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4)화 (194/220)

193화

“세상에, 그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드레스를 뭘 가져왔지?”

갑자기 지엘라가 저택을 향해 뛰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하일모라와 눈이 마주친 에스토는 작게 웃었다.

순간, 마리즈를 본 에스토가 살짝 멈칫하는 것을 하일모라는 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제 친구가 마리즈를 껄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챘다.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상황을 눈치챈 마리즈가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떠나는 마리즈를 바라보던 하일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왜 마리즈를 껄끄러워하는지 묻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토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그럼 너는 왜 갑자기 이혼하는데?”

서로 대답할 수 없는 건 하지 말자는 건가. 코웃음을 친 하일모라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너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란다.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는대. 마호세르디의 정보를 캐내려고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한 거고, 그 망할 센텐인가 뭔가 소속이래.”

“뭐?”

에스토의 눈에 순식간에 분노가 어렸다.

“설마 한 대도 안 때려 주고 온 건 아니겠지?”

“그냥 이혼하자고 하고서 도망치듯이 왔어.”

“이거 진짜 바보네. 나랑 나엘라가 널 그렇게 키웠어?”

화를 내는 에스토를 보며 하일모라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위로를 전해 오기에 급급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친구라는 놈은 되레 화를 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 더 마음이 편하고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껏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나엘라가 대신 때렸어.”

“그래? 나도 가서 한 대 때려 줘야 했는데. 너도 침이라도 뱉고 왔어야 할 거 아냐.”

“못 때렸어. 나 아직 그 사람 좋아해.”

“그럼, 사람 좋아하는 게 한순간에 접어져? 그건 당연한 거고 배신은 배신이지. 좋아하더라도 주먹질은 하고 왔어야 할 거 아냐.”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이 있다면 이들과 친구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하던 하일모라는 자꾸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참아 내곤 말을 돌렸다.

“넌 왜 껄끄러워하는데?”

“원래 이름이 마리즈 푸르텐이야. 감시자들을 처음 만든 가문 중 하나.”

“우리 인생 참…….”

하일모라의 눈동자에서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달픈지, 에스토나 저나 이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하러 울어. 우는 건 다 끝나고 하자. 나 아직…… 아버지 제대로 못 보내드렸다.”

장례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명복도 빌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거였다.

하일모라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참을 때다. 모든 것이 다 끝나면 함께 울기로 한 약속을 다시 마음에 새겼다.

“이런 상황에 미안한데 파르로시 황녀 좀 부탁하자.”

“미쳤어? 황녀님 볼에 흉터, 내가 만든 거야.”

“당사자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던데. 다들 파르로시 황녀를 껄끄러워해서 그래.”

“나도 껄끄러워.”

하려면 본인이 할 것이지 왜 자신에게 떠맡긴단 말인가. 게다가 파르로시를 보면 지하 감옥에서의 일이 생생히 떠올라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안쓰러운 마음이야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녀에게 상처를 준 제가 위로한단 말인가.

“황녀는 오히려 널 편해해.”

“어떻게 알아?”

“한 번씩 잘못을 주고받은 거잖아. 다른 사람들은 파르로시 황녀가 일방적으로 잘못만 했고.”

“하아…… 진짜…….”

어째 편안히 가는 법이 없다. 테너 때문에 안 그래도 심란한데 파르로시까지 제가 챙길 수 있을까.

“이거 뭐로 갚을지 생각해. 꼭이다.”

“나엘라가 대신 갚아 줄 거야.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이래 봬도 대공비인데 가진 거 많겠지.”

“나엘라는 안 돼. 나도 미안한 거 있단 말이야. 나 때문에 테너한테…….”

“아오, 그놈 만나면 꼭 두 대 때려 줘야지.”

두 사람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편한 친구이기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엘라 보고 싶네. 나엘라까지 있으면 같이 어울려 다니던 때랑 똑같을 텐데.”

“그러게. 금방 셋이 볼 수 있겠지.”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그때는 훨씬 많은 사람과 함께 볼 수 있으리라.

*

나엘라는 턱을 괴고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놨으니 총체적 난국일 텐데, 다들 잘하고 있으려나. 마호세르디를 떠올리자 마음 한편이 복잡해졌다.

체드란에게도 수도의 상황에 대해 전해 준 참이었다. 반란이 공표됐다는 사실과 그 외의 다른 정보들도 전했으니 더 거리낄 것 없이 내전을 시작하면 되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왜 자꾸 탁상공론만 벌이고 있는 걸까.

“대공비 전하, 듣고 계시는 겁니까?”

론체의 물음에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있긴 했지만 듣고는 있었다.

“그럼 페즈몽레 백작은 어떻게 제거하는 게 낫다고 보십니까?”

“두칸에서 기습했다고 해야지. 이 거점에 있는 병력이 당장 노헤스카로 돌아가고 나면, 남은 병력은 페즈몽레 백작이 지휘관으로 있는 곳뿐이야. 그렇다면 백작은 적의 지휘관을 노린 두칸의 기습으로 사망한 게 될 걸세.”

“그렇군요. 하지만 그럼 저희도 반격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뒤에 두칸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고 주장하면 되겠지.”

“주변 영지들이 그 말을 받아들일까요? 지휘관이 죽었는데 평화 협정이라뇨.”

“지금쯤 주변 영지들에도 반란이 알려졌을 걸세. 병력을 이곳으로 보내 놨으니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 그들도 평화 협정이 달가울 테니 별말은 없을 걸세.”

노헤스카가 반란군으로 지정되었다. 내전에 아무 대비도 못 한 상황에서 두칸과 전쟁을 할 수는 없으니, 억지스럽게 평화 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터였다.

우리 쪽에서도 지휘관의 목을 하나 내주고 전쟁을 멈춘 셈이라 두칸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을 테고.

나엘라는 아무 말도 없는 체드란이 이상했다. 이 정도는 그도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회의 내내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에 바라보니 체드란이 작게 미소 지었다.

혹시 나엘라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앞으로 함께 생활할 최측근들에게 그녀의 능력을 알려 줄 무대를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그가 나엘라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바로 두칸과 협상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게 두칸의 전사 몇은 기습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겁니다. 전사들을 빌려 달라 요청해 보죠.”

“두칸에서 원하는 게 뭔지는 들어 봤나?”

“정착할 땅과 자급자족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틸 경제적 지원이랍니다.”

“사막을 너무 오래 떠돌아다니긴 했지.”

그들이 갑자기 평화를 원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원인은 나엘라가 아닐까. 지금까지의 전투는 노헤스카만 상대해 왔다. 하나, 나엘라와의 결혼으로 앞으로는 마호세르디까지 전쟁에 합류할 가능성이 커졌다. 과연 두칸이 그때도 두칸으로서 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두칸에서 내민 평화 협정은 현재 제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니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내전이 일어날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설마 내전이 일어났다고 협상이고 나발이고 갑자기 쳐들어오지 않겠죠.”

마든이 좀 불안하다며 걱정을 내비쳤다.

“협상 때 잘 말해. 우리는 절대 지지 않을 거고 이번 일로 신의를 보겠다고. 그래야 앞으로의 두칸도 믿을 수 있겠지.”

그들이 배신한다면 잠깐 노헤스카는 차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후 두칸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들도 그 미래를 모르진 않을 터였다.

거기까지 얘기하자 이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체드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당장 노헤스카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엘라를 사람들에게 소개한 뒤로 체드란은 이곳에 없는 사람인 척 조용히 있었다. 겨우 꺼낸 한마디가 회의가 끝났다는 선언이라니, 나엘라는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회의 때 원래 말을 잘 안 해요?”

회의실을 빠져나가던 사람들이 둘을 힐끔힐끔 바라봤지만 나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둘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대부분 반트모어 경이 말하지.”

“말이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다른 단장들도 좀 말하고.”

“최전방 지역의 단장들은?”

“그대는 오늘 처음 봤겠군. 다들 실력이 좋아.”

군사 경계 지역을 담당하는 지휘관들이니 당연히 실력 있는 사람으로 배정한다.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거점을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오늘 밤은 대공령 저택에서 자고 싶은데.”

“그대가 원한다면.”

“당신은요?”

“그대를 따라가야지.”

두칸과의 협상은 어쩌려고? 나엘라의 눈빛을 읽었는지 체드란이 미소 지었다.

“협상은 반트모어 경에게, 거점 정리는 다른 이들에게 맡기면 되네.”

“페즈몽레 백작은요?”

기습을 위해 두칸의 전사들이 움직인다고 해도 페즈몽레 백작을 암살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엘라는 그 거점에 잠입해 직접 그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튼을 데려온 거 아닌가?”

“추가 수당을 엄청나게 요구할 텐데?”

“그대와 오늘 밤에 저택에서 잘 수 있다면 그 정도야.”

이렇게 낯간지러운 사람이었나.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그의 눈동자가 작게 불타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암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증거를 찾았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처형해도 괜찮죠. 어차피 반란군이 된 마당에 황제의 첩자라니.”

“내 부인은 능력도 좋지. 하지만 후환을 남겨 두는 것보단 거슬리기 전에 없애는 게 나을 걸세.”

“황제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리긴 해야 해요. 다만 루부스 후작가와 아이안 공작가는 일단 제외하려고요.”

황제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군사력이 너무 거대해지는 걸 두려워해 제거하려 들었다. 그것을 잘 아는 만큼 일단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내부의 적에 대비가 부족했던 루부스 후작가를 당장 내전에 끌어들일 수도 없으니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당신은 뭘 하려고요.”

“그대의 레이디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강한 레이디가 어딨어요?”

“그럼 잠깐은 그대의 기사가 되지. 내가 얼마큼 쓸모 있는지 어필해야지.”

체드란이 나엘라의 허리를 휘감고는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내전을 오래할 생각은 없어. 단번에 중앙을 장악하고 황궁으로 쳐들어가야지.”

“나한테 좋은 계획이 있는데, 들어 볼래요?”

나엘라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체드란은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 것 같거든요. 크게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황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어요.”

노헤스카가 내전을 일으키며 중앙까지 올라가는 동안 황제의 군사들이나 황제 세력의 귀족들을 계속해서 상대하게 될 것이다. 매번 전투를 치르며 그들을 꺾고 올라가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이들도 알 때가 됐죠.”

지금쯤 지엘라와 하일모라, 파르로시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 도착했을지 모르겠다.

나엘라는 세 사람에게 그들이 황제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리는 것에 대하여 허락을 구했다. 더불어 그동안 황제에게 당했던 사람들과 앞으로 당할 예정이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하일모라와 베르에티, 줄리 부인이 만들어 놨던 귀부인들의 세력을 사용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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