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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3)화 (203/220)

202화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마호세르디군과 합류하기로 한 지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전장을 빠르게 정리한 뒤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저녁이 되기 전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거점을 잡고 있던 마호세르디군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군대를 멈추고 야영 준비를 지시했다.

체드란과 나엘라, 그리고 몇 명만 이끌고 마호세르디 병영으로 넘어가자 반가운 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나엘라도 오랜만이네.”

다나한은 체드란과 악수하고 나엘라와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뒤에 있던 에스토와 다른 기사들에게도 눈인사를 하고는 바로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역시나 나엘라에게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이 몸이 늙긴 늙었습니다. 나엘라 님을 보고도 반가우니 말입니다.”

마호세르디의 기사단장 중 하나인 크젠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나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볍게 맞잡자 뒤에 서 있던 론체가 눈을 크게 떴다.

“전장의 철퇴로 유명한 크젠키 경이 아닙니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허허, 그런 이명이 있던 때도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마호세르디 기사단장 중 안 유명한 이도 있던가. 기사라면 누구나 이름 한 번씩은 들어 봤을 이들이었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한차례 통성명과 인사가 오고 가니, 모두 자리에 앉았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 두 가문의 주축들이 만났지만 남은 과제가 있었다.

목적은 같더라도 체계는 정확하게. 이제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정해야 할 때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색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나엘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총사령관 내가 할게.”

노헤스카 사람들이 깜짝 놀라 멍하니 있는 것과 달리 마호세르디 측은 바로 웃음을 터트리며 떠들썩해졌다. 다나한조차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고, 크젠키 경은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

“그 얘기도 오랜만에 듣습니다! 권력에는 관심 없는 분이 왜 항상 총사령관은 하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마호세르디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 있어? 도전할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총사령관 자리가 가장 강한 사람한테 부여되는 자리면 저도 진작에 다나한 경께 도전했을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어폐가 있지 않나. 나엘라는 체드란을 이긴 적이 없으니 그녀의 말대로라면 총사령관은 체드란이 해야 옳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론체는 곧 나엘라가 단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장난쳤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튼 분위기만 떨어지면 하극상을 일으키려는 버릇 좀 고치십시오! 결혼도 하신 분이 아직도 그러십니까?”

“이참에 도전해 보는 거지.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분위기를 잡아?”

한참 후에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다나한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진짜 총사령관을 정하기 위해 꺼낸 발언이었다.

“총사령관은 원칙적으로 가장 작위가 높은 자, 그리고 가장 경험이 많은 자가 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대공 전하께서 총사령관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나한도 경험이 적은 건 아니지만 체드란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았다.

체드란에게 전쟁광이라는 소문이 왜 붙었겠는가. 항상 전쟁터에만 있으니 자연스레 따라붙은 별명이었다.

“대공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상시 말이 별로 없는 체드란은 이곳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모여 있던 이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호세르디에서 나엘라 마호세르디라는 기사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승낙, 거절, 고려. 셋 중 하나의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이들은 눈을 크게 떴다.

뜬금없이 나엘라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다나한이 신중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체드란은 다른 이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얼떨결에 가장 말을 많이 했던 크젠키 경이 대신 답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엘라 님의 가치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호세르디에선 그저 모두가 승리를 위해 검을 드는 자들이니까요. 그래도 굳이 답을 하자면…….”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경험이 많을 노장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고심했다. 그녀의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뭐라 해야 할까.

“불규칙하다고 말하겠습니다.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답을 들었던 체드란보다 나엘라가 정작 더 놀랐다. 단순히 재능 있는 검사, 능력 있는 책사가 아닌 불규칙이라니. 한 번에 와닿는 설명이 아니라 아리송해졌다.

크젠키도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부가적인 것들을 얘기했다.

“안전에 대한 집착과 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에서 비롯된 강박. 그 두 가지가 매번 상황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쉽게 만들기도 합니다. 남들이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고 툭 튀어나온 못처럼 굴기도 하죠.”

듣다 보니 칭찬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엘라가 미미하게 인상을 쓰자 크젠키는 칭찬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엘라 님은 어느 길이든 쉽게 가지 않으려 하는 위험 분자입니다. 튀어나온 방향의 도전은 주변을 위험에 빠트리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죠.”

가치란 것은 무릇 그 쓸모와 대상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룰 때 그 중요성이 드러난다. 그런 것을 어찌 한 부분만으로 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 그 과정이 합당한 사유에 의한 방향이라는 걸 알고 있고, 결과 또한 긍정적이죠. 또한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가기에 그 보상도 남들과는 다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대단하신 분입니다.”

나엘라가 괜히 멋쩍은 기분에 코를 쓱 문지르는데 체드란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의 가치에 관해서 물은 건 마호세르디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따를 예정이니까.”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크젠키가 다시 물었다.

“그거라면 이견은 없습니다. 나엘라 님의 의견은 꼭 따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나는 단순히 그런 부분에 대해 한정하는 것이 아니네. 내가 나엘라의 의견을 따르는 이유는 그녀와 나의 성향이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야.”

성향이 비슷하다는 말에 나엘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의외의 답이었다. 대부분 상황에서 체드란이 제 의견을 따라 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이유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크젠키 경의 말대로 나엘라는 일반적이지 않지. 원하는 걸 얻는 것에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여 얻어 내는 스타일이야.”

회의장에 있는 이들이 체드란의 말뜻을 이해하려 침묵에 빠진 그때, 다나한이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런 스타일이란 얘깁니까?”

“저 또한 적이라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고 베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연합군을 이끌었을 때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인즉, 노헤스카군이 위험을 감수하고 체드란과 나엘라의 뜻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마호세르디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나한은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저도 아닌 것 같을 때는 안 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반대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총사령관이 결정한 사항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려 한다면 하극상을 벌여서라도 반대하겠다는 얘기였다.

체드란은 그럼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체드란이 연합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받아들였다.

*

급보를 받아 본 나엘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전쟁 중 날아온 급보인 만큼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황제가 강제 소집령을 내렸답니다. 중앙 귀족 전체를 상대로요.”

나엘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체드란과 눈을 맞췄다.

“반발하면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제거하겠군.”

“연합군이 중앙에 입성하기 전, 본보기로 보여 줄 강함이 필요했을 거예요. 연합군이 얼마나 강한지 소문났으니 황제도 그만한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할 차례죠.”

“황제도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인데 꽤 능숙하단 말이지.”

“전쟁보다 황실이 더 무섭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뭘. 전투는 어떨지 모르지만 사람 다루는 건 자신 있다는 거죠.”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들이 겁을 먹도록 만들어 상황을 반전시키고 사기를 올린다.

전투력을 실감할 수는 없지만, 처세만큼은 대단한 자였다.

“황실 친위대, 그리고 수도군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들의 강함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요?”

“글쎄, 단제 경에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큰 오라버니는 제스라 왕국 국경선으로 갔다네요. 아무래도 친위대를 상대하는 건 껄끄럽겠죠.”

나엘라의 어깨에 걸쳐 있던 팔이 쪽지를 툭 쳤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체드란이 그런 고민에 빠진 사이 잘생긴 얼굴을 구경하던 나엘라가 작게 웃었다.

“이러다 턱에 베이는 건 아닐까요?”

체드란이 무슨 소리냐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잘생겨서 하는 말이에요.”

“전쟁터에서도 꽃은 핀다고 하지.”

은유적인 말이지만 둘 사이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을까. 체드란이 고개를 내려 입술을 포갰다.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촉감을 머금고 있는 입술이 살며시 떨어졌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날이군.”

“아직 안 빠져 있었어요?”

“매일 빠지는 중이란 말을 깜박했군.”

무감정해 보이는 파란색 눈동자, 무뚝뚝한 눈매, 살짝 내리뜬 눈에서 흘러나오는 권태로움.

늘 그런 것들을 달고 사는 체드란이 가끔 이렇게 능글맞은 말을 내뱉는 것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그의 표정과 느낌이 별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장난 하나 없이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나른하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엘라는 매번 놀라고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왜 좋아해요?”

“너무 늦게 물은 것 같은데.”

“그래도요.”

체드란의 고개가 나엘라의 얼굴 옆으로 내려갔다. 체드란의 입술은 갑옷을 벗고 가벼운 티만 입은 그녀의 목으로 향했다. 그의 코끝이 살결을 스치며 내려가자 나엘라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길래.”

“네? 겨우 그거예요?”

“겨우라니.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해서 누군가가 대신해 내는 걸 보면 질투가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 그런데 나는 다른 감정으로 참을 수가 없었네.”

체드란의 입술이 목과 어깨 사이, 쇄골의 윗부분을 도장이라도 찍듯 꾸욱 눌렀다.

명백히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원하는 걸 알려 주듯이.

“내게 그런 욕망이 있는 줄 몰랐어. 그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그대가 내 것이라고 생각되자 참을 수가 없이 터져 나오더군.”

나엘라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일 때 체드란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침대에 가서 쓰러트려 버리고 싶다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번쩍 들렸다. 나엘라는 그제야 그가 장난을 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뭐예요! 진지하게 물은 거라고요!”

체드란은 버둥거리는 그녀를 안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나도 진지하게 말하는 중이야.”

“체드란!”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받으며 빠르게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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