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흔적을 전부 지우지 못했다. 거기다 여자 쪽은 한쪽 발을 다쳤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단제와 마리즈가 숨어 있는 나무 근처로 다가왔다.
“여자를 보호하면서 우리를 다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꼭 다섯 명씩 조를 나눠 수색하고 발견하자마자 신호탄을 쏴라.”
다섯 명이라…….
단제는 저들과의 거리를 확인하며 혼자 다섯 명을 해치울 수 있는지 계산했다.
마리즈를 숨겨 놓더라도 혹시 모르니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습격할 수는 없었다. 한 번에 다섯 명을 모두 해치우지 않는 이상 신호탄을 쏘는 것 역시 막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 한들 일격에 다섯 명을 해치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 명 정도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당장 모험을 할 순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력을 더 키울 걸 그랬다.
나엘라가 들었다면 어이없어할 생각을 하며 단제는 검을 꽉 쥐었다.
마리즈를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 지금 움직이면 바로 발각될 것이다. 신호탄을 쏘는 것까지 감안해 최대한 빨리 다섯 명을 해치운 뒤 도망갈 수밖에.
과연 마리즈가 더 버텨 줄 수 있을까.
“이 근처로 흔적이 이어졌으니 멀리 가진 못했을…….”
나무 바로 옆을 지나치던 감시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단제는 섬광처럼 움직여 일격에 감시자의 목을 베고 마리즈를 옆 수풀로 밀었다. 지체할 새도 없이 다음 사람의 급소를 벤 후 바로 뒤에 선 감시자에게로 검을 휘둘렀다.
“여기 있다!”
도망치는 동안 단제 역시 피로가 누적됐기에 체력이 떨어진 채였다. 세 명까진 될 것 같았는데 세 번째 감시자가 재빨리 검을 들어 막았다.
“당장 신호탄을 쏴!”
뒤에 있던 한 명이 단제를 향해 달려들자마자 다른 한 명이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쏘았다. 붉은 폭죽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감히 황제 폐하께서 거둬 주신 은혜도 모르고!”
황제가 한 짓을 거둬 줬다고 표현하는 감시자의 말에 단제는 씁쓸해졌다.
하나, 지금은 그런 감정에 휩쓸릴 시간이 없었다. 단제는 세 번째 감시자를 베어 낸 뒤 품을 파고드는 다른 사람의 검을 쳐 냈다.
동시에 몸을 낮춰 달려들던 이의 발목을 베고는 바로 마지막 사람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움직이지만 못하게 만들면 된다. 급소 또는 다리를 베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일말의 낭비 동작 없이 정확히 급소만 노리는 동작은 깔끔하다 못해 유려하기까지 했다.
“더는 도망갈 수 없다!”
혼자 남았음에도 덤벼들던 감시자는 엄청난 속도로 제 명치를 향해 들어오는 검을 막지 못했다. 결국 그도 몇 초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
“우와, 천재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한가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리즈를 당장 일으킨 단제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절뚝거림이 점점 심해지자 아예 업고 달렸다.
“이러면 더 힘들지 않겠어요?”
“도망 못 가고 잡히는 것보단 낫지.”
문제는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단제만큼 검술이 뛰어난 건 아니나 엄연히 혹독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다. 어중간한 능력으로는 도주조차 못 할 판에 하필 마리즈까지 있으니 포위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단제가 뛰어가던 길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감시자들은 곧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점점 좁혀 드는 그들의 포위망과 대치하며 단제는 천천히 마리즈를 내려놓았다.
전부 모여들기 전이니 아직은 도망칠 틈이 있긴 하겠지만 뒤에 마리즈를 두고 뚫을 수 있을까.
“만약에 위험한 상황이 되면요.”
“두고 가라는 말은 하지 마. 도움 안 되는 말은 안 하는 게 좋다.”
“어떻게든 나는 구해 주고 잡혀가라는 말이었는데. 감옥에 갇혀도 마호세르디 감옥에 있는 게 낫죠.”
단제와 함께 가지 않으면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그녀를 당장 감옥에 가둘 터였다. 긴장을 풀어 주려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다행히 통했는지 단제가 설핏 웃었다.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을 느끼며 숨 막히는 정적이 계속됐다. 아까 만났던 감시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곧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감시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순순히 잡히는 걸 권유하고 싶군. 우리 중 누군가가 더 죽는다면, 옆에 있는 부인이 멀쩡한 꼴로 끌려가리란 기대를 버리는 게 좋을 거야.”
황제든 그 밑에 있는 자든 수법이 더러운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자고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이대로면 정말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제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많은 이들을 뚫고 마리즈까지 데리고 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마리즈.”
“네.”
“미안하지만 그대를 구해 주지도 못할 것 같군.”
이대로 잡힌다면 분명 숨 막히는 감시 속에서 수도까지 끌려갈 거다. 단제의 실력을 알고 있는 자들이니 어떤 틈도 주지 않을 거고.
특히나 붙잡힌 이후엔 이들의 감시를 뚫고 마리즈까지 구해 도망가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끌려가면 분명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이다. 거기다 마리즈는 단제와 함께 도망쳤으니 푸르텐가에서도 배신자로 낙인 찍혀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수도로 끌려가 고문 끝에 죽느니,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게 낫다.
단제가 자세를 잡고 싸울 자세를 취하자 바라보던 이 중 하나가 혀를 찼다.
“멍청한 선택을 했군.”
마리즈에겐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 줄 것을.
“전원! 죄인 단제 마호세르디와 그 부인을, 커억!”
말을 하던 이의 목에서 갑자기 단검이 튀어나왔다. 칼을 맞은 남자가 쓰러진 자리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을 본 단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가린, 이곳에서 그대를 볼 줄은 몰랐는데.”
“설마 셋이서 이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둘일세.”
입안에서 중얼대는 듯한 욕설이 작게 들려왔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단제는 모른 척해 주었다.
가린이 온 것을 보니 나엘라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원군이 더 있을 수도 있었다.
“혼자 온 건가?”
“제니가 공작령에 갔으니 지원군이 오긴 할 테지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받은 명령은 부인만 데리고 도망치는 거였어요.”
“지금은 그것도 어렵게 됐군.”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봐야 했다. 단제 혼자 마리즈를 지키며 도주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지만, 가린도 있으니 혹시 몰랐다.
틈을 만들어 가린이 마리즈를 데리고 도망가면 자신이 최대한 시간을 벌며 막는다.
단제가 눈짓을 보내니 가린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도 이걸 위해서 명령을 내린 듯했다.
단제와 가린이 속으로 기합을 넣으며 자세를 취하자 금방이라도 칼이 날아들듯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뒤에 있던 마리즈도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포위한 채 거리를 조금씩 좁히던 감시자 중 한 명이 또 ‘커억’ 하고 신음을 흘리고는 풀썩 쓰러졌다. 이번에도 단제는 아니었다.
“이놈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마호세르디 근처에서 첫째 도련님을 노린답니까?”
감시자들 몇 명이 더 쓰러지며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했다. 예상하던 지원군은 아니지만 단제에겐 매우 반가운 이들이었다.
“에스토, 오랜만에 보는군.”
“단제 경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습니다. 드디어 결심하셨나 보군요.”
에스토와 마호세르디 기사들이 단제 곁으로 붙으며 감시자들에게 검을 겨눴다. 에스토에게 하대하던 마호세르디의 기사가 단제에게도 친근히 말을 건넸다.
“오던 길에 저희가 열세 명을 해치웠고 방금 세 명을 더 해치웠으니 몇 명 안 남았을 겁니다. 단제 경께선 얼마나 해치우셨습니까?”
“다섯 명일세. 오랜만이군, 녹턴 경.”
가린도 잊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도 한 명 해치웠어요, 녹턴 아저씨.”
“왜 나는 아저씨냐? 그리고 겨우 한 명? 기껏 키워 놨더니 영 쓸모가 없네.”
“다섯 명씩 몰려다니던데 제가 어떻게 덤벼요. 그리고 아저씨네 사람이 일곱이었으니까 쉽게 덤빌 수 있었던 거죠.”
가린과 녹턴의 말싸움이 경직됐던 분위기를 가볍게 풀었다. 단제 역시 한껏 긴장해 있던 어깨를 풀며 웃고 말았다.
녹턴이 껄껄 웃으며 상대 숫자를 가늠했다.
“그럼 감시자들은 총 스물여덟 명 남았군요. 빠져나가 정보를 전달하는 놈이 없도록 빠르게 해치우죠.”
숫자를 센 건 이 때문이었다. 감시자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아는 만큼 중간에 한 놈이라도 황제에게 보고하러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럼 저는 부인을 보호하고 있을게요. 마음껏 싸우고 오세요.”
가린이 마리즈를 보호하겠다며 자처하고 나섰다.
이로써 단제는 틈을 만들 필요도, 누군가를 지킬 필요도 없이 오로지 검을 휘둘러 상대를 해치우기만 하면 됐다.
“내가 해치운 다섯 놈 중 몇 명은 발목만 다쳤네. 말을 매어 둔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으니, 한 명은 그곳으로 향하는 걸로 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은 전부 풀어 줬으니까.”
비싼 말을 풀어 준 건 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시자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데다, 더군다나 그들의 말은 특정 소리와 특정 단어에만 반응하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도망친 감시자가 멀리 가지 않은 말 중 한 마리를 발견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도망쳤을 때의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제일 검을 잘 쓴다는 기사의 실력을 오늘 보겠군요.”
녹턴의 말에 단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에스토나 다른 기사들도 긴장감 한 점 없이 웃는 건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단제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나엘라 님, 여기요.”
나엘라는 서튼이 건네주는 투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노헤스카 본대가 거점을 잡고 지내는 곳이었다. 꽤 튼튼하게 제작된 간이 방책이 거점을 둘러싸고 있었고, 수시로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곳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잠을 자는 공간이었다. 병사들의 생활 공간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지휘관들이 지내는 천막들이 있다.
체드란은 본대의 사령관이었기에 이 많은 천막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을 터였다.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나엘라에게는 참으로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다.
“내 님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그렇다고 노헤스카의 병사와 기사들을 해치워 가며 진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엘라의 투덜거림을 들은 서튼이 투구를 건네며 재촉했다.
“일단 이것부터 쓰십시오.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걸리면 어떡합니까?”
“똥 싼다고 해. 그나저나 왜 병사 투구를 가져왔어? 못해도 기사들이 쓰는 투구를 가져와야 할 거 아니야.”
“기사들은 오래 함께 지냈을 거 아닙니까. 나엘라 님의 체격을 보면 단번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노헤스카 기사들한테는 얼굴을 보여 주면 되잖아? 기사들 중에 첩자가 없는지는 전부 확인했다며.”
“아……?”
‘아?’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혈압이 오르는 걸 애써 참아 낸 나엘라는 투구를 쓰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이야 이미 엎질러졌으니 일단은 행동해야 했다.
나엘라는 당당하게 걸었다. 하나, 노헤스카 안주인이 되어 노헤스카의 진지를 잠입해야 하는 설움이 얄밉게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