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막아야 한다! 막아--!”
도르만 후작은 피가 터져라 외쳤다.
자신의 삶 중에서 이런 아비규환을 맞닥트린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귀족으로 태어나 일반인들은 닿지도 못하는 삶을 사는 그에게는 여러 위기가 있었다.
가문의 존망이 걸린 위기도 있었고 말 한 번으로 재산의 반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신해 왔건만, 지금처럼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비드랑 단장은 어디 있는가!!”
도르만 후작가의 반체르 나비드랑 기사단장. 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선두에서 연합군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이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를 찾기 위해 도르만은 사방을 살폈지만 보이는 거라곤 일방적인 학살, 그것뿐이었다.
“후작님! 대열의 양쪽 측면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가문의 기사 하나가 그를 붙잡고 외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자신과 함께 직접 검을 들고 싸우던 가주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먼저 몸을 피했다고 해도 도망치는 모습 정도는 보였을 텐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당장 대열을 정비하라!”
“이미 무리입니다! 적들이 수뇌부들을 찾아 제거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제야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함께 집결했던 남작가의 가주, 그리고 그를 지키는 기사들. 그러나 이들 모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적들이 그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자 남작가의 가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악에 받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슨-!”
투구로 얼굴을 가린 이가 이내 검을 쥐고 자세를 잡더니 단번에 공간을 갈랐다. 가주를 지키기 위해 기사들이 몸을 던지며 막았으나, 적은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압도적인 체구에 투구조차 쓰지 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피가 툭툭 떨어지는 백금발을 거칠게 쓸어넘긴 그는, 한 기사의 목덜미를 잡더니 그대로 뒤로 넘겨 버렸다. 검술로 파훼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무력행사였다. 한 명의 기사를 뒤로 던져 버리더니 들고 있던 대검의 넓은 면으로 나머지 두 명을 후려쳐 버렸다.
“전쟁광…….”
도르만 후작에게서 나직이 그의 이명이 흘러나왔고, 어느새 남작가 가주의 목이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투구를 쓴 이는 가볍게 검을 털더니 고개를 돌렸다.
“무슨……!”
꽤 먼 거리임에도 어찌 된 일인지 그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자는 이곳을 쳐다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그 기사가 노헤스카 대공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후작님! 피하십시오!!”
그제야 도르만 후작의 걸음이 떨어졌다. 그대로 몸을 돌려 적과 아군의 구분도 잘 안 되는 평야를 달렸다.
기사 가문의 적장자로 태어나 평생을 갖고 살았던 긍지와 명예는 이제 없었다. 그런 것들은 목숨을 살려주지 않으니. 죽음의 문턱 앞에서 도망을 택한 도르만 후작은 몰아치듯 쏟아지는 적들을 피해 정신없이 달렸다.
그때였다.
“커억--!”
자신을 대피시키며 함께 달리던 기사가 갑자기 앞으로 꼬꾸라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그의 허벅지에는 익숙한 대검이 박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 봤던 바로 그 검이었다.
“신이시여…….”
후작의 사지가 벌벌 떨려 왔다. 제 뒤로 다가오는 기운을 차마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누구를 향해 검을 들었는지, 그들을 키워 냈던 전쟁이란 진정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일부분이라도 깨닫게 된 후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떨림을 진정시키며 후우- 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 번 도망치긴 했으나, 자신은 검을 쥐고 사는 자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검을 휘두르다 죽으리라.
후작은 검 손잡이를 꽈악 말아쥐고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저벅저벅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을 마주한 채.
*
수뇌부 중 한 명의 머리를 베어 낸 나엘라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지가 피로 물들며 퍼져 나가는 혈향, 귀곡성처럼 비명이 가득한 전장. 수많은 자들의 생사가 판가름 나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자신을 악몽으로 이끌었으나 가장 익숙하기도 한 곳. 나엘라는 오랜만에 격하게 움직여 찌뿌둥한 몸을 풀어 주고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가장 중요하게 찾는 이가 보이지 않아 둘러보던 그때, 그녀의 시야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체드란.”
달려들던 몇 놈을 처리한 그가 나엘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상대는 곧장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찾았군.”
“이대로면 놓칠 것 같은데요?”
나엘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검깨나 쓴다더니 도망가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던 체드란이 검을 가볍게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그러고는 검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더니, 활을 당기는 자세처럼 어깨 뒤로 가져갔다. 만약 그가 쥔 것이 창이었다면 창을 멀리까지 쏘아내는 투창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체드란은 오른팔과 어깨, 허리의 근육을 콰드득 응집하며 힘을 모았다.
그리고 곧.
“커억--!”
투포환을 던지듯 퉁-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며 검을 날렸다. 갑옷 때문에 몸통을 뚫을 수 있을까 걱정한 그는 후작이 아닌, 그 옆에 있던 기사의 허벅지를 조준했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대검이 적과 아군의 틈 사이를 지나 목적지에 도달했다. 화살이 아니었기에 찢어진 기사의 허벅지에서는 피가 금세 뿜어져 나왔다.
나엘라는 새삼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피식 웃은 체드란이 그 자리에 멈춰 선 도르만 후작에게 다가갔다. 무슨 연유인지 자리에 멈춰 꼼짝도 하지 않던 이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와…….”
나엘라가 작은 감탄을 흘렸다.
그녀도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해 왔기에, 상대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목숨을 불사를 각오했을 때의 기개를.
아군이었으면 내적 성장을 한 단계 앞둔 그를 축하하고 도움을 건넸을 것이다. 후작의 나이가 꽤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 한들 앞으로 나아가는 이를 보는 게 어찌 즐겁지 않을까.
문제는 그가 적이라는 거지만.
“프로일리 평야 전투의 황제군 지휘관, 세자르 도르만 후작이 맞는가.”
체드란의 물음에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자세를 잡았다.
“이 장소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노헤스카의 전쟁광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을 만나 영광입니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상대다. 적장을 예우할 줄도 알고 질 것을 알면서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아까 도망칠 때와는 완전 다른 사람 같다. 그사이에 많은 것을 내려놓았겠지.
“항복할 의사는?”
“없습니다.”
아쉽다. 눈빛이 정말 좋은 상대인데 적을 잘못 만나 버렸다. 이런 자와 함께 싸웠다면 꽤 힘이 됐을 텐데. 이곳에서 황제의 욕심으로 스러져 가는 인재들이 진정으로 아쉬웠다. 이런 상대를 죽여야 하는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였고.
나엘라는 속내를 감추고는 체드란에게 자신의 검을 내어주었다. 그의 검은 아직도 다른 이의 몸에 박혀 있으니.
검을 받아 든 체드란이 공중에서 몇 번 휘두르더니 후작을 향해 검을 겨눴다. 어느새 그의 주변은 붉은 월계수 기사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체드란이 검을 들어 전투하는 순간만큼은 그들이 체드란의 주변을 채운다. 전쟁 내내 그들의 연계기를 보며 감탄했던지라 나엘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로지 체드란만을 위한, 그에게 맞춰진 자들이니까.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후작이 비장하게 말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을 맞잡고 사선으로 기울여 올렸다. 각 가문에서 내려오는 검술이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제국 검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취한 자세 역시 제국 검술 1식의 첫 자세였다. 그걸 보자마자 나엘라는 승부가 금방 갈릴 것을 직감했다.
정직하고 곧은 검술이지만 정작 전쟁터에서는 그런 검술이 가장 먼저 쓰러진다. 아무리 기본기가 중요하다지만 튼튼한 기본기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 것이 전쟁이니까.
그 예로 황실에서 나고 자라 제국 검술을 물려받았을 체드란은 오히려 아무런 자세 없이 가만히 서서 검을 아래로 내렸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 같은 자세에 후작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검까지 흔들리진 않았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발 하나를 뒤로 보내고 흙이 밀릴 정도로 힘을 준 그가 땅을 박찼다. 뛰어나가는 속도와 더불어 몸의 중심을 뒤쪽으로 보냈다가 다시 앞으로 휘두르는 사선 베기가 이어졌다. 체드란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살짝 뒤틀어 아래부터 위로 검을 쳐올리니 후작의 검이 다시 튕겨 나왔다.
후작은 튕기는 반동을 틀어잡고는 다시 오른쪽을 노렸다. 궤도가 너무 정직한 탓에 체드란은 아직 올라가 있는 검을 그대로 내리쳐 상대의 진행을 막고는 몸을 회전시켰다.
쩡- 쩌정-
금속음이 아니라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 두 번의 합이었지만 대검이 아님에도 실려 있는 힘이 만만치 않다. 후작이 검을 비틀어 빼냈지만 부딪힌 충격이 사라지진 않았다. 검을 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몸을 회전시킨 체드란이 검을 들고 있지 않은 팔의 팔꿈치로 후작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것이다.
후작이 얼른 몸을 뒤로 빼냈지만 이미 머리를 맞은 터라 웅웅거리는 시야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검술을 사용하지 않는 자와 싸워 보는 건 처음인 걸까.
그 뒤로 후작은 속수무책이었다. 상대가 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적이 기다려 주는 건 어불성설. 체드란은 한 걸음을 다가가며 검을 휘둘렀다.
“맙소사-!”
검을 내리칠 때마다 체드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작이 밀려났다. 검에 허수를 섞은 것도 아닌, 단순한 휘두름에도 상대는 반격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몸 전체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을 터.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거나 힘을 흘리는 방식으로 싸워야 하거늘, 이를 알지 못하는지 후작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 어떤 이가 제국의 귀족을 상대로 무지막지하게 검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전장에서 실전으로 싸워 본 것도 아닌데.
“이게 제국의 현주소네.”
나엘라가 한숨을 내쉬자마자 승부는 결정됐다. 챙그랑- 검을 놓친 후작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손은 이미 여러 갈래로 찢어져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식하게 힘을 받아 냈으니 그리될 수밖에.
“마지막으로 묻겠네. 항복하겠는가.”
체드란의 검이 후작의 목 앞에서 예기(銳氣)를 뿜었다.
“아니요.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후작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체드란의 검을 기다렸다.
“죽이겠다고는 안 했는데.”
후작의 눈이 다시 번쩍 떠지고 체드란의 검이 치워졌다.
“그럼 무엇을……!”
“포로다.”
후작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체드란이 주변의 기사에게 눈짓하자 기다리던 이가 다가와 후작을 포박했다.
“전투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라.”
체드란이 그리 명하자 기사가 숨을 들이마시고 사방에 외쳤다.
“적의 지휘관, 도르만 후작과 수뇌부가 모두 굴복했다!! 항복할 자는 항복하라--!!”
기사의 외침이 다른 이에게 전해지자, 그들 또한 들은 것을 다시 주변에 외쳤다. 곧 사방에서 같은 이야기가 울려 퍼지며 한 명씩 검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가 드디어 끝을 맺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