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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9)화 (209/220)

208화

“프리야…….”

클로에의 부름에 프리야는 암담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혼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제야 어머니랑 제대로 얘기해 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다른 이들도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시녀장의 관계가 어떤지 알고 있으니까. 결국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대신해 지안이 입을 열었다.

“프리야, 잘 들어.”

울먹임을 참고 있는 눈동자가 지안을 바라보았다. 황실의 고귀한 피를 이어받았으나 누구보다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아이. 제 아비인 황제의 손에 죽을 뻔했던 아이.

그런 프리야에게 겨우 만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품었던 어머니까지 포기하란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톨레로 상단이 오늘 황태자 전하를 구출할 거야.”

“뭐?”

“톨레로 상단에 있는 말리에게 연락이 왔어.”

지안은 데테로아가 감금된 곳을 확인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과, 친위대 몇 명이 톨레로 상단에 협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지금 황제가 최악의 선택을 하는 바람에 너 나 할 것 없이 흔들리고 있어. 친위대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이런 상황이기에 더더욱 클루아조 소공작을 구출하고, 테러를 꼭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

그들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틈을 줄 수 있다. 테러는 분명 숨죽이고 있던 중앙 귀족들을 흔들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이 테러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시작되리라.

클루아조의 구출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북부에 언제 그 손길을 뻗칠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북부 지원군이 들었다면 클루아조가 가서 설득하는 것에도 희망이 생길 것이다. 중앙 귀족과 같은 꼴이 안 되려면 알아서 살길을 도모해야 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번 일을 포기할 수도 없고, 톨레로 상단을 도울 수도 없어.”

프리야의 눈동자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흔들렸다.

“그러니 시녀장님을 구출하는 건 너 혼자 해야 해. 톨레로 상단 사람들과 같이 황궁으로 들어가.”

어려울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지만, 톨레로 상단이 데테로아의 구출일을 오늘로 잡은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시녀장의 처형 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지안은 짐작하고 있었다.

정식 처형으로 시선이 흐려진 틈을 타서 친위대의 협력을 받아 데테로아를 구출하려고 말이다.

그러니 시녀장을 구출하는 건 모두의 이목 속에서 아무런 지원도 없이 혼자 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고.

“황제가 시녀장님을 처형하려는 의도는 뻔해. 황궁 사람들에게 딴생각하지 말라고 본보기도 보일 겸, 그녀를 구출하려는 배신자도 찾아낼 겸일 거야.”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성공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프리야는 억지로나마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같이 못 움직여서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줘. 나야말로 나엘라 님이 시키신 일을 못 하게 됐으니까.”

오랜 친우였던 이를 다신 못 볼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지안은 차마 웃지 못했다. 그러자 먼저 손을 내미는 건 프리야였다.

“다시 보자, 다들.”

마지막 같은 작별 인사였다.

*

“잘하고 있으려나.”

나엘라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약속한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보고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친위대가 협력한다고 하지 않던가.”

체드란이 괜찮을 거라며 다독였지만 마음이 놓일 리가 없다. 프리야가 사지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뛰어들었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지금.

“친위대 중 몇 명이 협력해 준다고 했지만 그건 황태자 구출이지 시녀장 구출이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황제가 주의 깊게 보고 있을 처형식에서 어떻게 시녀장을 빼낸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시녀장을 구하려 누군가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하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대의 기사단을 믿어.”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건 왤까.

처음, 이름도 짓지 못할 기사단을 만들었을 때에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어딜 봐서 기사단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몇몇 이들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공녀 직속인데 기사단이라 말하는 게 더 멋지죠!’

‘그래요. 우리가 평생 가도 어디 기사단 같은 걸 해 볼 수나 있겠어요?’

다른 기사단과는 다르게 여자도 많고 검을 쓰지 않는 자도 많은 기사단.

누군가는 이게 어딜 봐서 기사단이냐고 큰소리치겠지만 나엘라는 결국 기사단이라 말했다. 자신을 위해 평생 충성하며 저를 지켜 주는 이들이 기사가 아니냐면 뭐겠냐고. 만약 우리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그 소리에 모여 있던 이들이 얼마나 환호했던가.

“그래요. 프리야는 잘 해낼 거예요. 다른 이들도요.”

이제는 자신이 믿어야 할 때였다. 눈앞이 캄캄해 보이지 않는 길이라도 자신의 사람들이라면 잘 해낼 것이다.

“비록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지만…….”

밤하늘 너머로 날아간 전서구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번 일이 몇몇 이들에겐 마지막 명령이 되지 않을까.

“별동대는 준비됐어요?”

무심함을 가장하고 묻자 체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까지 함께 진군한 뒤 성벽 바로 앞에서 따로 움직일 별동대. 그들은 단번에 황궁까지 진격할 예정이었다.

“당연하지.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으니 잠깐이라도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정말 몇 시간 안 남았다. 황제는 수도까지 하루쯤 걸릴 거라 예상했겠지만 그건 잠도 자고 휴식도 취하며 움직일 때의 얘기다. 나엘라는 상대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이니 힘내 봐요.”

“그대야말로.”

언젠가 밤하늘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그날처럼 나엘라와 체드란은 그렇게 웃었다. 모든 것을 매듭지을 단 하루를 남기고.

*

프리야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지안에게 전해 들은 은신처를 향해 뛰었다.

탁탁탁, 달음박질 소리가 사람 한 명 없는 고요한 거리를 울렸지만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골목 하나를 돌아가던 프리야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두건을 쓰고 정체를 가린 이들이 사방에 피를 흩뿌린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다가가 맥을 확인하니 쓰러져 있는 이들 모두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내달리는 불안감에 프리야는 은신처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일반 주택가 사이에 있던 은신처였는데 옆 건물의 주민이 빼꼼 창문을 열어보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닫는다.

그녀는 은신처 바로 앞에서 몸을 낮추고 흔적을 확인했다.

바른 걸음걸이에 발자국이 여러 개.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것들이다. 대신 급히 뛰쳐나온 듯한 발자국들이 정신없이 찍혀 있었다. 그 외에는 은신처의 창문, 뒷문을 향해 수상한 발자국들이 늘어서 있다.

‘은신처가 들켰구나.’

황제 또한 기를 쓰고 찾을 테니 언제든 들키리라 생각은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길 바랐는데……!

프리야는 엉금엉금 기어가 창문 옆에 서서 벽에 등을 붙였다. 그러고는 시선만 조금 돌려 안을 바라보았다.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공간에 커튼까지 쳐 있어 안쪽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톨레로 상단과 말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확인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들이 뭔가 잘못됐다면 나엘라에게도 급히 알려 줘야 하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 안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이었어도 남은 잔당들을 위하여 사람을 몇 명 남겨 뒀을 테니까.

안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자니 적이 있을 게 뻔하고.

호흡을 깊게 내쉰 프리야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손을 올렸다. 창문의 잠금장치는 열려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안을 확인하는 수밖에.

창문 손잡이를 잡은 그녀가 살그머니 문을 열려고 했을 때. 탁,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프리야가 바로 몸을 낮추며 손목에 체중을 싣자 상대방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대로 몸을 뒤집은 그녀가 등을 일으켜 상대방의 몸과 맞대고는 팔꿈치를 세게 들어 올렸다. 퍽, 복부를 직통으로 맞은 상대는 몸을 떨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붉어진 상대가 고통을 참고 있었다.

“말리……?”

“쉿……. 그런데 큭, 진짜 아프네.”

프리야에게 팔꿈치를 제대로 강타당했는지 말리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쯤 클루아조의 구출 준비를 하고 있을 오언과 마찬가지로, 말리 역시 기사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내가 쪼끄마한 아가씨를 덮치는 형태로 떨고 있으니 외관상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후…… 일단 가자.”

“어디로?”

“은신처는 습격당했어. 다른 곳으로 갈 거야. 나도 지안에게 연락받고 널 찾으러 왔을 뿐이야.”

습격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프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길을 안내하는 말리를 따라 은신처였던 곳을 힐끔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놈들이 우리를 눈치챘어.”

프리야가 속삭이자 말리도 알고 있다며 말했다.

“아마 우리 둘을 뒤따라올 작정일 거야.”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톨레로 사람들은 무사하고?”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어. 옆 건물에서 미리 알려 줬거든.”

“옆 건물?”

프리야를 보고 급히 창문을 닫던, 은신처의 바로 옆 건물 말인가?

“그 사람들이 신고한 걸 수도 있잖아.”

“기습당할 뻔했을 때 그 사람들이 미리 알려 줬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놈들이 일반 시민을 노렸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허술하게 한 거 아니야. 우리를 직접 부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다.

검을 단련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일반 시민들의 피해는 언제나 찝찝한 일이니까.

“그래서 습격자들은 누군데?”

“감시자들.”

“아직도 열심히 활동 중이었구나.”

감시자들의 기존 은신처가 날아간 후 센텐에 대한 황제의 신용도 떨어졌을 텐데 아직도 활동 중이라니. 확실히 쓸 만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럼 혹시 너희가 황태자 전하를 구출하러 가기로 한 건……?”

프리야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은신처 습격으로 인해 데테로아의 구출을 미룬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당연히 그대로 진행할 거야. 해가 뜨기 직전이 예정 시간이라며.”

적이 방심한 틈을 노려 기습하겠다고 나엘라가 정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테러를 벌이고 클루아조를 구출한 다음이 될 터였다.

“응, 그렇지.”

“그럼 황태자 전하도 지금 구출해야 해. 내일이면 습격 받은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갑자기 데테로아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어떤 기상천외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다행이네.”

프리야가 설핏 웃으며 황궁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클로에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급히 알려 준 것들을 다시 외웠다.

어머니가 잡혀 있는 곳,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의 규모 등.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지만…….

“뭐해?”

말리가 빨리 오라는 듯 재촉했다.

“곧 테러를 일으킬 시간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테러는 새벽 2시에 진행하기로 했는데? 심지어 지금은 자정까지 한 시간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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