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세르몬데 남작이 갑옷을 정비하며 무장하기 시작하자 두 영주가 사색이 되어 매달렸다.
“대, 대체 뭘 하는 거요? 설마 지금 싸우려고 하는 겁니까?”
“그럼 도망이라도 치려 하십니까? 당연히 나가서 싸워야지요. 두 분도 이럴 때를 대비해 검을 배우셨잖습니까.”
“미친 거요? 저들을 보시오! 그야말로 살인귀입니다.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요!”
두 영주가 애걸복걸하며 도망가야 한다고 매달렸지만, 남작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영주들이 결국 자기들끼리라도 도망가겠다며 내뺄 기세를 보이자 남작은 한숨을 뱉었다.
“황제 폐하께서 도망친 자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검은 어렸을 때 잠깐 배운 게 답니다. 이대로는 세 합도 못 버티고 모두 죽어요!”
한탄스럽게도 이게 제국 귀족들의 현실이었다. 과연 그들 중에 검을 들고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소싯적에 검술에 꽤 재능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남작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적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평생을 전쟁터를 누벼 온 이들과 그들이 주는 안락한 평화에 취해 있던 이들이 상대될 리가.
큰 이변이 없다면 이번 내전은 저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작은 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라도 끌어 주어야 했으니까.
꿈쩍 않는 남작을 포기하고 두 영주가 도망치려 할 때 기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당장 도망치십시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들었거늘 이제는 기사조차 도망치라 말하다니.
“적들이 곧 당도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적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저 앞에서 아직 싸우고 있었다.
“기습입니다! 아니, 별동대입니다! 전장을 우회하여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남작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기사의 말대로 전장을 크게 돌아 이곳으로 달려오는 자들이 있었다.
“당장 전투를 준비하라!”
크게 소리친 남작이 말에 올라타자 두 영주 역시 기겁하며 말에 오르더니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남작은 황급히 도망치는 그들에게 관심을 끊고 검을 꽉 쥐었다.
이미 죽음도 각오했다. 하나, 과연 이 각오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남작은 이를 악물고는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
첫 전투가 끝나 가고 있었다.
노헤스카군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상대조차 되지 않는 적들은 검을 집어 던지고 전장을 이탈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기사들이 전멸하자 남은 병사들의 도주는 예견됐다는 듯 순식간이었다.
“체드란.”
나엘라는 전장 한가운데서 검을 들고 서 있는 체드란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나엘라가 말에서 내려 그를 부르자 체드란이 뒤돌아보았다.
그의 얼굴과 갑옷에는 피가 잔뜩 묻어 아직도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이 정도 수준의 적들을 상대로 다치면 그거야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
누군가가 죽고 다치는 것이 당연한 전쟁터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는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다행이에요. 그래도 걱정은 되니까요.”
나엘라는 늘 전쟁터를 악몽이라 여겼으나 그건 아군의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적의 죽음 때문은 아니었다.
이번 전투는 그런 걱정조차 들지 않는 평이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체드란은 예외였다.
“과분한 걱정이군.”
피식 웃은 체드란이 검을 집어넣고 주변을 돌아보자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기사단만 정리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도망갈 테니 손쓸 일도 별로 없었다.
“소문이 빠르게 퍼지겠군.”
“공포를 맛봤던 만큼 엄청나게 과장돼서 퍼지겠죠.”
“피에 미친 전쟁광 말고 다른 소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네.”
“소문도 신경 써요?”
“그대에게 전쟁광 부인이라는 소문이 돌까 봐.”
체드란은 그와 엮이며 생길 내 소문을 걱정한 모양이다. 나엘라는 그거야말로 과분한 걱정이라며 웃어 버렸다.
어쨌든 원하는 대로 첫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겼기에 두 사람은 한시름을 놓았다.
*
“잡아 왔습니다!”
뒷골목 양아치처럼 가벼운 태도로 건들거리는 서튼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왔다. 자세히 보니 한 명은 그나마 제 다리로 걸어오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바둥거리며 끌려오고 있었다.
“나머지도 살려 온 거야?”
피와 시체로 폐허가 된 전쟁터를 바라보던 나엘라는 짐짓 인상을 써 버렸다. 나머지 두 영주는 그냥 죽이라는 제 뜻을 모르지 않을 서튼이 저들을 살려온 이유는 뻔했다.
“좋은 정보가 있다던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놓고 심문이나 해 봐. 가린! 네가 심문해.”
세 사람을 잡아 오면 나엘라가 알아서 하기로 했으니 체드란에게 보여 줄 필요도 없었다. 정보가 있다면 취합해서 체드란에게 보고하고, 필요가 있을 때 그에게 데려가면 그만이다.
“대, 대공비 전하! 드릴 말이 있습니다.”
조용히 끌려가면 좋았을 것을, 두 영주가 필사적으로 나엘라를 불렀다. 심문이라는 말에 겁을 먹은 걸까. 둘에게 정말 쓸 만한 정보가 있다면 어련히 목숨은 살려 줄 텐데 말이다.
“내 부하에게 말하도록.”
고압적인 그녀의 말에 두 영주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저들은 아직도 병약하고 아름다운 대공비만 떠올린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들은 더 방방 뛰었다.
“그런 게 아니옵니다! 꼭 대공비께만 드려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이,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라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 훤히 보였다. 나엘라가 그저 귀부인인 줄로만 판단한 눈치였다. 상대가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있든 말든 그녀는 여자이니 쉬이 본 것이다.
전쟁을 처음 겪었을 게 뻔한 귀부인의 약해진 마음을 파고들자며 연민이라도 호소하거나 제압하려던 모양이었다.
“내 부하에게 하지 못할 말이면 내게 할 필요도 없네.”
나엘라가 얼른 치워 버리라고 손을 내젓자 세 사람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나엘라의 등 뒤로 뭐라 뭐라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하기만 하던 세르몬데 남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나엘라가 살려 두라고 지시한 만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인 터라, 그를 끌고 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나엘라가 던진 시전에 걸린 그의 얼굴이 유독 혈색 하나 없어 보였다.
“나는 왜 살려 두라 했습니까?”
그만 살려 두라는 말을 또 어디서 들었을까.
서튼을 향해 찌릿 눈을 흘기니 그가 다른 곳을 돌아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적 앞에서 또 주절주절 떠든 게 분명하다.
“왜 그랬을 것 같나?”
“모르니 물었습니다.”
“그대의 첫째가 황제의 친위대라지.”
다른 두 영주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뭐, 모를 만도 했다.
황제의 친위대가 되는 순간, 그의 가족들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다. 친위대의 가족들은 언제든 약점이 될 수도 있고 친위대가 변절할 수도 있는 원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다 보니 친위대가 된 이들은 아예 이전의 성을 버리고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도 꽤 많았다. 표면적으로는 오로지 황제만을 위한 검이 되겠다는 장대한 이유였으나, 실상은 가족들의 자유를 위한 도피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미약하게 번진 쓴웃음을 보며 나엘라가 말했다.
“이유는 마음대로 생각하게. 적에게 자세히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
그녀의 첫째 오라버니가 친위대 단장이었어서 배려해 줬다고 생각해도 되고, 앞으로 상대할 친위대의 약점을 잡아 놨다고 판단해도 된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둘 다 맞았으니까.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한 포로일 뿐이었다.
“끌고 가.”
더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며 손을 내젓자 그들은 다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노헤스카로 압송될 예정이다. 포로까지 데리고 전쟁터를 돌아다닐 여력은 없으니까.
함께 별동대로 나섰던 제니가 경갑을 하나씩 벗으며 다가왔다.
“포로 아니잖아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웃는 얼굴이 싱그러웠다.
“같은 제국 사람이잖아.”
그래서 그랬을 뿐이다. 한 민족이라는 애틋한 마음 때문은 아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게 걸렸다.
“은원 관계를 안 만들려 했을 뿐이야. 다른 두 영주처럼 아예 필요 없는 인간들은 정리하는 게 좋고, 세르몬데 남작 같은 사람은 살리는 게 좋아. 내전이 끝난 후에 적이 같은 제국에 남아 있는 건 별로야.”
만일 세르몬데 남작을 죽였는데 그 아들이 살아남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머리 아프다. 친위대씩이나 했던 기사가 복수라도 꿈꾼다면 황제가 될 데테로아나, 체드란과 자신도 사방을 의심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앙 귀족들을 싹 다 정리해 버리면 빈 땅은 또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다른 이들에게 재정비하라고 해. 시체 언덕에서 야영하기 싫으면 마호세르디와 만나기로 한 곳까지 열심히 달려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나엘라도 체드란이 쉬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
이 시각 수도에서는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자주 보던 소식지가 모두 사라졌다. 간간이 스캔들이나 실릴 뿐, 제국의 상황이나 전쟁에 관한 소식은 일절 실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쟁에 대한 소문은 수도 전체에 퍼져 있었다. 노헤스카가 내전을 일으키자마자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소식지에서 구체적인 패배 경위를 적었으면 좋았을 것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오히려 소문이 날로 과장되어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단 한순간에 전투가 끝났대요. 순식간이었다죠? 노헤스카 앞에선 어떤 좋은 작전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네요.”
“체드란 대공께서 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씩 죽었대요.”
“마호세르디가 본보기를 보여 준다며 한 가문을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 버렸다지 뭐예요.”
“다들 내전은 연합군이 승리할 거라던데요?”
사람들은 이제야 체감하기 시작했다. 두칸과 제스라 왕국을 상대로 평생을 싸워 왔던 이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들에 비해 다른 이들의 실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그럼 어떡해요? 지금이라도 연합군 편에 서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진짜 무서워 죽겠어요.”
“하지만 체드란 대공께서 황제가 되시면 우리가 무사할까요?”
문제는 그것이다. 체드란이 과연 복수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황좌만 원하는가.
머리를 조금이라도 쓸 줄 아는 이들이라면 황제가 퍼트린 거짓 소문임을 눈치챘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갈팡질팡하며 소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다들 결정해야 할 때예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편에 설 것인가, 연합군에 붙을 것인가.
그리고 그날 저녁, 중앙 귀족들 전원은 황궁으로 입궁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황제는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오로지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며 강요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