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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5)화 (195/220)

194화

베르에티는 손톱을 깨물다가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물어뜯은 손톱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괜찮은 거냐.”

“아버지.”

언제 온 것인지 루부스 후작이 곁에 서 있었다.

“혹시 찾으셨습니까?”

나엘라가 알려 준 대로라면 루부스 후작가를 대체할 만한 가문이 있을 터였다. 그자가 황제의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루부스 후작가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대체할 만한 가문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황제의 사람인지는 모르겠구나.”

최근 나엘라에게 온 편지를 보면 루부스 후작가는 내전이 끝나도록 큰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루브스 후작가가 내전에서 나엘라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배신할 사람을 뻔히 두고 나엘라를 도와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루부스까지 참전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저는 뭔가 돕고 싶어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 루부스까지 합치면 감히 누가 대적하려 들까. 적의 사기를 꺾기에도 좋을 텐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베르에티.”

루부스 후작이 베르에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호세르디로 지엘라 황녀님을 데리러 갔던 수도군이 전멸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멸이라니, 마호세르디가 강경하게 나섰다는 얘기인가?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던 수도군이 침입을 강행했던 모양이야. 마호세르디는 본보기 삼아 전멸시킨 것 같고. 애초에 수도군 전체가 온 것도 아니고 일부였으니 어리석은 행동이었지. 평화에 안일한 이들이 수없이 전쟁을 치렀던 마호세르디를 우습게 본 거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적을 막아 내는 동안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중앙 귀족들이 전부 손을 잡고 두 가문을 상대한다 해도 언젠가는 함락되고 마리라.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동부의 루부스 후작가와 북부의 아이안 공작가라고 다르겠는가. 해적들이나 상대하던 이들이 진짜 전쟁을 치렀던 군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황실 친위대, 수도군, 중앙 귀족들이 전부 손을 잡으면 두 가문을 상대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안심해서는 안 되지. 싸우고 검을 휘두르는 법은 알지 모르나 전쟁을 하는 법은 모를 테니까.”

전쟁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 면에서 두 가문이 손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이 탄생한다는 의미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어쩌면 황제는 이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두 가문의 결혼이 이루어진 순간 제국에서 그들을 상대할 자가 없을까 봐. 그리고 본인의 죄가 그대로 돌아올까 봐.”

황제의 죄가 제 목을 조인 것이다. 그가 저지른 죄악들 때문에 밤에 잠도 못 들고 측근조차 의심하며 살았겠지.

이제 와서 두 가문을 제거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더 빠르게 마음먹었다면 모를까.

“황제가 모두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결국 내전은 두 가문의 승리로 돌아갈 테고.”

“우리가 도우면 더 빨리 끝날 수 있잖아요.”

“참전하더라도 그건 가주인 내가 선택할 문제다.”

“하지만……!”

베르에티도 가문을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 황후의 곁에 잠입해 정보를 빼내기도 했고 나엘라가 시킨 것들을 완벽하게 해내려 움직여 왔다. 이 정도면 자신도 말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루부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모르기는 너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얼굴을 보던 이들이 몇이나 죽어 갈지 예상이 되느냐.”

“그렇다고 제 의견이 필요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얘기다. 네가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 너 또한 그들의 죽음을 같이 감당해야 한다.”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후작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이니, 내전이 끝난 뒤의 책임도 오로지 자신이 지겠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딸인 제가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터였다.

“일단 황제의 사람부터 찾자꾸나.”

후작은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집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나엘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확인했다.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어 정확한 시간이 가늠되진 않았으나 옆에 체드란이 없는 것을 보니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일어나셨어요?”

기척을 느꼈는지 지안이 들어오며 시중을 들어 주었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커튼을 치니 해는 이미 중천에 있었다.

“체드란은?”

“보고를 받고 계십니다. 거점 정리가 끝난 모양입니다.”

“그럼 기사단들도 곧 돌아오겠네.”

그다음 페즈몽레 백작이 노헤스카 기사단이 있던 거점으로 군사를 옮겨 올 것이고, 그곳에서 암살을 당하게 될 터였다.

“두칸과의 협정은?”

“거점 정리를 하는 틈을 타서 체결했다고 합니다.”

“주변 영지의 병력도 해산시켜야 하고 수도의 여론도 만들어야겠네.”

이왕이면 황도까지 무혈입성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전투만 치르며 황도까지 올라갈 계획이었다.

“마호세르디 쪽에선 연락 왔어? 배신자는 어떻게 됐대?”

가린과 제니를 마호세르디에 보내고 바로 체드란을 만나러 가느라 배신자를 찾아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듣지 못했다. 어제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단제가 무사한지만 확인했을 뿐이다.

“찾았습니다. 다행히 가신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요새 갑자기 성장한 가문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서신을 찾진 못했지만 다른 것을 찾았다고 합니다.”

황제의 서신이나 감시자들과 연락한 흔적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신중한 그들이 눈에 띄는 증거를 남겨 뒀을 리가 없다.

“무슨 증거를 찾았는데?”

“동부 귀족과의 서신이요. 그 서신에 ‘센텐’의 언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마호세르디의 무기류를 팔아넘긴 정황도요.”

마호세르디의 무기라면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다. 다만 대장장이들이 개인적으로 파는 것까진 관여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해 무기를 사들이고 팔아넘겼으리라.

“그럼 그 동부 귀족이…….”

“네. 바로 베르에티 영애에게 편지를 보냈답니다.”

루부스 후작가를 대신할 가문도 찾았고 마호세르디의 배신자까지 찾았으니 좋은 일이다.

“그럼 마호세르디도 수도로 진격하는 데 문제없겠네. 어떻게 처리한대?”

“그냥 쳐낼 거라고 합니다. 지엘라 황녀님을 압송하러 온 수도군도 전멸시켰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화끈한 분인지 몰랐는데.”

“오래 참으셨잖아요. 누구보다 분노하셨을 텐데.”

그건 그렇다. 어느 누가 아버지보다 더 분노할 수 있겠는가.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아버지일 텐데.

나엘라는 그 외에 몇 가지를 더 보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웃기지. 그렇게나 의심을 해 대며 완벽을 기한 황제인데, 고작 다른 이에게 보낸 서신이 꼬투리 잡혀 증거가 됐다니 말이야.”

페즈몽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부인과 나눴던 서신에서 황제를 언급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장이라도 남부의 안주인이 될 것처럼 굴었고, 그걸 황제가 이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 황제가 해 놓은 것들만 보아도 그럴진대 자신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해 왔을까.

“내가 이때까지 큰 실패 없이 이만큼 해 온 건 운이었을까.”

사람은 작은 틈으로도 쉽게 무너지는데 말이다.

“내 기사단을 불러와.”

나엘라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며 활동하기 편한 셔츠와 바지를 골랐다.

“우리의 주특기는 첩보, 공작, 암살이잖아. 이제 진짜 일을 해야지.”

원래는 제스라 왕국과의 전쟁에서 비밀리에 적진에 투입해 적을 교란하고 적장의 목을 베기도 했다. 그런 능력을 이제는 조국에 써야 한다니, 아이러니다.

이번 내전에서 그녀의 기사단보다 잘할 곳은 없었다.

“이제 진짜 이름이라도 붙여 줘야 하나.”

“그냥 나엘라 님이 쓰시던 이름을 따서 라엘 기사단은 어떠세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옷을 갈아입고 검까지 허리에 매자 지안이 머리를 묶어 주었다.

“그래서 첫 임무는 뭐예요?”

이름이 생긴 기사단의 첫 임무라. 뭐가 좋으려나. 할 일이 워낙 많으니 뭐부터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페즈몽레 백작가부터 정리할까.”

수도에 아직 백작 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백작의 사람들도 남아 있었고.

“제일 늦는 사람이 서튼에게 갈 거라고 전해. 그쪽에도 한 명 정도는 붙는 게 낫겠지.”

“기겁하고 뛰어오겠네요. 서튼과 같이 일한다니.”

지안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하나같이 서튼을 기피하니 이건 나름 큰일이지만 어쩌겠나. 본인의 업보지.

가장 늦을 한 사람을 애도하며 나엘라도 웃어 버렸다.

*

수도의 페즈몽레 백작저.

백작 부인인 로자리안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그녀가 버럭 외치자 놀란 시종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명성이 드높은 대귀족들조차 시중드는 이에게 무릎을 꿇게 하지는 않는다. 하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서 오래전부터 시종들에게 시켜 왔다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마치 백작 부인이 아니라 황족이라도 받드는 것처럼 말이다.

“마님, 마지막 연락이 바로 사흘 전이었습니다. 벌써 다음 연락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네 이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그동안은 사흘 간격으로 꼬박꼬박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

“하, 하지만 백작님께서는 전쟁터에 나가 계시는데 어찌…….”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이놈을 끌고 나가라!”

죄 없는 하녀가 끌려 나가고 바로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이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니 새로운 이가 또 얼마나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진 모를 일이었다.

“너도 방금 나간 것과 같은 말을 한다면 똑같이 될 줄 알거라.”

다행히 이번에 시중들게 된 이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백작 부인이 원하는 말과 그녀의 기분을 달래 줄 처세술을 갖고 있었다.

“마님, 아무래도 전령 놈들이 조금 풀어진 게 아니겠습니까?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느라 편지가 늦어지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뭐라?”

“감히 백작님께서 전쟁 중이시라고 일을 소홀히 하다니요. 제가 영지로 사람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백작 부인은 하녀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백작이 편지를 늦춰 보낼 리는 절대 없었다. 그 편지엔 부인을 위한 편지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하녀의 말대로 전령들이 해이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사람을 보내 알아보거라!”

“예, 마님. 사실이 확인되면 그놈들을 엄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님의 위엄을 보여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흥, 그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 하녀는 백작 부인의 침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평범한 하녀처럼 보이던 이가 눈을 날카롭게 뜨자 기세가 단번에 변했다.

“백작 부인이 초조해하는 걸 보면 부인이 이번에 보낼 편지에 황제의 서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페즈몽레 백작은 전쟁터에 나가 두칸과의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황제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이 기회를 날릴 리가 없다. 분명 무슨 지시가 담긴 서신일 텐데.

“이걸 또 어떻게 빼돌린담.”

하녀는 이마를 짚고는 고민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 안 되면 무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잡히면 라엘 단장님이 어떻게든 구해 주시지 않을까.”

하녀는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며 할 일을 마저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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