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자세히 말해 보게.”
부관은 말에서 뛰어내려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고는 설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단장님과 지엘라 황녀님을 잡아 오라 명하셨습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반란군으로 선포하셨고요.”
“그래서?”
“제가 단장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고 도망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단장님과 부인께서 수도를 빠져나오셨습니다만, 바로 감시자들이 따라붙었습니다.”
근위대보다는 감시자들이 추적을 잘하니 그들을 보낸 모양이었다.
“저희는 중간에서 흩어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대공비 전하께 이 소식을 전하기로 했고 단장님은 마호세르디로 가셨죠. 그런데 감시자들이 모두 단장님을 따라갔습니다.”
“감시자들이 몇 명 정도 됐는가?”
“50명 정도로 보였습니다.”
황제가 단제를 잡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단제 혼자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마리즈가 함께 있다는 거였다. 보호해야 하는 이를 데리고 단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그대를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소식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관은 단제에게 언질받은 것이 있는지 바로 대답했다.
“82전 78승, 네 번의 대련은 고의적인 패배로 무효 처리. 단장님께서 이렇게 얘기하면 아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군.”
나엘라와 단제의 대련 횟수다. 그중에 단제가 일부러 져 주려다 걸려 무효 처리된 횟수까지 정확했다.
“황태자 전하께선?”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뒤부터는 톨레로 상단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빨리 올 줄 알았다면 데테로아의 도주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건데…….
아마 수도는 지금쯤 난리가 났을 거다. 정보를 입수한 톨레로 상단이 잘하고 있을 거라 믿을 수밖에.
“가린! 지금 당장 단제 오라버니의 도주 경로를 확인해서 구하러 가. 단제 오라버니는 혼자서도 잘 도망칠 테니 마리즈 부인만 구해 오면 될 거다.”
감시자들이 찾는 건 단제와 마리즈, 즉 성인 남성과 여자 하나였다. 이럴 때는 차라리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각각 마호세르디로 향하는 게 나았다.
가린이 가 마리즈를 구하면 여자가 둘인 일행이 된다. 그럼 주변 마을 인물로 위장해도 될 터. 또 가린은 마호세르디 근처 영지들의 지리도 잘 알고 있으니 믿을 만했다.
“제니는 마호세르디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서 당장 이 사실을 알려.”
그곳엔 공작이 있으니 괜찮았다. 이 사실을 알리면 지엘라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내전 준비를 바로 시작할 것이다.
“나머지는 내가 다녀오는 동안 노헤스카를 봉쇄하고 언제든 내전을 일으킬 수 있게 준비해.”
노헤스카의 기사들이 두칸과의 전쟁에 언제나 대비되어 있다면 나엘라의 기사단은 모든 전쟁 상황에 빠삭했다. 예전부터 나엘라가 황제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대비해 내전 상황까지 훈련시켰으니까.
“노헤스카로 오는 길목을 모두 막고 버틴다고 생각해. 나는 금방 돌아오겠다.”
노헤스카에서 남쪽 두칸과의 전쟁 지역까지 반나절.
페즈몽레를 바로 처리하고 체드란과 함께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간 김에 두칸과 확실히 협약도 맺어야 했다. 내전을 벌이는 동안 뒤를 치지 않겠다는.
“혹시 제가 할 일은 없겠습니까?”
나엘라는 단제의 부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살아 있는 건 단제가 알려 줬을 것이고, 단제를 따라 배신자가 되는 것도 마다치 않은 자다.
혹시 낭떠러지에 떨어지며 단제를 부탁한다는 제 말이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 이 자와 단제가 쌓은 시간이 그만큼이나 대단했다는 의미일 터.
“그대는 제니를 따라 마호세르디로 가게. 단제 오라버니와 함께 있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
이 자가 황제의 첩자일 수도 있으나 그리 생각하지 않을 셈이었다. 애초에 마호세르디에 잠입하려 단제를 도주시키는 척 첩자가 되는 것보단 먼저 단제를 붙잡아 데려가는 편이 황제에겐 이득이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첩자라도 그건 단제가 판단할 몫이었다.
“의심이 너무 늘어 버렸어.”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찬 나엘라는 말 고삐를 잡았다.
“출발한다.”
*
선두에 있던 기사가 갑작스레 몸을 낮추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모두 멈추고 대기하라는 표시에 에스토가 상황을 살피려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이야, 에스토. 이것 좀 봐라.”
확연히 적의를 띄우며 어딘가를 가리키는 기사를 따라 에스토도 눈을 돌렸다.
그곳은 바로 옆에 있던 영지에서 마호세르디로 가는 길목이었다. 산 사이에 있는 길이라 숲에 몸을 숨긴 에스토는 길목의 상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커다란 대로 한가운데에 칼에 찔려 죽은 말 한 마리와 대기 중인 말 수십 마리, 그리고 말들을 돌보고 있는 복면인 세 명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복장이다. 그렇지?”
공교롭게도 이 기사와 에스토는 사건이 있던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아직도 이들의 눈에는 선했다. 시론 후작이 감시자들의 습격에 죽은 그날의 상황이.
에스토가 검을 꽉 쥐었다. 감시자들에게 가진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황제의 감시자로 지내며 참아 왔다. 그간 황제가 시킨 일을 하느라 감시자들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마호세르디에서 그들을 만났다고 그날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분노를 눌러 참다 보니 희석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저놈들이 누구를 잡으러 왔을까.”
대기 중인 말을 보니 감시자들은 50명 남짓. 죽은 말을 보면 감시자들이 쫓는 상대는 한 명으로 보였다.
“한 명을 잡으려고 50명이나 보냈다라…….”
기사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에스토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들이 잡으려는 상대가 반대편 산으로 도망친 것 같다. 감시자들도 뒤따른 것 같고.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도망치는 자는 마호세르디로 향하던 중인 것 같은데, 고작 한 명을 상대로 50명이나 보내다니요.”
“마호세르디로 가는 거면 어쨌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라는 거네. 도와주긴 해야겠구만. 50명이나 보낸 거 보면 어지간히 강한가 보지?”
기사와 에스토는 잠시 도주 중일 인물을 추려 보았다.
황제가 꼭 잡으려 들며 감시자들을 50명이나 보낼 정도로 강한 상대.
마호세르디에 도움을 청할 상대.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에이 설마.”
기사는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면서도 점차 안색이 변해 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예상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일단 구해야 하긴 했다. 황제가 저리 추격할 정도면 중요한 인물일 테니까.
에스토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증거를 꺼내 뒤를 돌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총 10명. 한 명은 파르로시이니, 그녀를 제외한 전투 인원은 9명이다. 상대는 50명이나 되니 증거가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파르로시 황녀님, 이 증거를 갖고 마호세르디로 가십시오.”
배신자에 대한 정보다. 어떻게든 공작에게 전해야 했다. 에스토가 준비하는 것을 보며 이것저것 계산하던 기사는 다른 기사 두 명을 가리켰다.
“둘은 황녀님을 따라 마호세르디로 향하게. 이 증거는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되네.”
자신들이 주변 영지를 죄다 뒤져 얻은 정보였다. 이것이 없다면 공작은 대비도 못 한 채로 배신당할 수도 있었다.
파르로시 황녀가 증거를 받아 들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사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목받은 두 기사는 바로 그녀를 데리고 말을 매어 뒀던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에스토는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7명으로 50명, 가능하겠습니까?”
“아니 뭐, 저들이 쫓는 자가 우리 예상대로 단제 경이라면 숫자를 줄여 놓지 않았을까?”
“정말 단제 경이라면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감시자들을 조금씩 줄이며 움직였을 겁니다.”
“50명 이상이 쫓았을 수도 있지. 줄인 게 저 정도일 가능성은?”
“그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만…….”
단제가 마호세르디 근처 지형을 모를 리 없다. 그라면 치고 빠지며 자신을 쫓아오는 이들의 인원을 착실히 줄였을 것이다. 아니면 인원을 줄였는데 중간에 감시자들이 추가 투입됐거나.
그때 기사 중 하나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것 좀 보십시오.”
죽어 있는 말 근처에 신발이 한 짝 떨어져 있었다. 크기가 작은 데다 한눈에도 여성용으로 보였다.
그제야 단제가 도망치는 것밖에 못 했던 이유를 깨달은 그들은 단번에 검을 움켜쥐었다.
“저들은 흩어져 있고 우리는 뭉쳐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 보자고.”
기사가 뛰어나감과 동시에 다른 이들도 검을 꺼내 들고 뒤를 따랐다.
*
“체력 단련을 해 두라고 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헉, 허억, 그리고 그건 나 혼자 도망치기 위해서였잖아요.”
쩔뚝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마리즈 때문에 단제는 결국 멈춰 섰다.
출발 전 마구간에 걸려 있던 옷을 아무거나 집어 왔었다. 조금 냄새야 나지만 추위로 체온이 떨어지는 것보단 낫기에 마리즈에게 입혔던 옷이다.
단제는 그 옷을 다시 벗기곤 한 줄로 찢어 마리즈의 발에 감아 주었다. 이렇게라도 발을 보호하는 편이 도주하기에도 나을 터였다.
“이제부턴 추워도 돼요?”
“마호세르디가 코앞이네.”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나엘라에게 들었던 말이 걸렸다. 마호세르디 가신 중에 배신자가 있으며, 황제가 그 가문을 마호세르디를 대신해 대표할 곳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말.
누가 배신자인지 모르니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다시 움직여야 하네.”
단제가 손을 내밀자, 앉아 있던 그녀가 이를 악물고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처음으로 시가에 가는데 이런 식이라니…….”
단제가 수도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마리즈 역시 마호세르디 영지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출신과 결혼할 당시의 상황 때문에라도 마호세르디 영지에서 순순히 들여보내 줄 리도 없었고.
“그대가 마호세르디에 가면…… 우리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이 되겠군.”
힘겹게 다리를 움직여 단제를 따라가던 마리즈가 흠칫했다. 유일한 안주인이라니, 낯설고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유일하다는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단제의 말이 마치 가족이라는 의미처럼 들려서 그게 낯설고 새삼스러웠다. 자신이 마호세르디의 가족이라…….
“글쎄요, 마호세르디 사람들이 절 좋아할까요. 대공비 전하만 해도 저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았는데.”
“나 때문일 걸세. 그대의 사정을 얘기하면 나엘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겠지.”
“그렇게 쉬울까요?”
“의외로 쉬워. 마호세르디 사람들이 좀 단순해서.”
마리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저리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푸르텐가의 사람이라는 건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듯한 말투였다. 단제가 본인의 저택에서조차 쉴 수 없게 만든 원인인데도 말이다.
“어떻게 확신해요?”
“가족이니까.”
마리즈는 부러워졌다. 자신은 그런 가족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제가 저렇게 확신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쉿.”
단제가 갑자기 마리즈를 끌어안으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를 숨기려는지 커다란 소능로 그녀의 입과 코를 살짝 막은 채였다.
그들이 도망쳐 온 저편에서 여러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