕국이었던 탓에 그쪽 지역에는 발전된 공성전 무기들이 많았다.
“이제 그만 갈 테니까 노헤스카 대공령 잘 지키고 있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나엘라가 말에 올라탔다.
서튼과 자신은 전쟁 지역으로, 오언은 루부스 후작가로, 제니는 마호세르디로. 그렇게 출발을 하려는데 서튼이 저 멀리 내다보며 눈을 찌푸리더니 번쩍 손을 들었다.
“단장님?”
“왜 또. 부르기만 해도 열이 받네.”
“이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수상한 놈이 하나 있는데요? 아니, 그건 그렇고 왜 부르기만 해도 뭐라 하십니까?”
쓸데없는 투정은 무시하며 서튼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정말 이곳을 향해 말을 몰고 오는 이가 있었다. 체급이나 자세는 누가 봐도 기사인데, 노헤스카의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닌 데다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도 보이지 않았다.
정체 모를 이는 복면으로 얼굴을 다 가리고 노헤스카 대공저의 대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문 앞에 모여 있었기에 한눈에 보였다.
“뭐지? 암살자인가?”
“암살자가 저렇게 대놓고 온다고?”
“한낮의 사신, 뭐 그런 별명을 가진 암살자가 있나?”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고 있을 때 상대가 대문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나엘라라는 걸 확인한 그자는 당장 복면을 벗고 소리쳤다.
“대공비 전하! 단장님과 부인께서 위험합니다!”
달려오던 이는 단제의 부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