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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3)화 (193/220)

Chapter 24. 내전의 시작

192화

제국 내에서 황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이라 부를 만한 곳이 있다면 마호세르디 공작령이다.

제국의 동쪽과 북쪽은 바다이고 남쪽은 사막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서는 성벽이나 성을 짓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마호세르디는 서쪽에 국경을 맞댄 제스라 왕국과 수백 년간 이어진 전쟁을 방비하여 독자적인 성벽을 쌓아 왔다.

또한 제스라가 마호세르디를 침공할 때를 대비해 수성전이 가능하도록 설계해 둔 데다, 성을 빼앗길 경우를 위해 공성전에 필요한 무기들도 항상 가득 준비해 두었다.

그런 이유로 공작령은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군사 경계 지역까지 높은 성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 자리한 마호세르디 저택은 영지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게 오늘날 황제의 병사들을 막아 내는 데 쓰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공작이 자조적인 미소를 짓자 앞에 있는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지엘라 황녀님을 데려가기 위해 수도방위군의 일부가 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도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나?”

“이틀 내면 공작령 영내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규모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 없을 테니,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쪽에서 지엘라 황녀를 내주지 않는다면 진짜 내전이 시작될 것이다. 마호세르디는 황제의 병사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할 테니 말이다.

“성문은 열어 주지 않는다. 딱 한 번만 경고한 뒤 계속 접근하려 하면 대응하라.”

내전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마호세르디는 이미 봉쇄령에 들어갔다. 그들과 우호적인 영지가 아니더라도 주변 영지들 역시 전쟁의 여파로 피해가 퍼질 것을 우려해 모두 문을 닫아걸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공작의 물음에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내전이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친위대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단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제가 제스라 왕국을 상대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네가 전장에 나가는 대신 다나한을 불러들이란 말이냐?”

“예. 제가 마호세르디의 선봉에 서서 상대한다면 친위대들의 사기가 꺾이기는 할 겁니다. 하나, 저 역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껄끄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렇겠지. 네 의견대로 다나한을 불러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다나한은 잘 해낼 겁니다. 진짜 전쟁은 저보다 훨씬 많이 겪었을 테니까요.”

무술 실력만 놓고 본다면 단제가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나 친위대에 있으며 황도 밖으로는 나간 적이 없는 그와, 오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쌓은 다나한을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공작도 그게 더 낫다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검은 방패 기사단도 불러들여야겠군. 아무리 가문의 첫째가 너라지만 검은 방패 기사단의 주군은 다나한이니, 다나한과 함께 있는 게 그들 역시 손발을 맞추기에 좋을 것이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을 제외한 병력으로도 제스라 왕국을 막아 낼 자신은 있습니다.”

마호세르디의 가장 강한 기사단인 검은 방패 기사단. 그들은 현재 다나한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제스라 왕국 국경 지역의 영지 대부분을 함락했고,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죄다 불을 지른 상태였다.

그곳을 원상태로 돌리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내전을 벌이는 동안 제스라 왕국을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될 터였다.

“제스라 왕국에 있는 첩자들을 통해 소문을 퍼트려라. 다나한이 돌아가고 단제가 국경 지역을 맡을 거라고.”

황실 친위대의 단장이라는 직함은 제스라 왕국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어해 줄 것이다. 단제의 실력을 직접 보지는 못했더라도 보통 재능으로 그 자리에 오르진 못할 거라는 걸 잘 알 테니까.

거기다 마호세르디의 첫째가 아닌가.

“그럼 단제 너는 바로 출발하거라. 다나한과 검은 방패 기사단을 불러들이고. 아, 푸르텐가의…….”

“마리즈입니다.”

“알고 있다. 어떻게 부를지 몰라서 고민이었지.”

자신의 며느리라지만 어디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애초에 며느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 단제와 함께 왔을 때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누가 봐도 첩자일 게 뻔한 푸르텐가의 여식을 데려왔으니 말이다.

단제는 그저 믿어 달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을 언질해 주었다.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으나 남아 있는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무슨 생각이냐.”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가 그렇다고 하니 넘어가지만, 가신이나 기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어차피 내전이 끝나면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감시자들도 사라질 테니까요.”

“이놈아, 푸르텐가는 네 부인의 가족이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제 가족이 모두 죽는 것과 다름없는데 괜찮은지 물어는 봤느냐.”

단제는 잠시 멈칫하며 답이 없었다.

공작으로선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제 자식이 이리 맹한 줄이야. 대체 친위대에선 뭘 가르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암만 보아도 검 쓰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안 가르친 듯했다.

“국경 지역에는 함께 가거라.”

“마리즈를 데리고 말입니까? 여인이 지내기엔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호세르디에 둘 수도 없지 않느냐. 아직 그 아이에게 내부 사정을 전부 공개할 수는 없다.”

내전에는 많은 이들이 얽혀 있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얽혀 있는 가신들까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니 행동 하나, 혹시 모를 위험 요소를 감안할 순 없다. 감시자들과 언제 어떻게 접촉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주요 정보를 공유할 이유 역시 없었다.

“마리즈가 묻더군요. 마호세르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 주겠냐고. 저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사정을 얘기하면 쉽게 받아들여 줄 거라고.”

공작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쩌다 이런 놈을 아들이라고 낳았을까.

단제를 못 믿는 건 아니다. 그가 봤을 때 마리즈가 믿을 만하다면 당연히 공작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내전이 코앞이었다. 마호세르디의 수장으로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때다. 일말의 불안 요소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제 보니 너는 완벽하게 기사구나.”

단제가 무슨 뜻이냐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단제의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면은 호위 기사로서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질이지만 가문을 이끌어 갈 사람으로선 맞지 않는다.

단제는 누군가를 지키는 자고 다나한은 사람들을 이끄는 자다. 어쩌면 처음부터 공작이 될 운명은 다나한의 것이었던 게 아닐까.

공작은 속으로 생각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굳이 아들의 상처를 건들고 싶지 않았다.

“됐다. 번복은 없다. 네 부인을 데리고 군사 경계 지역으로 가라.”

“아버지.”

“식구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네가 마리즈를 통해 보았던 걸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보려 하는 것이 아니냐.”

단제에게 들었던 대로 강단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단제가 국경 지역으로 가면, 제스라 왕국 쪽으로 넘어가 있는 전선은 군사 경계 지역까지 다시 끌어와야 한다. 직접 전쟁 운용을 해 보지 못한 단제에게 언제고 게릴라 전이 생길지 모를 전선을 맡길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바로 마호세르디까지 피신할 수 있도록 도주로와 가까운 곳으로 이끌어 와야 했다. 그러니 마리즈 하나 피신시키는 데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단제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마리즈를 좋아하는 걸까. 위험한 지역으로 데려가기 싫어하는 것을 보니 이미 마음을 준 것 같았다.

“네 부인을 위해서다. 이곳에 누가 있는지 잊지 마. 감시자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더냐? 우리야 이해한다손, 다른 이들은 푸르텐가가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진 네 부인이 감시자들이라는 편견을 쉬이 떼지 못할 게야.”

이곳엔 감시자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에스토뿐만 아니라 그날 그 장소에서 함께한 기사들도 있었다.

평생을 황제에게 시달린 지엘라와 센텐과 엮인 하일모라 역시 껄끄러워할 게 분명했다. 황제에게 불만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였다.

“네 부인의 죄가 없다 한들 너는 그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느냐. 감시자들의 가문이 아닌 마리즈 그 자체를 봐 달라고 말이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친우를 감시자들에게 잃었다.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았을 뿐 공작의 분노가 다른 사람보다 옅을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씁쓸하기는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즈 또한 제 가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친 모양인데…… 그런 그녀를 올곧게 볼 수 없는 제 편견이 씁쓸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네 부인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때까지는 기다려.”

“알겠습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였다. 뒷맛이 매우 썼다.

*

“음…….”

하일모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지엘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하필이면 산책하던 정원에서 마리즈와 마주친 것이다.

“발목은 좀 나으셨나요.”

지엘라가 그나마 할 말을 찾았다.

“네.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단제와 함께 마리즈가 마호세르디 저택으로 온 이후로, 세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지엘라는 더 복잡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윗사람이 될 터였다. 다나한과 아직 제대로 미래를 약속한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시간문제였다.

만약 결혼하게 되면 마리즈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걸까. 어쨌든 단제의 부인이니 좋은 사이로 남는 것이 좋을 터인데…….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벌써 관계를 따지는 건 너무 멀리 간 듯싶었다.

“다행입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이것도 좀 뭐했다. 엄연히 지엘라는 아직 마호세르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제가 마리즈를 챙기는 건 외부인이 내부인을 챙기는 꼴이 되었다.

그녀와 얽혀 있는 복잡한 사정은 모르지만, 지엘라가 알고 있는 건 마리즈가 현재 마호세르디에 소속의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때 주변을 지나가던 에스토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정확히는 지엘라에게 볼일이 있었는지 바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황녀님,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에스토와 그녀는 마호세르디에서 재회한 뒤로 금방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바쁜 다나한과 도망 다니던 나엘라 대신 에스토가 항상 그녀의 말 상대를 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요?”

“예. 무엇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안 좋은 소식부터 듣죠.”

문득 파르로시 황녀가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검을 배운다던데 혹시 그녀를 챙기라는 걸까?

어머니는 다르지만, 지엘라가 언니이긴 하니까 껄끄러워도 파르로시를 챙기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안 좋은 소식은 오늘부터 인수인계를 받으셔야 한다는 겁니다. 내전이 벌어지면 대부분 이곳을 비울 테니 그동안 황녀님께서 저택을 관리해 주셔야 합니다. 공작님께서 황녀님께 살림을 부탁한다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말입니까?”

지엘라는 저도 모르게 마리즈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당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나한 단장님이 공작위를 승계받으시면 당연히 황녀님께서 맡으실 일입니다. 일찍 배운다고 생각하십시오.”

에스토의 말은 마치 자신이 공작부인이라도 될 것처럼 들렸다. 그러려면 일단 다나한과 결혼을 해야 하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지엘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좋은 소식은 안 물어보십니까?”

“흠흠, 좋은 소식은 뭔가요.”

“곧 다나한 단장님께서 돌아오십니다.”

지엘라는 이때까지 봤던 표정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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