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센텐에서는 연일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상황은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온갖 문제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좌중의 누군가가 제일 상석에서 얼굴을 굳히고 있던 헤르만에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그의 노기 가득한 음성이었다.
“폐하께서 센텐에 대한 신뢰를 잃으셨다는 걸 모르는가?”
이 말은 황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센텐을 가만두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산발하는 문제를 해결하라며 종용하고,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돌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광장에서 벌이신 일로 이미 난리가 났는데, 이제는 귀부인들 사이에 지엘라 황녀님과 세레노피 부인, 센텐에 관한 이야기들이 돌고 있답니다.”
이어지는 다른 귀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테너에게로 향했다. 하일모라의 이야기가 퍼지는데 그를 배제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귀부인들은 내전이 시작되었음에도 지엘라의 사랑 이야기에 열광하며 이를 여기저기 퍼다 날랐다. 거기다 믿었던 남편에게 이용당한 하일모라의 이야기는 얼마나 자극적인가.
이와 함께 센텐의 존재 역시 수면 위로 떠올라 온갖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귀부인들이 모여 사랑 이야기를 떠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야기들과 함께 센텐이 언급된다는 점, 귀족 가문들이 귀부인들 사이로 떠도는 소식에 점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문제가 또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계획하시던 일이 새어 나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각 지역의 주요 귀족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황제의 사람들로 채울 거라는 계획이 암묵적으로 돌고 있었다.
“단순히 대귀족을 갈아엎는 거면 그들도 환영했겠지요. 서부, 남부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 눌려 꼼짝도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자리에 황제의 사람들이 앉는다면? 그렇게 황제가 제국 전역을 꽉 쥐게 된다면?
귀족들에겐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황제가 엎드리라면 엎드려야 하고 뛰라면 뛰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중요한 건 반응 아닌가? 열심히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중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인도된 영향이 큽니다. 제국의 황태자조차 개처럼 끌려갔는데 귀족들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하다는 눈치입니다.”
황태자조차 그런 신세이니 힘없는 귀족들은 보나 마나라는 얘기였다.
황제에게 붙어 줄을 대면 그나마 나을 거라는 얘기가 떠돈다지만, 상대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다. 과연 황제는 손을 잡은 거대한 두 가문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북부와 동부 지역의 가문들이 헛생각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야 합니다. 일단 두 지역의 귀족들을 끌어들이고 중부를 하나로 뭉치면, 상대가 제아무리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라 한들 막아 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남부 지역과 서부 지역에도 두 가문에 눌려 살았던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본진을 치는 것도 생각해야 해요.”
센텐의 일원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어차피 내전은 이미 벌어졌다. 피할 방법이 없으니 그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상대가 여론전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나가면 됩니다. 일단은 폐하께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는 것부터 하시죠.”
공동의 목표가 생긴 이상 센텐은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의견이 갈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센텐은 머리를 모아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아이안 공작가가 무너졌으니 북부 귀족들을 하나로 규합하기는 쉽습니다. 북부는 대부분 병력을 지원할 겁니다.”
애초에 북부는 일찌감치 작업이 들어갔던 곳이다. 아이안 공작가를 대신할 가문도 이미 준비가 끝났으니 세력을 하나로 규합해 병력을 지원받을 생각이었다.
“동부는 루부스 후작가만 꾀어낸다면 북부처럼 쉬울 겁니다.”
“그들도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네. 폐하께서 주요 가문을 쳐낸다는 소문 말일세.”
“마냥 믿기는 어려울 겁니다. 혼란스러울 때니 제대로 협조를 얻어야 합니다.”
루부스 가문만 끌어들이면 동부 역시 쉬워진다. 동부의 대표 가문이 움직이는데 다른 귀족들이라고 안 움직일까.
“그럼 중부 귀족들을 묶어 두는 일만 남았군요. 그들이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당장 여론전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고,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황제에게 보고할 것들을 정리했다.
일단은 여론전부터였다.
*
“우리는 더 이상 여론전을 하지 않을 겁니다.”
나엘라의 말에 누군가 손을 들었다.
“황제 측에서 여론전을 시작할 텐데요? 황도가 황제 쪽으로 기울 겁니다.”
“상관없네. 우리는 귀족들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확실히 심었지. 이 이상 여론전은 의미가 없어. 오히려 잠깐은 황제 측으로 쏠리도록 두는 게 좋지.”
그러나 나엘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체드란도 대략적인 방향만 눈치챘을 뿐,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닌 듯해 보였기에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극적인 효과를 주자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얻었어요. 그런데도 재고 따지는 중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잠시 황제에게 기세가 기울게 두었다가 우리가 쾅 터트리는 편이 더 효과적입니다.”
체드란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멀뚱멀뚱 바라만 봤다. 나엘라의 얘기가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귀족들이 제대로 입장을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느 쪽이 승리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살고 싶은 건 똑같은데 내전이 끝나고 괜히 물갈이되면 안 되니까. 그러니 황제 쪽으로 여론이 쏠렸을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 주면 됩니다. 단 한 번의 확실한 승리로.”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출전한 뒤로 남부에서는 별다른 일 없이 진군한다고 해도, 남부와 중부의 경계로 가면 황제 측의 가문이 막아설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수도군이 올 테고.
그들을 상대로 단 한 번만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여론이고 뭐고 중부 귀족들은 불안에 떨게 될 것이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무력 앞에서, 황도가 쓸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결국엔 그들은 살길을 찾으려 할 것이고 자연히 승산이 있는 곳에 붙을 것이다.
“우리는 전투를 최소한으로 하며 황도까지 진격할 겁니다. 무혈입성은 불가능하니 전투의 수를 줄이려면 첫 결전이 가장 중요하죠.”
회의장에 있는 이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구석에 있던 사피오가 살며시 일어났다. 그러고는 벽면에 커다란 지도를 붙였다.
지도에는 황제의 편에 설 가능성이 큰 가문들이 세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노헤스카 병력이 향할 길목에 위치한 가문들에는 그 특징과 성향까지 적혀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북부와 동부 귀족들이 황제 측으로 참전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관없습니다.”
나엘라는 대공비가 아닌 참모로서 참석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모든 이들에게 존대하는 말투로 바꾸었다.
“북부 가문들의 참전은 막을 수 없겠죠. 북부까진 감수해야 할 겁니다.”
며칠 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던 클루아조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안 공작가의 주축이 되어야 하는 클루아조는 황제의 살벌한 감시 때문에 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부득이하게도 북부 귀족들의 참전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전해 왔다. 그 얘기를 들은 나엘라는 북부를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동부는 상황이 다릅니다. 루부스 후작가가 동부 귀족들을 상대로 영지전을 시작할 겁니다.”
루부스 후작을 대신할 황제의 패가 누군지는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루부스 후작은 그 정보를 토대로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영지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동부 대표 가문이 영지전을 벌이면 자연히 다른 가문들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동부 전체가 그 영지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그들도 소문은 들었을 테고, 루부스 후작이 괜히 영지전을 벌이는 게 아니리라 짐작할 겁니다. 또한 루부스 가문의 칼이 언제 다른 귀족들에게 겨눠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놓을 거고요.”
그렇게 되면 동부는 확실히 발이 묶이는 셈이다.
“그럼 중부 귀족들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앞으로의 상황이 달라지겠네요.”
누군가 한 말에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세력은 이제 북부와 중부가 남는다. 황실 친위대, 수도군까지 합하면 내전의 승패를 가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중부 귀족들을 흔들 수 있도록 첫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북부가 제대로 지원을 시작하기 전에 중부를 흔들고 최대한 빨리 진격해야 한다. 그 후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연합군은 황실 친위대와 수도군을 상대할 것이다.
“자, 출전 전 마지막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나엘라의 발언이 끝나자 계속 질문을 던졌던 이가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고요한 분위기에 손뼉을 치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괜히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멋쩍어진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을 내놓았다.
“뭔가 대공비 전하께서 대단하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나엘라는 피식 웃었다. 두칸과 전쟁했던 이들에게는 그녀의 방식이 새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전에 참모는 필수다. 머리싸움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노헤스카의 저력을 볼 차례죠. 설마 두칸의 전사들과 다퉈 온 노헤스카가 중부 귀족들을 상대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회의장에는 단번에 호승심이 고취되었다. 도발에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강렬한 눈빛을 내보이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이유를 아니 나엘라도 그저 웃었다. 자신도 그저 출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기나 올리자고 한 말이었다.
“이제 출정식을 하러 가죠.”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출정식은 거창하지 않았다. 같은 제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내전이니 성대한 출정식은 무리였다.
그들의 출정은 조용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
행군을 시작한 병력을 바라보던 나엘라가 선두에 있는 체드란에게로 향했다.
그는 나엘라가 전투에 참가하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참가해도 상관없으나 웬만하면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말로 돌려 얘기했을 뿐.
“체드란, 내가 말했던 거 생각해 봤어요?”
계속 나엘라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힌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데테로아, 그가 문제였다.
체드란이 그를 아낀다는 걸 잘 아는 만큼 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름 그의 생사를 확인하고 구출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이를 전해 들은 체드란은 되레 탐탁지 않아 했다.
“그나마 확실한 방법이에요. 말리에게 연락이 왔는데 코더와 톨레로 상단의 수뇌부들은 몸을 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데테로아 황태자는…….”
“그렇다고 테너 세레노피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그대가 모욕을 당하지 않았나.”
체드란의 눈은 강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