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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6)화 (206/220)

205화

“후작님, 적들이 진격 준비를 마친 것 같습니다.”

어둡고 침통한 목소리가 도르만 후작을 향했다. 그는 이번 전투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수도군과 중앙 귀족들을 합친 황제군을 이끌게 된 자였다.

황제가 친히 그를 불러 지휘관에 임명했을 때, 그는 불경하게도 감사하거나 벅찬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도르만 후작은 바보가 아니기에 황제군으로는 연합군을 막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과 함께 온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황제의 명에 의해 억지로 참전한 자도 있고, 충성심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자도 있었다.

다만, 낯빛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전투를 앞두고 그들이 하고 있을 생각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억지로 참전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충성심으로 참전했다 한들 이 전투의 승패가 암담하다는 걸 잘 아는 만큼 좋은 낯빛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후작은 이들을 이끌고 전투를 나서야 한다.

“적들은 단번에 수도까지 진격하기 위해 이번 전투에서 총공세로 나설 것이네. 우리는 그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야 하지.”

모인 이들의 사기가 더 가라앉을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비록 우리의 죽음이 개죽음일지라도 최대한 발악하게. 그래야 수도에 있는 가족들이, 가문이 무사할 걸세.”

이미 황제를 위해 선 자들, 그런 이들의 가문을 연합군이 얼마나 용서해 줄지 모르겠다. 남겨둬 봤자 가주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며 날뛰는 이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후작님!”

후작이 마지막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급히 뛰어들어 앞을 막았다. 도르만 가문의 기사 중 하나였다.

“적진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뭐?”

“황제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자는 이 일을 묻어 두겠다는 전언입니다.”

술렁임은 잠깐이었다. 후작은 침통한 낯으로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왜 그런 전언을 보냈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가능한 얘기가 아니었다. 황제가 어떤 자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 터. 자신이 전장에 나서는 순간 수도에 있는 가족들은 인질이 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누가 황제의 사람인지, 누가 이곳에서 있던 일을 고해 바칠 자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만 살겠다고 항복을 하고 연합군 쪽으로 가겠는가.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니 다 같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죄인지도 모르겠군.”

눈빛으로 알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이들.

“이때까지 누군가의 죄를 방관하고 외면한 죄를 이렇게 돌려받는 걸세.”

과연 이들에게 기회가 없었을까.

체드란이 궁에서 쫓기듯이 나왔을 때, 대공 부부가 수도로 올라왔을 때, 하다못해 내전이 막 일어났을 때라도 짐을 싸 가족들과 도망쳤다면 지금처럼 연합군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헛된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 역시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황제가 어떤 자인지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외면했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워서.

“그러니…… 우리 모두 최대한 살아 보세나.”

힘없는 그의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다짐을 나눴다.

*

“안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망원경을 내린 나엘라는 전령들이 돌아온다며 체드란을 불렀다.

“기대하지도 않았으면서 뭘 또 실망하고 그러나.”

“그냥 아쉬워서요. 저들 중에는 원해서 나온 게 아닌 자들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전령을 살려서 보내는 걸 보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군. 지휘관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그리 적대하지 않는 듯하네.”

얼마 후 진영에 도착한 전령들의 말에 의하면 역시나 저들 중 항복하는 자는 없었다. 예상했음에도 나엘라는 씁쓸한 미소를 걸쳤다. 황제가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무슨 기대를 한 걸까.

아니, 딱히 기대는 아니었다. 그저 포기하는 자가 없으니 아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점이 안타까울 뿐. 다나한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하여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호세르디 기사단장, 다나한, 에스토, 노헤스카 사람들 모두 말에 올랐다.

이곳까지 나온 이들 중 전쟁이 두려워 물러날 사람은 없었다. 체드란이 계속 자신의 옆에 있으라며 잔소리를 했지만, 나엘라도 어디 가서 실력이 뒤처지는 자는 아니니까.

어느 정도 대열을 가다듬자 상대도 우리 쪽의 기세를 느끼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넓은 평야이니 전술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마병이나 별동대로 적의 허를 찌를 것도 아니었다.

굳이 전술이라고 한다면 전술일 수도 있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나엘라는 아주 평범한 전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그녀가 가장 믿는 것은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오늘날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체득한 경험과 생사의 순간을 수없이 넘나들며 키워 온 실력들. 그게 우리를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

가장 선봉에 선 체드란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적을 향해서!”

어쭙잖은 격려나 사기를 북돋는 말은 없었다. 그런 말 따위는 수없이 했고 이제는 필요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전원 돌격!”

시간이 가장 중요한, 진짜 전투의 개전(開戰)이었다.

*

노헤스카군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황제군도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다들 어차피 죽을 거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양 진영의 군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가장 평평한 지역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순식간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양 전력은 숫자만 놓고 본다면 비슷했으나, 어디까지나 숫자에서 한정됐다.

노헤스카와 세르몬데 남작의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맞부딪치자마자 황제군의 선두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잘 버텨냈다. 같은 전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각 가문의 가장 강한 기사단과 수도군이 선두를 맡은 덕이다. 적군인데도 불구하고 나름 선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체드란을 선봉에 세운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대열의 중간을 파고들려 했지만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전쟁광이란 그의 이명이 어디 가겠는가. 그를 상대하던 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르만 후작이 강조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든 체드란을 잡아 둘 것.

하나 쉽지가 않았다. 그의 기사단은 체드란의 돌격 스타일에 맞춰 전투 경험을 쌓아 온 이들이다. 체드란이 앞으로 나아가면 혼자 포위당하지 않도록 전방을 제외한 세 방향을 사수했다. 절대 그를 혼자 두는 법이 없었고, 그 혼자 여러 명을 상대하게 두지도 않았다.

특히 그의 옆에 있는 한 기사가 발군이었다. 투구까지 써 전신을 가린 기사는 체드란만큼은 아니지만 빠른 속도와 쾌검으로 기사들의 허를 찔렀다. 검술이 얼마나 화려한지 아차 하는 사이에 적들은 부상을 당했다.

“저기다! 체드란 대공부터 쳐야 한다!”

누군가의 외침에도 상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일 먼저 적장의 목을 치는 건 당연한 일. 그런 상황에서도 매번 살아남은 체드란이다.

다른 이들을 상대하던 황제군조차 체드란만 발견하면 부지불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무작정 달려드는데도 체드란에게 틈은 생기지 않았다. 세 명이 덤벼도 검을 들어 둘을 막고 한 명을 발로 차 몸을 피할 구멍을 만들었다.

“밀어붙여라! 체드란 대공만 죽인다면 승산이 있다!”

근처에 있던 도르만가의 기사단장이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체드란의 옆을 지키던 발군의 기사에게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가득한 전장임에도, 크게 웃은 것도 아닌데 그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의아하던 찰나 그 기사와 맞붙었다.

“궁금하네.”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경악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기사는 말했다.

“이곳엔 검은 방패 기사단의 단장 다나한 경도 있고 명성을 떨쳤던 수많은 기사가 있는데 왜 체드란 대공이 죽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할까.”

검을 맞댄 찰나 기사가 그렇게 물었다. 힘겨루기를 하던 검은 금방 떨어졌고 기사는 엄청난 속도로 검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 쳤다.

챙, 챙─.

몇 번의 합 동안 검이 부딪혔다. 그는 밀리진 않았지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빠르다, 그것도 너무 빠르다. 적은 휘몰아치듯이 휘두르며 자꾸만 제 허점이 나오도록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상대보다 강한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그리 마음먹은 기사단장이 손잡이를 꽉 쥐었을 때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노헤스카군이 우회한다! 양쪽 측면을 방어하라.”

도르만가의 기사단장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상대와 검을 맞대던 곳에서 거리를 둔 채로 상황을 확인했다. 그때그때 전장을 확인하고 전시 상황을 도르만 후작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헤스카군이 세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기사 하나가 그렇게 보고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노헤스카군의 중간 대열과 후미가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선두를 내버려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그들은 전장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는 서둘러 적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들은 분명 황제군의 측면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측면을 노리는 건가?”

선두에서 체드란과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버티는 동안 황제군의 옆을 쳐 대열을 흐트러트릴 셈이 분명했다.

황제군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을 대부분 앞쪽에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측면에 있는 병력이 노헤스카군을 상대했다간 바로 뚫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군은 반으로 갈려 선두에 있는 이들은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만 한다.

“젠장. 후퇴해야 해……!”

지금 당장 도르만 후작에게 알려야 한다. 어떻게든 측면을 방어하고 선두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씩 후퇴하며 싸워야 한다.

노헤스카 군이 왜 이런 전술을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황제군은 분명 선두에 실력 있는 자들을 몰아넣을 테고 그런 이들을 상대로 빠르게 승리하려면 이 방법만 한 것이 없다.

전술의 기본 중 기본이거늘 상대가 할 수도 있는 걸 왜 생각 못 했을까. 기사단장이 후작에게 가려는데 갑자기 검이 날아오며 누군가 막아섰다.

“황제군 내에서의 직위가 어느 정도지?”

자신의 말에 웃음을 흘렸던 자! 아까까지 상대했던 체드란의 기사였다.

“직위는 왜 물어보는 것이지?”

기사단장은 퇴로를 확인하며 걸음을 조금씩 물렸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나?”

상대의 검이 순식간에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갑옷 위로 까가각,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자국이 생겼다.

“지휘부가 빠르게 죽을수록 그 아래 병사들이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생각.”

지휘부가 빠르게 죽으면 전투가 단숨에 끝나고, 그럼 차출된 병사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건가.

그런 생각에 멈칫한 사이, 찰나의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의 발길질에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기사의 검이 갑옷을 뚫고 들어왔다.

“체드란……!”

“도르만 후작가의 기사단장, 반체르 나비드랑 경이다. 실력 있는 자니 빨리 해치우는 게 좋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상대는 우위에 선 상황에서도 상대측 전력까지 확인하며 방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래서야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그의 목소리를 끝으로 반체르의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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