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조용하던 감옥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간마다 식사를 내주는 병사나 이곳을 감시하는 이들의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30분 전부터 은은하게 퍼진 수면향을 맡고 잠들어 있으니까.
“황태자 전하.”
데테로아는 얼굴을 가리던 천을 단단히 묶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지만 스며드는 수면향을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던지라 순간 비틀대었다.
“해독제입니다.”
덜컹, 감옥문이 열리고 들어온 자가 해독제를 건넸다.
“수면향이라니, 대공비께선 별걸 다 가지고 계시는군.”
“지금은 단장님이라 불러 주십시오. 단장님께선 얼마 전 독에 당하신 이후로 온갖 독에 이를 갈고 계셔서요.”
수면향도 일종의 독이었다. 그럼 독에 당해서 온갖 독들을 수집한다는 얘기인가.
“독에 당했다고? 누가 대공비를 독살하려 했단 말인가?”
“황제입니다. 독살은 아니지만, 의도가 좋지 못했던 건 맞습니다.”
“이런.”
데테로아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공비에게 독을 먹였단 말인가. 체드란을 죽이려 하더니 이제는 그 부인에게까지 손을 뻗쳤나.
“그대의 이름이 말리라고 했던가.”
“예. 잠시 톨레로 상단을 돕고 있습니다. 감옥 밖에서 코더 님께서 대기 중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이나, 대공비의 사람이라고 들었다. 거기다 그는 대공비를 ‘단장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대체 그녀는 이전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란 말인가. 정체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는 게 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하셔야겠습니까? 감옥에 계시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차라리 코더 님께 의탁해 안전한 곳으로…….”
“말리, 이 일에 목숨을 걸지 않은 자가 있던가.”
코더에게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나약했던 자신을 믿고 따라 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황태자일세.”
“전하…… 단장님께선 여론을 조성하려 준비 중이십니다. 곧 있으면 황녀님들과 대공 전하, 마호세르디의 사람들, 그 외에도 황제에게 당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퍼져 나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알고 있네.”
데테로아가 웃으며 말리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되면 황제를 위해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막아서는 이들이 적어지겠지.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믿는 데엔 시간이 걸릴 걸세. 내전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잖은가. 시간이 우리의 편이 되어 주리라 확신할 수 있는가.”
“적어도…… 대공 전하나 단장님께 알린 뒤에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문이 퍼지기 전에 해야 한다네. 미안하지만 비밀을 지켜 주게나.”
자신이 어리고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체드란이나 나엘라에게 이 계획을 알린다면 위험하다며 극구 반대할 터다.
그래도 일을 더 빠르고, 손쉽게 진행하기 위해선 제 입으로 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황태자인 제 말의 파급력은 일반적인 소문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여론전의 포문을 여는 것이지.”
“전하의 생사는 장담할 수가 없어집니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죽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모두가 목숨을 거는 마당에 황태자가 되어 안전한 곳에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끝이 났을 때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해야만 한다.
“꼭 하셔야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명분으로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셨지만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는 그래선 안 되겠지. 지금 그들은 반란군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네.”
“귀족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다수는 이 일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렇다고 반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
말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명백히 보이는 반란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마호세르디는 지엘라를 데리러 간 수도군을 전멸시켰고, 황실 친위대 단장 단제는 도주했다. 여기에 노헤스카까지 봉쇄령을 내린 채로 내전 준비를 시작한 정황이 있다. 이러한 상황들 이전에는 대공비가 반란 혐의를 받으며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어느 누가 이것을 반란이 아니라고 확신하겠는가. 다만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들어 의심의 눈초리만 보낼 뿐이었다. 데테로아는 그걸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대는 이번 일에서 빠지게. 대공비를 볼 명목이 없지 않겠는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면 알아서 도망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마 다행이군. 혹여나 문제가 생긴다면 코더를 부탁하네.”
그는 지금 자신을 가장 걱정하고 있을 코더가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까지 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제 처치가 씁쓸했지만, 데테로아는 내색 없이 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겨우 이런 마음가짐으론 할 수 없는 일이니.
*
황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중앙 광장.
주로 평민들이 찾는 곳으로, 평소에는 귀족들의 코빼기도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한데, 오늘따라 곳곳에서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으론 보이지 않는 이들조차 그들이 데려온 수하인 듯싶었다.
한 남작이 식당 테라스 중에서도 광장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평소 자주 어울려 다니는 다른 귀족들도 보였다.
“그 소문이 진짜겠습니까?”
이들이 오늘 광장에 온 것은 며칠 전부터 돌기 시작한 이상한 소문 때문이었다. 바로 죽은 대공비가 오늘 이곳에 나타날 거라는 소문이었다.
“말이 됩니까. 소문이 진짜라면 벌써 친위대가 나타났겠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 황제 폐하께서도 신경조차 안 쓰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에나 황제의 귀가 있으니 당연히 그 소문은 그에게도 들어갔다. 친위대가 오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들은 알 수 없었다.
“오늘따라 평민들도 가득하군요.”
“원래 이곳은 사람이 많은 곳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광장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 모여 있던 귀족들도 소문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중앙에 있는 단상 근처에서부터 수군대는 소리가 조금씩 주변으로 번졌다.
“저건 뭐지?”
가끔 축제일 때만 쓰이는 중앙 광장의 커다란 단상에 한 무리가 올라섰다. 전부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감춘 자들이었다.
그 수상한 행색에 퍼진 웅성거림에 바쁘게 지나치던 평민들도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오르던 이들은 어느새 한 명을 중심으로 퍼져 둘러싸기 시작했다. 마치 그 한 명을 보호라도 하듯이.
“설마 진짜 대공비라도 된단 말인가.”
모두가 그곳에 시선을 집중한 순간 중앙에 있던 이가 훌렁 로브를 벗어 던졌다. 순간, 광장 전체에 경악이 퍼져 나갔다.
“황태자 전하?”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왜 저곳에 계신단 말인가.”
소란은 길지 않았다. 데테로아가 손을 들더니 큰 목소리로 연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 데테로아 테사!”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황태자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어도 그 특징이야 평민들 사이에 파다했기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으로 공통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대체 그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얼마 전, 황제는 분명 반란군으로부터 보호하겠다며 황태자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옮겼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중앙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대공비가 나타나리라 알려진 날에.
“오늘 나는, 가장 추악한 이의 민낯을 밝히고 고발하러 이 자리에 섰다.”
데테로아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시민으로 보이던 사람 중 검을 뽑는 이들이 있었다. 황제가 미리 배치해 둔 감시자들이지만 진실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깜짝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감시자들은 단상을 향해 뛰어가며 미리 명령받은 말을 외쳤다.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라! 납치당했던 황태자 전하가 이곳에 계신다!”
납치라니? 데테로아가 납치를 당했다고? 그런데 왜 단상 위에서 당당히 말을 하는 걸까.
혼란 속에서도 데테로아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자는 간악한 술수로 마호세르디의 단제 경을 빼앗았으며, 그의 목숨을 인질 삼아 마호세르디를 핍박해 왔다! 또한, 제 자리를 뺏길까 두려워 아들인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이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많이 암살 시도를 해 왔었다.”
데테로아를 둘러싼 이들과 평민 사이에 숨어 있던 감시자들이 충돌했다. 감시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으나 데테로아를 지키는 이들은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 외에도 황녀들을 제 사리사욕을 위해 팔아치웠으며, 가장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나를 황태자 자리에 앉혀 자신의 자리 보존을 꾀했다. 특히, 감시자들이라는 집단을 만들어 귀족들의 자택에 잠입시켰다! 그간 귀족들이 은밀하게 나누는 이야기는 감시자들을 통해 모두 황제에게 들어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약점이 잡혀 황제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귀족들이 많다!”
모여 있던 귀족들은 파리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증거가 없는 비방에 불과하다 생각하면서도, 거꾸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 신빙성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충성스런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왜 반란을 꾀한단 말인가.
게다가 데테로아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감시자들이라는 집단의 존재도 실존한단 의미가 아닌가!
“황제는! 제 자식조차 죽이려 틈만 나면 암살을 시도했고, 그중 황후의 아들이었던 페트론 황자를 계략으로 죽였다! 그로 인해 황후는 복수를 위해 반란을 택했다!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는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황제의 계략에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을 뿐이다!”
어느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감시자들의 수와 더불어 수도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테로아와 그를 보호하던 이들은 포위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았다.
“나는 황제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 도망쳤으나 제국의 미래를 생각해 오늘 이 자리에 섰다! 제국을 지탱하고 이끌어 갈 자들은 명심하라! 평생을 감시당하며, 황제의 의견에 반대라도 하는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두겁을 쓴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미래를 볼 것인가!”
처절한 저 외침을 믿을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의심이 들불처럼 번졌다.
지켜보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어떤 귀족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다들 믿지 마시오! 황태자 전하께서 분명 납치된 이들에게 협박을 받는 것이 틀림없소!”
하지만 그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데테로아의 얼굴은 누가 봐도 협박을 받는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당당한 태도와 곧은 시선, 그를 보호하려는 듯 방어하는 복면 쓴 자들, 그리고 되레 황태자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수도군까지.
소리친 자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자가 황제의 사람이구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나 그 한마디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다, 다들 설마 저 말을 믿는 거요?”
이 순간에도 황태자를 보호하던 이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정말 황태자가 납치를 당했다면 오히려 안심하고 수도군에게 보호를 요청해야 할 게 아닌가. 오히려 그는 달려드는 인파 속에서 당당히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비록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대들은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진실로 신이 있다면 제국의 미래를 외면하지 마시길!”
수도군을 상대하던 이들이 모두 쓰러진 순간, 마지막 한마디까지 외친 데테로아가 붙잡혔다. 놓으라고 외치는 그를 내리누르고 포박하는 장면이 모든 이들에게 강렬히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