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중부 지방의 귀족들은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황제의 명에 따르는 자들, 여러 핑계로 기사단 소집을 늦추며 추이를 지켜보는 자들, 불만이 생긴 자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수도는 연일 불안감이 조성됐고 평민이든 귀족이든 모이기만 하면 내전 이야기를 수군댔다.
연합군은 중부 지방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황제파 귀족들의 군대도 접견 예정 지역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수도군 역시 대대적인 재정비를 마치고 격전지로 출발하려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음 전투는 절대 쉽지 않을 거예요. 여기서 우린 선택을 해야겠죠. 주변 영지들을 쓸면서 돌파할 건지, 아니면 최대 격전이 일어날 만한 곳 근처에 거점을 세우고 적들을 상대할 건지.”
“각 선택지의 이점은?”
말을 타고 행군하는 와중에도 체드란과 나엘라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돌파를 선택하면 최대 이점은 역시 시간이죠. 뒤를 생각하지 않고 미친 듯이 돌파하면 북부의 지원이 오기 전에 황궁을 점령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선택의 이점은?”
“거점을 방어하며 싸우면 수도가 전쟁터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시가전을 하면 수도 중심부가 전쟁터가 되어 많은 것들이 망가질 테니까요. 그럼 복구에도 많은 자원과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이는 이점만을 얘기한 것일 뿐, 두 가지의 경우에도 단점은 있었다. 나엘라는 단점도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돌파를 하게 되면 수도가 많이 망가질 거라는 것과 우리의 전력을 다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어요. 건물 곳곳에 숨어 있을 적의 기습을 다 막을 수 없을 테니 예상보다 속도가 나지 않을 거고, 시가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 역시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하긴. 제스라 왕국이나 두칸을 상대로 전투할 때는 대부분 도시에서 싸운 것이 아니니까.”
“두 번째의 단점은 북부의 지원이죠. 시간을 끌게 되면 방어를 대비할 틈을 주는 거고 황제가 북부만 끌어들일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황제가 주변국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그사이에 중앙 귀족들을 제 편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당장 눈앞에 없는 연합군과 바로 앞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황제 중 누가 두려울지는 뻔했으니까.
“그럼 돌파가 낫겠군. 북부 지원을 더 늦출 방법을 찾고 수도군을 전부 끌어내야지.”
친위대는 황제 곁을 떠나지 않겠지만, 수도군만 밖으로 끌어내 싸운다면 수도가 망가질 걱정은 덜할 수 있었다. 더불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북부 지원을 늦출 수도 있고 말이다.
“일부 수도군은 내일 출발한다고 하네요. 전부를 출전시키진 않는 것 같아요.”
“무조건 친위대는 황궁에서 상대하고, 수도군은 수도 밖에서 상대해야 한다.”
“거기다 북부 지원군의 발목도 잡아야 하고요.”
상황이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았다.
최소 피해, 최단 시간, 그리고 불안 요소들을 제거한 상태로 황제를 상대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더 좋은 방법을,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치워 두고 전투를 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가 갈 다음 거점까지 하루, 거기서 수도까지는 이틀이 걸리죠. 다음 거점에는 상대도 우리와 엇비슷하게 도착할 거예요. 북부 지원군이 수도에 도착하기까진 사흘 정도 남았고요.”
다음 거점에서 전투를 아무리 빨리 끝낸다고 해도 최소 반나절 이상은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투가 끝난 뒤 수도에 도착할 경우 북부의 지원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8시간 남짓. 밤새 전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실질적으로 남은 시간은 12시간 정도이다.
그 시간 동안 남은 수도군을 상대하고 황궁에 밀고 들어가 친위대까지 상대할 수 있을까. 상대도 분명 그걸 알고 최대한 시간을 끌려고 들 것이다.
12시간도 최소로 잡은 시간이니 다음 거점 전투에서 시간이 더 걸리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그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그나마 우리 이점을 살려 전투를 할 수 있는 곳은 다음 거점밖에 없어요.”
마호세르디가 있는 서부나 노헤스카가 있는 남부를 깨끗이 정리하고 왔기에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간을 벌 방법을 찾아야겠군.”
체드란이 고삐를 놓고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그가 신기했다.
“북부 지원군을 늦출 방법으로 생각난 게 하나 있긴 한데……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어요.”
“뭐길래?”
“클루아조 소공작을 보내 협상하게 하는 거요. 북부에 관해선 그가 잘 알겠죠. 어쩌면 그들을 늦출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일단 황제의 감시 속에서 그를 빼내야 하는 데다, 그렇다 해도 북부 지원군을 이끌고 오는 자와 클루아조가 어떤 사이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클루아조가 저번에 서신을 보낸 것도 겨우겨우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감시가 심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수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설령 그를 내보낸다 한들 그가 북부 지원군을 이끌고 오는 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북부 출신이니 북부 가문들을 잘 안다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해 볼 가치는 있으나 장담할 수 없다는 거군. 그를 구출할 방법은?”
“테러로 시선을 돌리는 것과 여러 위험을 각오한 채 믿을 만한 자들을 보내는 게 있죠.”
테러로 시선을 돌리는 건 그 후가 문제다. 달려올 군인들 사이에서 어디로 몸을 내빼 의탁할 것인가.
위험을 각오하고 클루아조를 구출하는 건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둘 다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거다.
“둘 다 하지. 테러를 벌이는 건 중앙 귀족 중 반감을 품은 자가 벌인 것처럼 꾸미는 게 좋겠군. 그 후 몸을 숨기는 것은 란첸트 백작을 찾아가라 하면 돼.”
“란첸트 백작이요? 그는 평생을 황제에게 충성한 사람이잖아요?”
란첸트 백작이라면 나엘라도 잘 알고 있었다. 마호세르디와 더불어 몇 대에 걸쳐 황가에 충성해 왔으며, 이번 황제 역시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이다.
심지어 황제가 황좌에 오를 때 다른 황자들을 숙청하는 일을 앞장서서 도왔다.
“그렇게 알려졌지.”
“그가 황제를 배신했다는 거예요? 진짜 의외네요. 이유가 뭔데요?”
“황가에 오랫동안 충성한 가문이니까. 황제가 황좌에 오를 때 그의 형제들은 누가 봐도 무능한 쓰레기였으니 도운 것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는 황가에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가장 괜찮은 황제가 황좌에 오르기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능력 있는 이들을 오히려 견제하고 쳐내는 꼴이니, 배신을 택할 만도 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황가에서 나올 때 찾아와 사정했으니까. 나까지 나가면 황가의 미래가 안 보인다더군.”
체드란은 그때가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란첸트 백작은 데테로아가 황태자가 됐을 때도 체드란이 돌아오길 바랐으나 그 바람을 거절했다. 대신 황제를 제거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단다. 데테로아가 좋은 황제가 될 테니 지금은 그저 웅크리고 기다려 달라고.
“그럼 다행이네요. 황제도 테러범들이 란첸트 백작가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 그렇게 어수선할 때를 틈타 클루아조 소공작을 탈출시켜 북부로 보내는 게 좋겠군.”
“근데 란첸트 백작이 체드란을 찾아왔었는데 황제가 란첸트가를 가만뒀어요?”
“몰랐을 거야. 란첸트 백작은 철저한 자니까. 적이 되는 순간 가장 조심해야 할 자 중에 하나야.”
나엘라는 딱히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녀가 수도에 올라와 활동할 때쯤 그는 나이가 들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두문불출했으니까. 마호세르디 공작은 좀 알 수도 있으려나.
“라엘 기사단 중 일부를 수도에 잠입시킬게요. 테러를 일으킬 조와 클루아조를 탈출시키고 북부까지 호위할 조로 나누죠.”
“소규모 인원인 게 낫겠지. 테러 방법 역시 빠르지만 화력은 큰 것으로.”
“북부 지원군을 막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죠. 클루아조가 지원군을 설득하다가 실패해서 붙잡힌다 한들 목숨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아요. 거기까지 가면 호위 인원은 클루아조만 남기고 빠지는 게 좋겠어요.”
“클루아조 소공작이 잔인하다며 매달릴지도 모르겠군.”
“본인도 그 정도는 해야죠. 안전한 곳에서 잘 놀고 있었으면서.”
원하는 만큼 일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대략적인 계획을 상의하던 둘은 얼추 견적이 나오자 다나한과 마호세르디 단장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들에게 계획을 공유하고 의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진군은 계속되고 있었다.
*
하루 뒤, 다음 거점에 도착한 연합군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간이 막사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나엘라는 최종 계획을 점검했다.
“북부 지원을 늦추는 건 운에 맡기고 다른 계획들을 확인할 겁니다.”
전술을 짠 나엘라가 모두의 앞에서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진군하며 오는 내내 여러 의견을 나누어 그런지, 이때만큼은 다들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 전투를 반나절 안에 끝내고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수도로 진군하는 동안 벌어질 소규모 전투에 대비하거나, 또는 남은 수도군을 끌어내 수도의 성벽 밖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진짜 마지막 전투는 황궁이나 황궁 근처에서 치러질 친위대와의 전투였지만 그것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번 전투를 노헤스카의 일부 병력과 마호세르디군이 맡아 승리로 이끌고, 노헤스카의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그대로 전장을 빠져나와 수도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친위대를 제압하고 황궁을 점령하는 게 가장 빠를 겁니다.”
하지만 이 작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거점을 지나 수도로 가는 길을 막아설 다른 중앙 귀족들의 병력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황도에 남아 있는 수도군이었다.
“이것은 저희 편에 설 중앙 귀족만 있다면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황제 측의 중앙 귀족을 연합 측의 중앙 귀족으로 막는다면 승산이 있었다. 쓸 만한 병력은 거점으로 대부분 차출당했을 것이고, 남아 있는 나머지 자잘한 이들은 전력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노헤스카 기사단이 일일이 그들을 상대하고 지나가기에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시간이란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우리 편이 되어 황제 측과 대신 맞서 싸워 줄 수 있는 중앙 귀족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은 수도군을 수도 밖으로 빼내려면, 또 다른 병력이 나타나 안심하고 있을 그들을 건드려야 하죠.”
분명 거점에서 전투가 이뤄지고 연합군이 승리했다고 한들, 수도까지 오는 시간이 있으니 그들은 천천히 만반을 기하며 대비하려 들 터였다. 한데, 갑자기 수도 성벽 밖에 적들이 나타난다면?
그럼 수도군은 허겁지겁 남은 병력을 이끌고 수도 밖으로 나올 것이다. 수도가 파괴되는 것은 그들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또한 수도 주민들의 피해도 걱정해야 하고.
“그사이에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황궁까지 진격하여 점령할 수만 있으면 최고의 작전입니다만…….”
걸리는 게 너무 많으니 문제였다. 실현 가능성도 작았고.
“우선 중앙 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는 여론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귀족들은 우리의 뜻을 알았을 겁니다.”
나엘라가 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