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남부 정리
196화
<데테로아 황태자, 내전의 포문을 열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이 자주 보는 소식지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헤드라인이었다. 기사를 읽어보던 나엘라는 미간을 좁히곤 소식지를 내팽개쳐 버렸다.
“황태자는 어떻게 됐어?”
다른 이들에게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한 번 탈출에 성공한 데테로아를 황제가 가만뒀을 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거하게 황제를 한 방 먹였으니 사지 멀쩡하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황제가 생각이 있다면 황태자 전하께 위해를 가하진 않았을 겁니다.”
방금 의견을 낸 자도 확신은 없는 말투였다. 그조차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건 똑같았다.
“하아…….”
나엘라의 입에서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데테로아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데 무슨 작전을 짜란 말인가.
체드란은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었어으나 나엘라는 걱정이 앞섰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게 지휘관의 필수 능력이라지만 상황이 보통 상황이어야 말이지.
“생사라도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살아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황제는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테니 데테로아한테 온갖 불똥이 튀었을 건 뻔했다.
“톨레로 상단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겁니다.”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이제 막 내전이 시작됐는데 시작부터 제일 중요한 데테로아가 위험해진 셈이니.
“일단은 상황부터 정리하지.”
잠시 어디 좀 다녀온다고 나간 체드란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노헤스카의 세 기사단 중 두 곳이 대기 중인 데다 전쟁에 나섰던 병사들도 복귀해 준비하고 있다. 당장 내전을 일으키기 위해 산재한 몇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내일이라도 출전할 수 있다.
일단 회의를 해야 하지만 체드란 없이 진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번 내전의 최고 공신은 체드란이 돼야 하며 총지휘관도 그가 돼야 했다.
게다가 나엘라가 아무리 전쟁을 겪어 봤다 한들 그건 책사의 영역이었고 별동대 성향으로 기사단을 이끌었을 뿐이니 더더욱 그의 의견이 필수적이었다.
다행히 그는 얼마 기다리지 않아 돌아왔다.
“체드란! 어딜 다녀왔어요?”
앉아 있던 이들의 대부분이 체드란의 사람이다. 그가 돌아오자 분위기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두칸과 만나고 왔다. 들어야 할 얘기가 있어서.”
“협상은 끝났잖아요.”
“우리가 요구할 조건을 추가했지.”
체드란의 말에 따르면 그전에 치렀던 협상은 우리에게 큰 이득이 없었다. 단순히 전쟁을 멈추는 건 지금 상황에 도움될 뿐, 그 후를 생각하면 두칸 측에 물자도 지원해 줘야 할 테니 수지에 안 맞았다.
그래서 추가한 조건은 체드란이 내전을 벌이는 동안 남부 귀족들이 딴생각 못 하도록 유도할 것, 은연중에 노헤스카를 지켜 줄 것.
“그럼 노헤스카의 병력을 많이 뺄 수 있으니 좋긴 한데 믿을 수 있겠어요?”
“두칸도 생각이 있다면 우릴 건드리지 않겠지. 뒤통수를 치면 당장 노헤스카는 점령할 수 있어도 그 외엔 이득이 없잖소. 당장 남부 귀족들이 두고 볼 리도 없고, 군사 경계 지역의 국경군은 남아 있을 테니까.”
노헤스카가 먹히더라도 국경군들이 두칸의 민족들을 몰살해 버린다면 오히려 잃는 것이 훨씬 많았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해 놓았으니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좋네요. 그럼 우리가 떠나도 남부 귀족들은 딴생각을 못 하겠군요.”
더불어 페즈몽레 백작을 조용히 처리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서튼이 아주 희희낙락해서 돌아오고 있으며, 수도에 보내려던 편지도 빼돌렸으니 칭찬해 달라는 말도 함께 돌아왔다.
“마지막을 확실히 보지 못해 아쉽네요.”
감히 뒤통수를 치려 했으니 제가 직접 손을 봐주고 싶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서튼이 목을 가져오고 있다던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그러네.”
하여튼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꼭 그렇게 자랑할 거리를 들고 온다. 분명 오자마자 라엘 기사단 사람들에게 페즈몽레 백작의 목을 들고 잔뜩 자랑할 터다. 확실히 하는 게 좋아 그간 나엘라도 별로 탓하지는 않았는데…….
체드란이 그렇게 몇 가지 사항을 전하자 나엘라도 본격적인 회의에 돌입했다.
이곳에 최종 사령관이 체드란이라면, 자신은 그를 보좌하고 책략을 꾀는 자다. 역할을 분명히 구분했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데테로아 황태자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 병력 지원을 받는 것, 남부 귀족들이 황제 측에 붙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하고 가는 것.”
남부 귀족들 단속이야 두칸의 전사들이 노헤스카에 주둔하게 되면 자연히 어느 정도 해결된다. 물론, 그것만 믿지는 않았다. 본진을 튼튼하게 방비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줄리 부인이 있는 도이네 백작가에 연락을 보내 놨습니다. 부인이 적극적으로 설득해 보겠다고는 했지만 도이네 백작이 뼛속까지 황제 측 인물인지라 쉽지는 않을 거예요.”
애초에 지원까지 바라진 않았다. 다만 그가 황제에게 붙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체드란이 두칸을 끌어들였으니, 도이네 백작은 황제에게 병력을 쉬이 지원하지 못할 겁니다. 황제 측 인사이기에 앞서 본인의 영지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죠. 노헤스카를 적으로 여긴다면 더 좋아요.”
노헤스카와 손을 잡은 두칸도 적으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노헤스카 근처에 있는 도이네 백작령 특성상 코앞에 적을 두고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럼 도이네 백작가는 신경을 꺼도 되겠군. 황제도 상황을 보고 받으면 지원을 요청하진 못하겠지.”
그의 말에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움직이지 못한다면 도이네 백작가는 해결이죠. 그 외에 페즈몽레 백작가는 가주를 잃었습니다. 그 병력은 두칸에 묶어 두려 해요.”
“가주 대행을 노리겠다는 얘기군.”
“네. 표면적으론 노헤스카의 가신 가문이니 두칸과 일시적으로 협력 중이지만, 견제해야 한다며 경계 지역에 묶어 둘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남부 지역에서 노헤스카 다음으로 군사력이 강한 가문 중 두 가문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병력 지원은?”
나엘라가 준비했던 자료 중에서 아가산 백작을 포함한 몇 가문의 자료가 정리된 서류를 넘겼다.
“남부 지역에서 황태자 파였던 가문과 우리와 손을 잡은 아가산 백작가의 병력이에요. 아무래도 남부는 노헤스카가 주력이었던 만큼 이 이상의 병력 지원은 어려워요.”
사실상 남부 병력의 7할이 노헤스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두칸 때문에 이만큼이나 키울 수 있었던 상황이다.
다른 가문들은 노헤스카를 믿은 것 반, 노헤스카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병력을 키울 수 없었던 것 반으로 쭉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자료를 확인한 체드란이 턱을 문지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 눈빛에 나엘라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괜히 마음에 걸리는 시선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네.”
이유를 알 수 없어 나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체드란이 설핏 웃었다.
“마호세르디의 저력을 실감 중이라. 노헤스카엔 참모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어서.”
사실 참모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두칸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것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니 참모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전술 면에서 늙은 여우 같던 제스라 왕국을 상대한 마호세르디와 비교하는 건 어폐가 있었다.
그렇다고 노헤스카의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야만인들을 상대하며 키운 그들의 순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노헤스카가 마호세르디와 함께 손꼽히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체드란의 전쟁광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칭찬이라고 생각할게요. 어쨌든 이 정도 지원으로도 저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남부와 중부를 딱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충 두 지역이 맞닿는 지점까지 진군하면 마호세르디와 만날 수 있어요. 마호세르디에서 우리와 같이 진군을 시작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병력 지원이 웬 말이냐. 아가산 백작이 약속한 대로 물자만 꼬박꼬박 지원받아도 충분히 가능했다.
“문제는 데테로아 황태자의 안전 확인이에요.”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체드란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못 하니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 문제는 넘어가지.”
“네?”
“데테로아도 충분히 각오했을 테지. 그의 생사가 우리 계획을 막아서는 안 돼.”
“하지만 유일한 후계권자에요. 황태자가 없다면…….”
“아니. 유일하진 않지.”
“설마 체드란, 당신이……?”
황좌에 관심이 있었나 싶어 나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체드란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만 생각하면 데테로아가 유일하지만, 여자도 포함한다면?”
나엘라가 입을 벌려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더 크게 놀라고 있었으니까.
“지엘라와 파르로시 또한 황족이다. 더불어 후계권을 포기한 적도 없지.”
“하, 하지만 제국 역사상 여자가 황제가 된 적은 없어요.”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법도 없어. 나는 데테로아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가 무사하다고 믿지만, 만에 하나 무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에 얘기하는 것뿐이야.”
그제야 나엘라는 체드란이 무엇을 각오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데테로아가 각오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어쩌면 체드란과 데테로아는 오래 함께해 온 시간 동안 이런 이야기를 미리 나눴을지도 모른다. 데테로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뭐……. 지엘라 부인이 이 얘기를 들으면 기절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왠지 상상됐다. 지엘라에게 당장 황제를 하라 그러면 놀라 뒤집힐 모습이.
그렇다고 파르로시를 옹립했다간 제국에 또 피바람이 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다나한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볼을 긁적거리던 나엘라는 에라, 모르겠다며 데테로아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기로 했다. 체드란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충 급한 것들은 해결됐고 이제 노헤스카의 입장을 공표하는 것만 남았네요?”
“그건 데테로아가 준 명분을 활용해야지.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황태자의 구출, 그리고 황제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 심판받게 하는 거야.”
황태자 구출이란 명분은 데테로아가 목숨을 걸고 벌어 준 거다. 그리고 황제를 재판장에 끌고 가기 위해선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증거는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수도에서 그 소문을 퍼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과연 중부 귀족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귀족들도 제 행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황제냐 황태자냐.
체드란은 자료들을 내려놓고 회의장에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우리의 명분과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 연합군의 탄생을 공표해야겠군.”
결연한 빛이 회의장을 떠돌았다.
공표가 시작되면 출전도 시작될 것이다. 제국의 중심, 황도를 향해서.
“준비하게. 당장 내일이라도 출전할 수 있도록.”
“예!”
“예!”
우렁찬 대답 소리가 회의장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