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헤르만 반쇼 후작의 커다란 대저택.
그중에서도 후작이 있을 중앙 저택 주변에 화약 가루들을 잔뜩 뿌리고 아예 가루들이 있던 포대까지 두둑이 쌓아 놨다. 저택을 두르듯 중간중간 포대를 놓아주고 길을 만들 듯 기름까지 뿌려 놓으니 꼭 화약으로 저택을 감싼 형태가 되었다.
커다란 원의 형태가 된 길 사이로 유일하게 아무것도 없는 곳,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뒷문 주변만 제외하고는 전부 완성되었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되는 그때였다.
“응? 이게 무슨 기름 냄새야?”
잠을 자던 하인 하나가 눈을 비비며 나오다가 지안과 마주쳤다.
“쉿.”
검지를 들어 올린 그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용인들만 깨워. 전부 이 뒷문으로 도망치라고 해.”
그 말을 들은 하인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안이 성냥을 꺼내는 것을 보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콰앙─!
어디선가 들리는 폭음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얼른 성냥을 마저 그었다. 치직─, 불이 붙은 성냥을 기름에 던지니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금방 불이 붙는다.
“가자.”
함께 왔던 이와 지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 테러 조는 2인 1조로 움직이기에 몸을 빼는 건 금방이었다. 비록 전쟁 분위기 때문에 후작가의 경비가 강화됐다지만, 사전에 전해 들은 사각지대를 통해 몰래 진입한 상태였다.
얼른 저택에서 떨어져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그들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저 멀리서 또 다른 저택이 부서지는지 콰과광─, 폭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얼마 후.
콰왕─!
바로 근처에서 하늘을 찢어 버릴 듯한 폭음이 들려오더니 그들의 얼굴로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이로써 헤르만 반쇼 후작의 저택까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우왕좌왕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빠져나가자.”
지안과 일행이 몰려오는 경비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담장까지 도착했고, 그들은 다리에 더 힘을 줘 훌쩍 담을 넘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재빨리 커다란 대자보를 꺼내 붙였다.
“여기다 하나 붙이면 나머지 사람들이 골목마다 알아서 붙여 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대자보를 마저 붙이는데 누군가 한 명이 훌쩍 담을 넘어 착지했다.
“오랜만이네.”
마호세르디 소속 첩자 중 하나로, 헤르만 반쇼 후작의 집에서 하녀로 활동하던 첩자였다. 지안과도 안면이 있었고. 그가 바로 화약 가루 포대들을 숨겨 주고 이번 폭발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나도 마호세르디로 돌아가기로 했어. 드디어 고향이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일이 끝났으면 돌아가자며 고갯짓을 했다.
“지긋지긋했겠네.”
“첩자 일이라고 쉬운 줄 알아? 너도 같이 교육받았으니 알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린 지안이 점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주변을 확인하곤 달리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속도를 맞춰 달리던 이가 물었다.
“그런데 대자보에는 뭐라고 쓴 거야?”
“내용? 별거 없어.”
지안에게는 별거 아니지만 아마 대자보를 확인한 이들은 난리가 날 터. 대자보의 내용을 생각하던 그녀는 씨익 웃었다.
같은 귀족임에도 황제의 편에 붙어 다른 귀족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팔아먹은 센텐티아의 일원들을 고발한다.
헤르만 반쇼, 럼바논 우사, 테너 세레노피, 도미니안 그란체, 바실리카 캄푸스, 에반 닉홀스.
이 6인은 세상을 지배한다는 뜻의 센텐티아의 일원으로, 귀족들의 약점을 황제에게 고해 바쳤다. 그동안 거머리처럼 자신을 믿었던 이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부와 명예를 쌓으니 평안했는가.
이들이 같은 귀족이라는 것이 부끄럽기에 우리, 연합군 소속 중앙 귀족들은 그들을 단죄하려 한다.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여, 평생을 하늘조차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 숙여 살 텐가. 아무것도 잃지 않는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이 대자보의 내용은 금방 퍼져 나갈 것이다. 밤늦은 시간이었으나 상관없다. 지금 중앙 귀족 중에는 마음 놓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이가 없을 테니까. 거기다 이런 큰 소란도 일어났으니 당장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지.
그때가 되면 뒤늦게 수도군이 달려와 대자보를 떼어 내도 소식이 퍼진 다음일 것이다.
귀족들은 밤새 잠들지 못한 채 생각할 테고 아침이 오기 전, 연합군이 도착한 뒤엔 행동으로 반응이 보일 테지.
“어디로 가면 돼?”
후작가의 첩자로 있던 하녀가 묻자 지안은 저택 하나를 가리켰다.
“란첸트 백작저.”
“오, 황제파 아니야? 우리 나엘라 님의 능력이란.”
“체드란 대공께서 연결해 주신 곳이야.”
“그런 남편을 둔 나엘라 님의 능력도 대단한 거지. 원래 이런 이야기는 지안, 네가 해야 하는 건데.”
키득키득 웃는 그녀와 함께 지안은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보는 눈 없이 저택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도착한 저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나엘라 님?”
보라색 눈동자를 빛낸 그녀가 씨익 웃었다.
*
콰앙─ 콰과광─!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대기하던 이들이 하늘을 향해 날름거리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화려하네.”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말하자, 다들 답은 안 했지만 속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긴장이 가득한 수도에서 저택 여섯 곳이 불타는 광경이란 화려하기 그지없으니까.
“귀족들의 거주 구역이 일반 시민들의 밀집 지역과 멀어서 다행이지.”
“어차피 우리가 흔들 사람들도 귀족인데 뭘.”
“어쨌든 슬슬 시간 됐다.”
테러 조가 화려하게 일을 쳐 줬으니 이제는 클루아조를 구출할 시간이었다. 조장이 된 오언과 조원들은 다들 각자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프리야는 말리랑 만났으려나.”
누구 한 명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다들 마호세르디에서 만나 함께 생활했으니 정이 쌓이는 건 당연했다. 프리야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프리야를 도와주려고 일을 앞당긴 거잖아.”
이들이 좀 더 빨리 일을 벌이면 황제도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파악하기 위해 시녀장의 처형 쪽으론 신경을 덜 쓰길 바라야지.
“인력을 뺄 수밖에 없을 거야. 테러 조는 수도를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황제는 이제 수도 전체를 뒤져야 할 테니까.”
“그래, 우리가 문제야. 수도 검문이 강화될 텐데 클루아조 소공작을 어떻게 내보낼 거냐고.”
“근데 사실 소공작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어차피 마지막 결전도 앞당겼다며.”
“혹시 모르니까. 나엘라 님 성격 알잖아.”
“크윽, 안 할 수도 있는 일인데 아쉽다.”
무기를 점검하고 로브를 집어 던진 이들은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저택은 한눈에 봐도 경비가 삼엄했다. 거기다 순찰 경로나 보초 인원, 또는 얼마나 많은 수의 호위들이 지키고 있는지 정보도 얻지 못했다. 첩자로 들어간 이가 감시자들의 존재를 알고 극도로 조심했기 때문이었다.
“가자.”
오언이 신호하자 한 명씩 아이안 공작가의 저택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클루아조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창문을 여니 곳곳에서 불타는 저택들이 보였다. 심지어 한 곳은 클루아조가 있는 곳과도 가까웠다.
“와…… 미치겠네.”
일을 벌여도 너무 크게 벌이잖아? 새삼 나엘라의 스케일을 실감했달까.
어이없는 미소를 짓던 클루아조는 우르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문제가 생겼으니 대피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피? 어디로?”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제에게 소속된 기사들이라 클루아조에게 충성을 보일 필요는 없다지만 너무한 대우가 아닌가. 다시 어딘가로 끌려가게 생겼는데 알려 주지도 않는다니.
“그래. 가지.”
클루아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괜히 건드려 봤자 개처럼 끌려가기밖에 더하겠나.
“그나저나 걱정이네.”
짝사랑 상대가 약속한 건 오늘 밤 새벽 2시. 자신을 만나러 오거나 빼내려면 적어도 그 시간과 엇비슷하게 일을 쳤어야 했다. 테러를 일으킨 건 아무래도 시선을 돌리려 한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이르다. 아마 모종의 이유로 일정이 당겨진 것 같았다.
“이렇게 끌려가는 것까진 예상 못 했으려나.”
‘그’ 대공비가 이를 예상치 못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진입하기가 마땅치 않을 텐데 무슨 생각인 걸까.
“이쪽입니다.”
기사들은 클루아조가 뭐라 중얼거리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더불어 클루아조도 걸음에 속도를 내야 했다.
조용하던 저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한 명씩 나왔으나, 기사들을 보고는 금방 다시 들어가 버렸다.
“쓰읍, 생각을 해 봐야 해.”
클루아조는 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머리를 굴렸다. 나엘라는 이 삼엄한 감시를 어떻게 뚫으려고 했을까. 기사들이 예민해질 게 뻔한데 테러는 왜 일으킨 걸까.
황제에게 클루아조의 가치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물단지에 가깝다. 제거하자니 아직 북부에서 아이안 공작가의 영향력을 다 지우지도 못한 데다 공작가가 내놓은 것들을 제대로 흡수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물류권만 하더라도 인수인계가 꼭 필요하기에 아직 자신을 버릴 만할 시기가 아니다. 그러니 저를 어떻게든 살려 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테러가 벌어진다면 자신을 보호해야 하니 아마도…….
“딱 지금처럼 대피하거나 경비를 강화하겠지.”
하지만 경비를 강화하기엔 황제의 기사가 그리 넉넉지 않다. 그렇다면 대피가 정답인데…….
나엘라가 그 정도까지 예상했다면 클루아조를 어떻게 구출하려 하는 걸까.
“제 말에 함께 탈 겁니다.”
기사 하나가 뒤뜰에 매어져 있는 말 위로 훌쩍 올랐다. 그러더니 클루아조에게 함께 타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랑 같이 타는 건 별로인데.”
클루아조가 싫다는 듯 말하자 기사의 눈이 매서워졌다. 당장 협조하지 않으면 진짜 묶어서 데려갈 기세라 클루아조는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도 뒤따라 전부 말에 오르자 기사가 외쳤다.
“움직인다.”
말을 박차고 뒷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니 경비병들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 같으면 딱 지금을 노리겠다.”
클루아조의 중얼거림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한 모양인지 기사가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사는 뭐라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뒷문 바로 앞에 달빛에 어스름히 비치는 줄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들의 발목쯤에 딱 걸릴 만한.
이히히힝— 쿠당탕탕─.
“아악─!”
“무슨 일인가!”
말들이 줄에 걸려 쓰러지고 기사들이 바닥을 굴렀다. 얼떨결에 같이 구른 클루아조가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간신히 줄을 발견하고 낙법을 했지만, 충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대비 없이 굴러떨어진 일부 기사들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이들이 검을 들고는 망설임 없이 기사들의 목을 찔렀다.
“커억─!”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기사들을 상대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날아다녔다. 그중 한 명은 클루아조에게 다가와 상태를 확인했다.
“클루아조 소공작님 맞습니까?”
“어우……. 꼭 이렇게 해야 했어?”
“일어나십시오. 이대로 북부 지원군이 있는 곳까지 달려야 하니.”
“뭐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혹시나 했던 일이 눈앞에 닥치자 클루아조는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