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9)화 (199/220)

Chapter 26. 진격, 황도로

198화

“테너 세레노피 백작은 하일모라 때문에 센텐에서 입지가 불안해졌을 거예요. 그의 성격상 이해관계만 일치한다면 거래할 가능성이 커요.”

나엘라가 열심히 설득해 봤지만, 체드란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테너에 관해 설명하다가 체드란이 묻는 족족 자세히 설명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식당에서 만났던 테너가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까진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교묘한 그의 화술에 넘어가 답한 결과였다.

“나엘라.”

“네, 말해요.”

“그대는 데테로아를 구하는 것과 그대가 받은 모욕을 저울질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겠지. 하지만 내게는 꽤 중요한 문제야.”

어떻게 그게 데테로아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나엘라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체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가 소중한 사람들을 이 악물고 지키듯이 나 또한 그렇다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대를 건드린 사람과 거래를 한다고?”

“그게 뭐 어때서요.”

“나는 적과 협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적이라면 그 누구든 가차 없이 베어 버리는 사람이지.”

체드란의 뜻은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과 이해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줘요.”

“그대야말로 제대로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노헤스카의 총결정권자는 누구지?”

나엘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좋은 작전을 구상하고 책략을 생각해 내도 결국 결정은 체드란이 해야 한다.

“그대에게 내 권한을 침범하지 말라 얘기하는 게 아니네. 나는 그대의 얘기라면 언제나 귀담아듣고 따를 테니까. 하지만 내 선을 넘어가는 범주는 안 돼. 테너 세레노피 백작은 적이야. 그것도 내 아내를 모욕한 적.”

거래를 청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테너를 도와야 한다. 내전이 끝난 뒤 테너가 살길을 터 주어야 할 테고, 체드란은 그걸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혹시 데테로아 황태자를 반쯤 포기한 건가요?”

나엘라는 그에게 데테로아의 생사에 관해 이미 포기하였는지 물었다. 그래서 동조하지 않는 것인지 말이다.

“아니. 그건 아닐세. 다만 그대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군.”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 사람들을 믿지.”

체드란의 미소에 나엘라는 의아해졌다. 정말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코더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리도 없고, 데테로아가 황궁에 믿을 사람 하나 두지 않았을 리도 없네.”

무언가를 말하려던 나엘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지금 코더가 몸을 숨겼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데테로아를 위해 수도에 남아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데테로아가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거기다 황궁에서 지내는 내내 데테로아 역시 믿을 사람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데테로아를 위해 움직일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들을 모르지만, 체드란은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기에 그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체드란은 제게 없는 걸 갖고 있네요.”

체드란이 웃음을 흘렸다.

“그대도 내게 없는 걸 갖고 있지.”

“어떤 거요?”

“미모라든가.”

나엘라에게서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모라면 체드란도 갖고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럼 나도 믿으면 되는 거죠? 체드란의 사람들을.”

“나를 믿으면 되지. 나는 그대를 믿고.”

“그게 뭐예요. 결국 저를 믿는 거잖아요?”

“그럼 그대도 나와 같은 것을 믿는군.”

진짜 못 산다. 나엘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체드란의 말장난을 흘려넘겼다.

그래도 덕분에 뻣뻣하던 걱정이 좀 누그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이제야 느껴졌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테너 그 인간은 하일모라를 농락한 인간인데 내가 거래를 하려 했다니.”

아직 마음껏 때려 주지도 못했는데 거래라도 했다면 또 지고 들어갔을 게 아닌가. 땅에 묻어도 시원찮을 놈한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뻔했다.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네요.”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상황에서 급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체드란은 어떻게 그렇게 침착해요?”

그러고 보니 체드란은 흥분해서 실수하거나 침착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게 또 마냥 신기했다.

“믿을 만한 참모와 매혹적인 부인이 있으니까.”

자신이 더 말해 무엇하랴.

나엘라는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어 버렸다. 그런 그녀를 보던 체드란도 따라 웃었다.

내전을 위해 황도로 쳐들어가는 상황이라곤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

다나한이 건네준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검을 한차례 휘둘러 검날에 묻어 있던 피들을 털어 내었다.

“공작님이 배신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지 않았나요?”

다나한도 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그랬지. 나엘라는 중요한 걸 잘 안 잊으니까 아마 이건…….”

“그냥 흘려 넘겼다는 거겠죠?”

그들의 앞에는 마호세르디를 뒤통수치려 했던 가문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가주는 죽은 지 오래요, 그 잔당들을 처리하려다 보니 저택을 좀 과하게 들쑤시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다.

하나, 이건 마호세르디가 마음 놓고 황도로 진격하기 전에 필히 처리해야 하는 작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 사정이 나은 건 마호세르디와 직접 부딪칠 일이 많았던 서부 귀족들이 감히 황제에게 붙을 생각을 못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본보기도 보일 겸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마호세르디 공작의 분노가 이 정도라며 압박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말이다.

“너무 과했을까요?”

“마호세르디 덕분에 두 발 뻗고 잔 서부 귀족들에게 한 번 보여 줄 때도 됐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봐줬는지. 뭐, 그간 마호세르디가 주변 영지에 함부로 굴었던 적도 없으니 괜찮을 걸세.”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얘기였다. 마호세르디는 은원 관계를 절대 잊지 않는다는 공표이기도 했고.

“그럼…… 이 편지의 답장은 어떡하죠?”

“나도 그걸 알 수 없어서 가져왔네만.”

그들이 쥔 건 나엘라에게 온 편지였다.

편지에는 첫 전투의 중요함을 서두로, 그로 인해 중부 귀족들이 어떻게 흔들릴지 확실한 우위임을 티 낼 방법들이 적혀 있었다. 모든 조건은 첫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부터라고 강조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미 첫 전투를 해 버렸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기고 지고 할 게 없을 정도로 전부 쓸어 버린 셈이지만 말이다.

애초에 황제는 마호세르디를 가장 신중하게 작업할 생각이었는지 대체할 가문을 찍어만 놓고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군사력도 별 볼 일 없는 곳에 마호세르디 최정예 기사단이 들이닥쳤으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일방적인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엘라가 원하는 대로 압도적이긴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다나한이 그렇게 말하자 에스토도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괜찮겠죠?”

공작이 이미 말을 했다니까 괜찮을 것이다. 설마 이를 두고 뭐라 하겠나. 명령을 내린 본인이 기억하고 있었어야지.

“흠흠, 그럼 우린 서부 귀족들에게 증거나 뿌리자고.”

다나한이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부관에게 넘겨 버렸다.

일단 멀쩡하던 가문 하나를 박살 냈으니 불안에 떨고 있을 다른 서부 귀족에게 사정이 있었음을 알리는 게 먼저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혹여나 생길지 모르는 마호세르디에 대한 반발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

“나엘라한테 뭐라 답하지.”

그런데도 나엘라의 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다나한은 자꾸만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내전은 시간 싸움이다. 얼마나 빨리 내전을 끝내는가에 따라 승자가 떠안을 부담이 적어진다.

특히나 연합군이 이긴다면 데테로아가 제국을 안정시키고 귀족들을 이끌어야 하니 피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노헤스카는 출전 이후 쉬지 않고 남부를 벗어났다.

노헤스카의 군대가 중앙 귀족들의 영지에 다다르기 전 초읽기에 들어가자 나엘라도 바빠졌다.

지금부터는 온정신을 집중해 상황을 살펴야 했다. 작은 소문 하나에도 군사들의 사기는 달라질 수 있고, 무심코 넘긴 흔적 하나가 전세를 뒤바꾸기도 한다. 그러니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확인해야 했다.

“황제가 두 가문이 손을 잡은 이유를, 대공 전하가 황좌를 원해서라는 것으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데테로아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의 친분을 들먹이며 애초에 황태자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고, 대공 전하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는 식으로요.”

가린의 보고에 나엘라는 자료를 넘기면서도 질문을 계속 이어 갔다.

“그래 봤자 귀족들에겐 나쁠 것이 없는데? 황제가 계속 자리를 유지하면 제 목숨이 위험할 테니까.”

“대공 전하께서 중앙 귀족들에게 반감이 있다는 말로 여론전 중입니다. 전쟁광이라는 인상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으니 먹히는 모양입니다.”

전쟁광이라는 말은 자연스레 폭군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한다. 더군다나 그가 황궁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으니, 황좌를 차지하게 되면 그때 돕지 않았던 귀족들을 죄다 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할 것이고.

그래서 증거 하나 없는 소문에도 귀족들은 괜히 제 발 저리고 있었다. 체드란과 좋은 관계를 맺은 귀족이 없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이다.

“그러게 잘들 좀 하지.”

나엘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다 저들의 업보다. 황제가 누굴 쫓아내든 방관해 온 여파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살짝 불안한데. 첫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기면 귀족들이 더 불안해할지도 모르겠는걸.”

폭군이란 인상이 씌워졌으니 첫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길 경우 귀족들이 한데 뭉칠 가능성도 있었다. 센텐이 머리를 쓴 것인지, 아니면 황제가 이것까지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확실히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건 다나한 경에게 온 편지입니다.”

나엘라가 자료들을 내려놓고 편지를 전해 들었다. 안 그래도 마호세르디와 서부 귀족들의 상황이 걱정이었는데 마침 딱 맞게 도착했다.

편지를 거침없이 찢은 나엘라가 내용을 살펴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폭군 이미지는 마호세르디가 가져가야겠는데?”

거기다 자신이 놓친 것도 있었다.

그래, 아버지가 엄청나게 분노하며 배신자를 가만 안 두겠다고 했었지. 지엘라를 데리러 온 자들도 몰살시켜 버렸고. 어떻게 이걸 깜박 잊고 있었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서부 귀족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어 꼼짝도 않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구구절절 어쩔 수 없다는 얘기를 해 놨어?”

황제의 여론전을 듣기 전이었다면 계획이 어긋난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계획을 수정하실 겁니까?”

“그건 아니야. 어차피 첫 전투는 중요해.”

귀족들에게도 의미가 있겠지만 황제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제 머리가 아팠던 것만큼 이제는 황제가 고스란히 그 스트레스를 돌려받을 차례였다.

“루부스 후작가에서 연락 왔어?”

가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엘라가 씨익 웃었다.

동부 때문에 열 좀 받아 보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