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2)화 (192/220)

191화

데테로아가 다가올 일들을 기다리며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의 안전과 보호를 명목으로 궁에 갇힌 지도 벌써 며칠째. 열린 창문 너머로 데테로아의 기사들이 이럴 순 없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인생을 잘못 살진 않았나 보군.”

전부 황제의 사람들인 줄 알았거늘 자신을 위해 친위대에 맞서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그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시중드는 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데테로아의 측근으로 알려진 시중드는 이들은 전부 끌려갔다. 생사 확인은 둘째 치고 왜 끌려갔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덕분에 남은 이들은 가장 말단인 하녀들이나 처음 보는 이들뿐이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알고 있지만, 황제가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죽이진 않을 것이다. 황실의 핏줄을 전부 끊어 내려는 게 아니라면.

“전하…….”

말단이었다가 순식간에 데테로아의 전속 하녀가 된 이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차를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망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황제가 첩자를 넣어 자신을 시험하는 걸까. 아니면 저 눈물만큼은 진심인 걸까.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데테로아의 답은 하나였다.

“내가 도망을 치면 이 제국은?”

“다, 다시 돌아오시면 되시지 않습니까. 마호세르디나 노헤스카로 가셨다가…….”

“됐다. 나 하나는 황궁에 있어야 그들이 돌아올 핑계라도 되지.”

이 하녀 말고 다른 이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감시를 소홀히 할 이들이 아닌데 무슨 일인지 한꺼번에 모두 나가 버렸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사들과 대치 중이던 이들이 곧 이곳까지 당도할 것이다.

그때 하녀가 털썩 무릎을 꿇고 눈물이 터트렸다. 데테로아의 발치에 엎드려 울면서도 할 말은 하고 있었다.

“도망치세요, 전하. 사용인들이 쓰는 뒷문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면 도망치실 수 있습니다.”

“괜찮다.”

“제가, 흑, 새로 오신 하녀장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돌아가실 때까지 전하를 탑에 유폐시킬 거라고 했습니다. 제발 도망치세요.”

그런 거였나. 나라가 이 꼴이 나도 황가의 핏줄은 중요했나 보다. 황제는 죽고 난 다음은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줄 알았건만.

“적어도 내 목숨만큼은 안전하겠구나.”

“전하……!”

“다른 이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나는 적어도 황태자라는 이유로 살아는 있겠구나.”

소란스러운 소리가 어느새 지척에 다다랐다. 궁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소리와 기사들의 발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내가 끌려간 뒤에 만약 갈 곳이 없다면…….”

하녀에게 톨레로 상단을 소개해 주려던 데테로아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을 보았다. 바짝 엎드려 있어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그가 신은 구두는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새삼 황제가 제 아들에게조차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데테로아를 흔들고 흔들어 마지막까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나.

톨레로 상단을 소개해 줬으면 이 하녀는 어떻게 했을까. 곧장 코더에게 가 데테로아의 명으로 왔다고 말한 뒤 그를 황제의 앞까지 꾀어냈을까.

수도 어딘가에 숨어 버린 코더와 톨레로 상단까지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갈 곳이 없다면 내 금품을 팔아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데테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른 이들이 잘해 주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 잘 버텨 주리라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쾅─! 문이 열리고 황제의 친위대가 우르르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

자신이 황태자로 보이긴 하는 모양이다.

“그래. 황태자의 침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차라리 체드란 형님이 황태자였다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태자였다면 자신은 좀 더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까.

누굴 좋아해도 말할 수 없고 약점이 될 것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삶이 아닌, 자유로운 삶.

“이곳은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안전한 곳이 감옥인가?”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 형제들도 자신이 꿈꾸던 삶을 바랐을까. 그들 중 황가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가시지요.”

데테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황태자는 자신이 되었다. 그것이 황제의 뜻이든, 자신이 바란 적이 있든 없든 결국 황제가 죽으면 이 제국을 이끌어 갈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래. 가지.”

그렇다면 감옥에 갇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지.

데테로아는 걸음을 옮기며 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하녀 중 한 명에게 눈짓을 주었다.

*

노헤스카 거점의 임시 작전회의실.

팔짱을 낀 채로 체드란이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 모여 있던 이들이 앞다퉈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칸과 어떤 식으로 협정을 체결할지 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두칸을 기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페즈몽레 백작에게 임시 지휘관 자리를 일임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하루 정도 떨어진 거리에 가신 가문의 군사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 놓은 이상 두칸과 전쟁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소규모 전투만 이어졌으나 대대적인 전투 한 번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두칸 측에서 협정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지고 들어오고 있지만, 두칸의 전사들을 더 잃는다면 좋은 태도를 유지하지 않을 겁니다.”

페즈몽레 백작을 유인했으니 표면적으로 노헤스카는 전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두칸은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는 데다, 그들은 내전을 위해서라도 두칸에 병력을 뺄 수 없었다.

차라리 그저 전쟁만 마음껏 할 수 있었다면 이리 피곤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전쟁 하나에 엮인 것들이 많았다. 단순히 노헤스카와 두칸의 영토 분쟁이라 국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트모어 경.”

체드란의 부름에 론체가 대답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페즈몽레 백작의 배신 증거를 잡았나?”

“백작이 있는 두 번째 거점 지역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백작의 수족들도 의심 가는 행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주변 영지의 기사들도 모여 있으니 주의하는 것 같습니다.”

체드란 또한 노헤스카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신할 가문은 페즈몽레가 유력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증거가 없었다. 만에 하나 백작이 아니라면, 진짜 배신자는 놓치고 가신 하나만 잃은 꼴이 된다.

“나엘라는?”

작전회의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황궁에서 사라진 뒤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대공비 전하 외에 문제가 더 있습니다.”

“뭐지?”

“대공령의 사람들과도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본진에 문제가 생긴 건가? 페즈몽레 백작이 선수를 쳤나?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회의실 천막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론체의 눈짓을 따라 마든이 밖을 확인하러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정체 모를 두 사람과 함께였다. 전장도 아닌데 투구까지 깊숙이 눌러쓴 병사였다.

“무슨 일이지?”

이상하다는 생각에 론체가 앞으로 나서자 마든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 다들 밖으로 나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는 마든보다 훨씬 오랫동안 체드란을 보필했던 이들도 있었다. 별칭으로 마든이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은 맞지만 엄연히 하극상이었다.

심지어 마든과 함께 들어온 병사는 더 기가 막힌 태도를 취했다. 들고 있던 검을 들어 차례로 론체, 마든, 그리고 제 뒤에 있던 병사까지 짚더니 문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설마…… 다 나가라는 뜻인가?”

론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체드란의 최측근까지 전부 나가라니,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아닌가. 감히 체드란과 독대를 하겠다는 얘기였다.

흥분한 측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마든이 손을 번쩍 들었다.

“대공령의 상황을 대공 전하께만 직접 전하겠답니다.”

가신이 배신한 정황이 있는 데다 모든 정보가 차단된 대공령의 상황을 생각하면 주의를 요할 필요는 분명 필요했다. 다만, 전령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신원 확인은?”

론체가 날카로운 눈으로 병사 둘을 훑자 마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결국, 모든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든과 따라 들어왔던 병사 하나까지 뒤돌아서고서야 마지막으로 론체도 발걸음을 떼었다.

끝까지 매서운 눈을 한 채 전령을 지나치던 론체는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트모어 경, 빨리 좀 나가지 그러나.”

“설마……!”

이 목소리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론체는 화들짝 놀라 체드란을 한 번 쳐다본 뒤 서둘러 막사를 나섰다.

그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체드란이 천천히 일어났다. 남은 것은 부부의 해우뿐이었다.

“연락 하나 없더니, 깜짝 선물이었나.”

병사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자 보라색 눈과 흘러내리는 긴 검은 머리가 유독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남편이 보고 싶다고 전쟁터까지 달려오는 아내는 나밖에 없을 거예요.”

성큼성큼, 체드란의 몇 걸음만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대가 전쟁터에 나와 있는데 반가워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

나엘라가 손을 올려 체드란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 반짝이는 금발도, 푸른 눈동자도 너무 그리웠다.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내려와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제가 체드란을 이렇게 애닳아하는 날이 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반가움도 걱정도 조금 후에 할까요?”

단번에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오랜 그리움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예전의 건조하던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신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마든과 론체가 남은 병사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서튼이라고 합니다. 다롱 경은 뵀었는데 다른 분들은 처음이네요.”

“서튼이라…… 부단장에게 들어본 적 있네.”

“아, 다롱 경이 부단장이라고 하셨지 참.”

“황후와 관련된 반란군 진압에 참여했다지?”

“톨레로 상단에도 잠깐 몸담았었죠.”

“원래는?”

“그때도 지금도 저는 라엘 단장님 소속입니다.”

낯선 이름에 잠깐 고민하는 론체와 달리, 마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조알론이라던 대장장이에게서 들어 본 적 있었다.

그 순간, 막사 안에서 무언가가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마주친 이들이 잠시 낯빛을 붉혔다.

“사람을 물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막사 앞에는 그들 말고도 조금 전 쫓겨난 사람들과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 무슨 일이 난 거 아니냐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까지 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는 마든을 보며 서튼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날지도 모르잖습니까.”

“무슨 소리?”

“설마 연애 경험이 없으십니까?”

이들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한 것은 막사 안에서도 더 이상 큰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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