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1)화 (201/220)

200화

세르몬데 남작은 꽤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 예로, 테이블 앞에 마주한 이웃 영지의 두 귀족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폭이 그리 넓지 않으니 넘어오는 족족 쳐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암요. 그렇고 말고요. 일단 우리 두 영지의 기사들은 숨어 있어야겠죠. 방심했을 때를 노려야 한다 이 말입니다.”

“하하. 제아무리 노헤스카 기사단이라지만 쪽수에서 밀리면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앞의 기사들이 당하고 있어도 다리를 건너오지 못한 이들은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겁니다.”

회의를 하자고 모였더니 저들끼리 술판을 벌이고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래도 세르몬데는 침묵을 유지하며 지도를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허, 세르몬데 남작도 그만 긴장하시고 한 잔 받으시지요.”

주위에서 술을 가득 따라 주며 권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노헤스카군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술은 먹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흥이 오른 이들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오히려 남작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힘을 빼라고 말했다.

“노헤스카는 이쪽으로 건너와야 하니 다리를 부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강을 막을 방법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노헤스카 놈들이 어느 정도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중간을 싹둑 자르면 됩니다.”

“맞습니다. 남작 덕에 좋은 작전이 생겼으니 아랫놈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이 작전을 생각해 낸 것도 세르몬데 남작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남작령의 지리적 이점이야 상대도 알고 있는 것인데 과연 이 작전을 눈치채지 못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든 떠올릴 수 있는 작전인데 말이다.

그럼 적은 어떻게 나올까. 문제는 그걸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다리를 건너야 하고 이들의 말처럼 강을 막을 방법도 없다. 이 정도 행군 속도면 속전속결로 내전을 끝내겠다는 것이니 적당히 치고 빠질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히 뭔가를 놓치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그때 병사 하나가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노헤스카군이 나타났습니다! 다리 가까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남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갔다. 그러고선 다른 이가 건네준 망원경을 들고는 저 멀리 전투가 벌어질 곳을 확인했다.

병사의 말대로 다리 건너편에 노헤스카군이 모습을 보였다.

“거참, 마음을 놓으시라는 데도.”

남작이 뛰어나가자 뒤따라온 영주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대장부가 그리 조급해서 되겠습니까. 어차, 나도 봐야겠구나. 망원경을 가져오너라.”

두 영주에게도 망원경이 건네지자, 세 사람은 다 같이 전장을 확인했다.

다리 건너편에 보이기 시작한 노헤스카군이 곧 지척까지 다다랐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다리를 건너 버릴 것처럼.

“어?”

영주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원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정찰병이라도 보낼 줄 알았던 상대는 그대로 진영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선두에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이들은 노헤스카의 주력 기사단, 론체 반트모어가 단장으로 있는 붉은 월계수 기사단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래 봤자 기사단 하나 넘어온 거 아닙니까. 저들만 고립시키면 되지요. 저 보세요! 전투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넘어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세르몬데 남작의 군사들도 진격을 시작했다. 일단 남작의 군사들이 일차로 그들을 막으면 다리를 넘어오는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른 영지의 병력이 나타나 더는 노헤스카군이 못 넘어오도록 막기로 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것도 금방일 터였다.

그렇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망원경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작의 군사 중 1열 전원이 방패를 올리고 방진을 형성하자마자 노헤스카 기사단과 맞붙었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던 그들은 상대를 보고 오히려 속도를 높여 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두 진영이 부딪히며 전선이 형성되어야 하거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방패병들이 우르르 쓰러지며 기사단에 쓸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로 밀고 들어온 기사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앞으로 내달렸다. 뒤를 따라오는 제 군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게 무슨!”

“왜 막지 못하는 겁니까? 분명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남작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제야 거슬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작의 병력을 그대로 돌파해 버린 붉은 월계수 기사단은 대열의 정중앙까지 와서야 속도를 줄이고 사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뒤늦게 우왕좌왕 나타난 두 영지의 군사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뒤이어 다리를 넘어오는 노헤스카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대열을 망가트리고 적진 한가운데서 살육을 시작한 적들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군사들.

뒤이어 넘어온 적들은 남작의 군사와 두 영지의 군사들을 가뿐하게 상대하며 밀고 들어왔다.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망원경을 내린 남작이 침통한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건 두 가지입니다.”

영주들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작전도 상대조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법.

남작은 패배를 예감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전장을 바라보던 나엘라는 서튼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라엘 기사단이 모두 대기하고 있었다.

“저들은 전쟁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선을 넘나들었다. 설마 어린아이 같은 적들을 두고 임무 하나 완수 못 하는 머저리들은 없겠지?”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첫 전투라는 것도 이점 중 하나였다. 저들은 실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니 전투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않았을 터. 지금이 가장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는 때였다.

“황제가 왜 그렇게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없애고 싶어 했는지 저들도 뼈저리게 느껴 봐야지.”

가장 든든했던 방패 속에 숨어 풍요를 누린 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것들을 겪어 왔는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제국이 가장 강했던 몇백 년 동안 그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내 전쟁을 계속해 왔던 이들과 평화에 길들여진 이들의 차이를. 그래서 나엘라는 이번 전투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세 영지가 힘을 합쳐 봤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노헤스카군의 허리를 끊는다? 그건 먼저 지나간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 때나 하는 말이다. 그리고 뒤이어 밀려들어 오는 이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고.

수준이 되어야 물량 공세도 하는 법.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질 것들이 할 말은 아니다.

“영주들을 잡아 와. 세르몬데 남작은 필수로.”

라엘 기사단들이 저마다 흥분을 올리며 시동을 걸었다. 노헤스카군은 벌써 반 이상 다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특수 임무를 할 별동대를 위해 자리를 벌려 주고 있었고.

“영주들이 어디 있을지 설명해 줘야 하나?”

나엘라가 조금 지루하다는 듯이 묻자 서튼은 가슴을 쾅쾅 치며 웃었다.

“창피하게 왜 이러십니까. 언제나처럼 적 수뇌부를 쳐서 상대가 지리멸렬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주위 이들이 그런 수준 높은 단어도 쓸 줄 아냐며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환호를 보냈다. 서튼의 말대로 그들이 언제나 하던 임무 중 하나니 쉬울 것이다. 적장의 목을 쳐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 라엘 기사단의 이번 임무 역시 그랬다.

“그럼 얼른 가서 잡아 와.”

나엘라는 빨리 끝내고 싶다는 듯 턱짓을 했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굴던 이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살려서 데려올까요?”

“남작은 살려.”

나머지 두 영주는 죽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나엘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엘 기사단은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런 인사가 아까울 정도로 손쉬운 일이라 생각하니까.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던 나엘라는 그들의 생각이 오만한 게 아니라고 느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그녀 역시 제국 귀족들과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저들의 실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적어도 엇비슷하리라 예상했다.

하나 이들은 나엘라의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어린아이를 상대해도 이들보단 어렵지 않을까. 어떻게 방패병들이 말에 걷어차였다고 우르르 흩어질 수 있느냔 말이다. 그래, 말의 무게로 넘어질 순 있다. 그런데 군세를 유지하지도 못할 줄이야.

심지어 방패를 땅에 박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들고만 있으면 방패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단 말인가.

고개를 내저은 나엘라는 라엘 기사단이 전장을 우회하며 훨씬 안쪽으로 달려가는 걸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진 한가운데에 있을 붉은 월계수 기사단을 바라보니 이건 뭐,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중앙에는 커다란 공터도 생겼다. 기사단 하나에도 적군의 대열이 뒤로 밀리며 중앙에는 시체가 쌓여 갔다.

“망원경 필요하십니까?”

옆에 있던 이가 슬쩍 건네자 자연스레 받아 든 나엘라는 동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살살 움직이며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댔다.

라엘 기사단이 건너갔으니 나머지 노헤스카군도 다리를 건널 차례였다. 전황이야 눈에 훤히 보이지만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맨 앞쪽에 계실 겁니다. 대공 전하께서 계신 곳은 유난히 눈에 띄니 찾기 쉬우실 겁니다.”

기사의 말대로 눈에 확 띄게 적들이 물러난 곳이 있었다. 붉은 월계수 기사단은 동그란 형태를 유지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데, 유난히 한 곳만 적진에 깊게 파고 들어가 뾰족해 보였다.

바로 체드란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고 병사고 우르르 쓰러졌다. 심지어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소문의 전쟁광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셈이니 저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첫 전투가 끝나면 바로 마호세르디로 합류할 테니 병사들에게 그리 일러두게.”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주들을 잡아 오면 끝이었다. 세르몬데를 지나 그들이 뒤를 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대열에서 이탈한 아가산 백작의 기사단과 노헤스카의 일부 기사단이 각 영지의 저택을 초토화하러 갔을 테니까.

뭐든 마무리는 확실하게. 나엘라가 강조한 것들이었다.

“확실히…….”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기사가 힐끗 바라보았다.

“검을 휘두를 때 가장 멋있다고 하더니 진짜네.”

무슨 의미인지 체드란과 함께 전쟁을 겪었던 이라면 모두 알았다. 적을 상대할 때 체드란은 그야말로 사람의 넋을 잃게 하니까.

큰 체구에서 나오는 미친 힘,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는 속도, 잠깐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이미 쓰러져 있는 동료들. 그 모습을 보면 적들은 모두 벌벌 떨기 바빴다.

“멋있네, 내 남편.”

나엘라는 흡족하게 웃으며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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