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8)화 (208/220)

207화

프로일리 평야 전투, 참패(慘敗)

연합군은 승리했고 시간을 끌기라도 할 줄 알았던 황제군은 그야말로 참패(慘敗)했다.

수도가 죽은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동요한 수도민들은 당장 피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후 내려진 황제의 결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남아 있던 수도군들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도민들의 이동을 막아 버린 것이다.

자신들을 지키고 수호해 줄 줄 알았던 이들이 오히려 검을 들이밀자 많은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리 흐르자, 그들은 한때 떠돌았던 소문이 진실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황제는 사실 악덕한 군주다.’

‘황제는 딱히 죄가 없어도 귀족들의 약점을 잡고 핍박하며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을 제거하려 한다.’

수도민들이 이 정도로 동요했는데 귀족들은 오죽할까. 귀족들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다.

연합군이 수도에 당도하기 하루 전.

“할아버지! 살려 주세요! 아악─!”

어린 영애가 친위대에게 질질 끌려가며 애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란첸트 백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은 지금의 황제를 황좌까지 올린 공신 중의 공신이다. 그런데 이 대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백작님, 폐하께서 영애의 안전을 보장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한 폐하의 충신이신 만큼 가장 좋은 대접을 약속하셨습니다.”

“내 손녀를 죄인처럼 끌고 가면서 말인가?”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라 하셨습니다. 다른 가문들은 이보다 더 많은 수가 끌려가니까요.”

친위대 기사 하나가 정중한 태도로 그리 말했다. 백작의 손녀를 끌고 가면서도 다른 가문의 자제들은 한 명만 끌고 가지 않는다고.

“하……! 지금 친위대의 임시 단장이 내 아들이 아니던가.”

단제 마호세르디가 수도를 탈출한 뒤 임시로 친위대 단장을 맡은 이가 란첸트 백작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속해 있는 기사단에서 손녀를 끌고 간다? 자신에겐 손녀지만 아들에게는 딸인 아이였다.

“후우…… 저도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단제 단장님이 그리 가신 이후로 황제 폐하께서는 친위대조차 믿지 않으십니다.”

친위대는 정말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떠나갔다. 울며불며 애원하는 손녀가 눈에 밟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친위대까지 떠나간 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여인이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어, 어쩌면 좋아요. 폐하께서 어떻게 란첸트가에 이러실 수가 있어요.”

백작의 며느리인 여인은 딸아이가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버티던 눈물을 기어코 쏟아 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작은 침통한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귀족들에게 벌어지는 참사와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기만 했다.

“진정 폐하께서는…….”

처음 그를 황제로 만들겠다 다짐했을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썩은 물을 치우고 황궁을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들겠다고 하던 이였다.

물론 그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뒤로 감춘 속내가 안 보였던 것도 아니니 그 말이 전부 진실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황자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한데 어째서…….

‘폐하, 체드란 황자님께서는 진정한 황제의 재목이 아니겠습니까? 황가에 저런 황자님이 있다는 건 축복이지요.’

그리 말하던 날 황제의 비릿한 웃음을 보고 깨달았어야 했다. 어린 체드란의 출중함이 너무 빛나서, 그래서 눈이 멀어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다음 황제로 지지했기에 체드란이 더욱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음을, 평범했던 황제가 제 아들을 질투했음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무언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체드란의 눈동자가 조금씩 죽어 가고 있을 때부터? 나이는 다를지언정 친우였던 마호세르디 공작이 황제를 조심하라고 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제 아들을 잃은 황후가 지독한 눈빛으로 황제를 저주하며 끌려 나갔을 때부터?

“이 업보를 어찌 감당하려고…….”

백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했다. 평범한 손님방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는 안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창문으로 밖의 참사를 지켜본 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찮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 대공비 전하의 사람들이라 했나.”

“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

란첸트 백작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체드란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모든 것을 관망하기만 한 죄를 감당하려 하는 것이니.

*

전투가 끝난 직후에도 연합군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대승을 했어도 전투는 전투였기에 휴식을 취함이 옳았지만, 이들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사나흘의 행군도 밥 먹듯이 하던 이들이었다. 오히려 전쟁이 너무 시시했다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자연히 연합군의 사기는 더할 나위 없이 높아졌고, 수도로 진군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이 있는 곳부터 수도까지는 이제 하루 거리.

“사기는 최고조이나 전쟁이 길어져서는 안 됩니다.”

나엘라의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부분은 같은 제국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쟁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드는 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너무 강한 이들이기에 더 그랬다.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적이 적처럼 안 보일 테니까.

또한 제국을 지키는 검이란 사명감 아래 평생을 싸워 왔던 이들이다. 그런 자들이 갑자기 칼끝을 돌려 같은 제국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종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일전에 말했던 별동대의 운용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나엘라가 일전에 말했던 의견이다. 한 개 기사단과 정예 부대 몇 사단을 더해 별동대를 만들어 황궁까지 순식간에 점령하는 것.

얘기를 듣던 마호세르디 기사단장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수도군과 남은 중앙 귀족들을 어찌할 건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나엘라가 뒤에 서 있던 수하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곧 커다란 전지를 가져와 펼쳤다. 그 안에는 수도 지도와 성문별 병력, 중앙 귀족들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여론전을 다시 시작한 후, 저희에게 연락을 준 귀족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급보로 온 정보에 의하면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황제가 최악의 선택을 했습니다. 가족들을 끌고 가 인질로 삼았답니다.”

“하!”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중앙 귀족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 그야말로 뒷골목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체드란을 만나러 갔던 날, 황제가 최악의 수를 두는 게 아니냐며 장난식으로 말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행할 줄이야.

“황제의 그릇은 작습니다. 본인이 쌓아 온 죄로 인해 주변을 믿지 못하고 항상 의심하며 살고 있죠. 일종의 편집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은 날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닥쳐 더욱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발점이라 한다면 가장 큰 원인은 나엘라일 것이다. 나엘라가 황후를 처리했을 때부터 황제는 계속 그녀를 의심하고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했다. 그녀의 작은 행동조차 여러 의미를 덧씌워 생각했을 테니 심력이 더욱 소모되었을 터다.

여기에 미로 정원에서의 일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황제로 올라선 후 면전에서 그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이가 과연 있었겠는가.

권위나 우월함에 집착하는 사람이니, 처음으로 자존심에 금이 갔을 것이고 이는 그의 분노에 불을 지폈을 터. 냉철해야 할 판단력을 흐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황제의 사고는 편협해졌을 거고, 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언제든 자신을 배신할 것처럼 느껴졌겠죠.”

우습게도 상황을 그리 만든 것은 본인이었다. 마호세르디, 체드란 전부 그가 한계까지 몰아간 이들이 아닌가.

“자연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썼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악의 선택이었음을 곧 느끼게 될 거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별동대를 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나엘라는 여태 생각해 왔던 것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

지안이 인상을 쓰고는 함께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란첸트 백작의 협조도 얻은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테러 쪽은 서튼이 조장, 클루아조 소공작 쪽은 오언이 조장인 거 맞지?”

서튼과 같이 가기로 한 이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특히나 질색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클루아조 구출조는 그를 데리고 북부 지원군까지 가야 한다. 성격이 독특하다면 클루아조와 마찰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거기다 서튼은 말이 너무 많아서 정보를 흘릴 수도 있고.

그래서 클루아조 구출조에 들어간 이들은 대부분 입이 무거운 이들로 구성되었다.

“오늘 새벽 2시.”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작전을 브리핑했다.

“구출조는 테러가 시작되기 전까지 저택에서 5분 거리 이내로 대기, 그 후 바로 진입.”

이어서 테러조의 작전을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순간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이들이 각자 위치를 잡고 몸을 숨겼다.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서니 다들 준비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온화하고 따듯한 목소리를 연기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지안이 단번에 목소리를 알아채고 벌컥 문을 열자 로브를 눌러쓴 여인이 빠르게 들어왔다. 달칵, 문이 닫히고 지안이 놀라 외쳤다.

“클로에? 황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본궁에서 하녀로 일하다 쫓겨나 다른 궁으로 가게 되었던 클로에. 그녀가 갑자기 이곳에 무슨 일일까.

“톨레로 상단에 갔다가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어.”

“뭐? 톨레로 상단에는 왜?”

말하기 힘든 일인 듯 몇 번 머뭇거리던 그녀는 일행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시녀장님이 친위대에 잡혀가셨어.”

어떻게 보면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나엘라가 황궁에서 도망친 그곳은, 옛날 시녀장의 아이가 도망쳤을 길이니까.

나엘라는 도움을 받은 후 계속해서 도주를 권했으나 그녀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리고…….”

클로에가 힐끔힐끔 누군가의 눈치를 보았다. 그곳엔 하얗게 질린 프리야가 있었다.

“그냥 말해.”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알아야 해결할 가능성이 생긴다. 지안의 재촉에 클로에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자정이 사형 시간이야.”

프리야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다섯 시간.

다른 일을 준비하러 온 이들이기에 현재 남는 손이 없었다. 도와줄 인원 하나 없이 황궁에 들어가 시녀장을 빼 오기엔 역부족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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