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황제가 팔을 휘두르자 책상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 앞에 있는 이들은 살벌한 분위기에 이를 꽉 물어야 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갈라진 황제의 목소리가 분노로 더 쩍쩍 찢어졌다. 몇 갈래로 갈라진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루부스 후작가에서 영지전을 벌인다?”
“예. 동부 귀족들이 연이어 지원이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하필 이런 내용을 보고하게 된 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부스 후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동부 귀족들은 좋다고 연락했을 것이다. 황제 측에도 연합군 측에도 서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으니.
감시자들이 매일같이 보내오는 정보에 따르면 후작이 따로 동부 귀족들과 회동까지 가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동부 귀족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루부스 후작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 왜 갑자기 영지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황제 폐하께 달려갔을 것이다.’
온갖 변명들이 뒤섞여 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선 동부가 부럽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니, 실상 루부스 후작이 총대를 메고 동부 귀족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저희도 열심히 얘기했지만, 동부 귀족들이 듣지를 않아서……!”
쾅! 황제가 얼마나 주먹을 세게 내리쳤는지 책상이 웅웅 울렸다. 놀란 이들은 움츠린 채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센텐의 입장은?”
숨죽이고 있던 헤르만이 얼른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섰다. 행동은 기민했으나 속으로는 피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요즘만큼 자신의 처지가 싫은 적이 없었다.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이만큼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고.
“센텐에서는 동부 귀족들을 압박하는 게 제일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루부스 후작에게도요.”
“그렇게 해서 언제 병력을 지원받고, 언제 내전을 치를 생각인가? 노헤스카가 코앞까지 왔는데?”
귀족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면 해결되기야 할 터다. 하나 한시가 급한 전시 상황에서 어느 세월에 지원을 기다린단 말인가.
동부 귀족들의 병력을 모은다 한들 반군들에게 황궁이 점령당하기 전엔 올 수나 있겠느냐 말이다.
황제가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곤 이를 가는 심정으로 물었다.
“북부는?”
“가문마다 기사단 한 개 이상 지원, 병사 차출, 기병대가 있는 곳은 무조건 참전하도록 했습니다. 1차로 모인 병력이 황도로 출발했고요.”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도 노헤스카보다 느리다는 점이었다.
노헤스카군은 내전 준비를 끝내도 한참 전에 끝냈다. 출정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데테로아가 폭탄을 터트리자마자 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과 이제야 연락을 받고 병력을 출발시킨 북부의 시간이 맞아떨어질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중부에서 시간을 끌어야겠군.”
아무리 노헤스카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일지언정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기라도 해야 한다. 북부의 병력이 도착할 시간과 중앙 귀족들을 완전히 장악해 병력을 차출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친위대와 수도군이 막강하다지만, 친위대는 사실 정예 부대의 성격을 띠는 터라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공백을 수도군이 채운다고 해도 상대는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다. 방심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임해야 할 것이다.
“데테로아는?”
황제의 물음에 친위대 정복을 입고 있는 이가 나섰다.
“비밀 감옥에 가둬 놓은 상태입니다. 도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습니다.”
이들은 데테로아의 양쪽 다리를 부러트려 놓았다. 깔끔하게 부러트렸을뿐더러 이후 조치도 잘해 놓아서 제대로 아물기만 한다면 크게 후유증이 남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몇 달은 요양해야 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마음처럼 될까. 감옥이 어디 부상자가 요양할 수 있을 만한 곳인가.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된다.”
“예.”
황제에게 대답하고 있는 친위대 기사는 단제와 그의 부관을 제외하면, 그나마 가장 오래 있던 기사였다.
두 사람이 사라진 지금, 친위대의 임시 단장을 맡게 된 그는 기사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차마 황제에게 곧이곧대로 말하지 못했다.
데테로아는 엄연히 황태자이거늘, 황가를 지키는 친위대가 제 손으로 그를 감옥에 가두고 도주하지 못하도록 양쪽 다리까지 부러트린 상황이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거기다 다리를 부러트린 이후 후속 조치를 취한 것 역시 황제에겐 보고하지 못했다.
그의 명은 목숨만 붙여 놓으란 것이었다. 그 얘기는 곧 도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반은 죽여 놓으란 얘기였으니까.
황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쳐 온 친위대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럴 때 단제라도 있었더라면.
평생을 헌신했던 단제도 토사구팽처럼 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던 이가 누가 있는가.
그게 가장 컸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직접 보았다. 단제의 처지가 그리 허망하게 바스러졌는데 고작 친위 기사일 뿐인 자신들은 어떻겠는가.
하물며 그를 잡으러 직접 나섰던 것도 친위대였으니, 그들로선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군을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황제에게 친위대란 무엇일까. 이런 생각조차 불충이란 걸 알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푸르텐가에선 준비를 끝냈나?”
황제의 물음에 다른 이가 나섰다. 가주가 직접 온 것이다.
“예. 폐하. 다시 한번 믿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나이다.”
마리즈 푸르텐이 단제를 따라간 뒤 푸르텐가도 발칵 뒤집혔다. 황제의 분노를 직격탄으로 맞은 곳 중 하나였다.
“강압적인 수단으로 중앙 귀족들을 묶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그 강압적인 수단이 무엇인지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최후의 수단으로 중앙 귀족들을 한 번에 묶을 방법이 있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감시자를 동원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명만 내려주시옵소서.”
까드득, 황제가 이를 갈며 분노를 태웠다.
*
“황제는 그릇이 작아. 그걸 잊으면 안 돼.”
나엘라는 임시 회의 막사로 가면서도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 서서 걷던 서튼이 히죽거리면서 이유를 되물었다.
“사람의 그릇은 흔들리는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법이야. 황제는 지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어. 그럼 작은 크기의 그릇이 점점 드러날 거야.”
“단장님의 말은 당최 모르겠는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성을 잃으면 최악의 수를 쓸 거란 말이야. 그게 뭔지 예상해야 하는 거고.”
“그릇이 작은 사람이 쓸 만한 최악의 수…… 말이죠?”
페즈몽레 백작의 머리를 들고 와 실컷 자랑하다가 나엘라에게 칭찬까지 들은 서튼의 기분은 계속 고공행진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자는 심정으로 한 칭찬이었는데 서튼의 어깨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사실 그건 황제가 이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 금방 나오지.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 대충 가닥이 잡혀.”
서튼은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면서 넘쳐 흐르는 자신감으로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주위 사람들이 한심하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막사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모여 있던 이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엘라도 인사를 전하고는 체드란 옆에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인원이 전부 모인 걸 확인하고서야 회의는 시작됐다. 오늘은 회의 전에 론체와 사피오, 나엘라, 체드란, 이렇게 넷이서 간략한 회의를 먼저 했기에 론체는 이 내용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론체는 현재 위치와 근처 영지들이 표시된 지도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현재 인접한 영지에서 상대의 병력이 모이고 있는 곳은 세르몬데 남작령입니다. 여기서는 반나절 거리이고, 그가 연합군을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역할이라 보고 있습니다.”
세르몬데 남작령을 지나야 마호세르디와 접선하기로 했던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 앞은 본격적인 중부였고.
여러 지리적인 요건으로 전선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어떻게 보면 세르몬데 남작령이 중부의 초입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가 철저하게 황제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남작령 뒤로는 황도까지 뻥 뚫린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황제가 수도군이나 중앙 귀족들의 병력으로 중간을 막을 가능성도 있지만, 세르몬데 남작령이 아니면 지리적인 이점은 연합군이나 황제군 둘 다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세르몬데 남작령 이후부터는 서로 지리적 요건과 관계없는 싸움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곳에서 첫 번째 전투를 치를 겁니다. 물론, 승리하겠지요. 중요한 건 압도적인 승전보를 울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르몬데의 이점은 양옆 영지가 전부 황제파의 영지라 언제든 추가 지원이 올 수 있다는 것과, 남쪽에는 큰 강이 있어 노헤스카를 상대하기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너야지만 세르몬데를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다리가 끊기면 활로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르몬데를 치면서 양옆의 영지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도 있고요.”
전투 중 대열의 옆구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추가 지원을 온 영지들이 대열 허리 부분을 뚫고 들어오면 노헤스카 군이 두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고, 선두에서 세르몬데를 상대하고 있던 이들은 포위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추가 지원을 걱정해 양옆을 방비하는 건 쓸모없는 전력 낭비였다. 대열 앞부분의 전투력이 급감하며, 그걸 노리고 상대가 앞 전력을 눌러 버리면 후퇴를 해도 사기가 꺾일 거란 문제점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중 한 명이 질문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기적절한 질문에 론체가 준비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저희는 추가 지원이 무조건 올 거라고 예상 중입니다. 상대는 양쪽에서 노헤스카의 허리를 끊으려고 할 겁니다.”
상대도 세르몬데 홀로 노헤스카를 상대할 경우 금방 판가름 날 거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양옆의 영지는 무조건 참전할 것이다.
다리를 건너 진군해야 하니 노헤스카는 한꺼번에 덤빌 수가 없다.
만일 상대할 수 있는 수만큼 넘어왔을 때 다리 앞을 막는다면? 미처 넘어오지 못한 이들이 뚫으려 드는 사이에 앞서 건넜던 이들을 차례로 상대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세르몬데는 물량전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리를 건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그렇지 못하죠. 세르몬데가 전투하는 동안 다른 영지들이 다리만 막아 줘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나엘라는 여러 번 고민한 끝에 조금 무식할지 모르지만, 가장 노헤스카다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
누구보다 노헤스카의 전투력을 잘 보여 줄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