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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11)화 (211/220)

210화

클루아조 소공작 구출 완료. 북쪽 성문 대기 중. 경계 강화로 수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난항 예상.

간략한 보고를 읽은 나엘라는 쪽지를 벽난로로 던져 버렸다.

클루아조를 성문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계획이 있으니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다.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민하는 그녀에게 지안이 말을 걸었다.

“별동대가 온 건가요?”

“아니. 별동대는 내일 약속한 시간에 따로 성문을 뚫을 거야.”

“그럼 무슨 일로 오셨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나엘라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인질 구출.”

중앙 귀족들의 가족들이 억류된 곳을 쳐들어가 구해 와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많은 이들이 연합군을 도울 테니까.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은 서튼이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 저희가 그들을 구출해서 역으로 인질을 잡는 거죠? 그럼 중앙 귀족들이 전부 우리 편이 될 거 아니에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쓰레기를 보는 시선이 이어졌다. 나엘라조차 ‘으으’ 신음을 뱉으며 서튼에게 떨어지려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황제가 되면 귀족들이 퍽이나 협력하겠다.”

하여튼, 어찌 저런 생각을 하는지. 동네 시정잡배는 황제가 아니라 서튼이다. 아, 원래도 얼추 비슷한 양아치는 맞다.

그때 누군가 이들이 있던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란첸트 백작입니다.”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른 이가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곳엔 완전 무장을 한 백작이 보였다. 나엘라나 다른 이들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공비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작……. 대체 그 모습은…….”

비록 나엘라보다 계급이 낮다고는 하나 엄연히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였고, 거기다 마호세르디만큼 대대로 황제를 섬겼던 집안이다. 그런 이가 이 밤중에 갑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비록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나 나엘라는 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자신을 돕겠다 말하던 백작이 인상 깊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사람을 물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들도 대공비 전하의 사람들이라면 상관없습니다.”

문을 닫고 들어온 백작에게서 무언가를 각오한 자의 기세가 느껴졌다. 이 저택에서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그가 갑옷까지 챙겨 입은 연유가 무엇일까.

곧 그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클루아조 소공작을 구출하여 수도 밖으로 도주시킨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떻게 도주시킬 생각이십니까.”

“중앙 귀족 중 저희 편이 된 가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병력을 성문 쪽으로 보내 주기로 했지요.”

이것도 계획 중 하나였다. 몇몇 가문이 성문의 수도군을 상대하는 동안 클루아조를 성도 밖으로 내보낸다. 더불어 중앙 귀족 중 반역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알게 하여 혼란을 가중할 계획이었다.

단순히 같은 중앙 귀족 사이에서 연합군에 붙은 이가 있다는 걸 아는 것과 직접적인 가문 이름이 나와 실체를 확인하는 건 체감이 다른 법이다. 중앙 귀족을 더욱 흔들기 위해 짠 계획이었다.

“그걸 저희 가문에서 하고 싶습니다.”

“백작…….”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연합군이 당도하기까지 시간도 꽤 남았을 테고요.”

“백작의 병력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클루아조 소공작과 함께 성문 밖으로 도주할 겁니다. 북부 지원군까지 함께 갈 예정입니다.”

나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되면 클루아조의 탈출은 물론이거나와, 북부 지원군에 도착하는 것까지도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거기다 란첸트 백작이 함께한다면 북부 지원군이 클루아조를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쌓아 온 명예가 방패가 될 테니까.

“그러면 백작의 손녀는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대공비 전하께서 오신 거 아닙니까.”

백작은 오랜 세월 쌓은 경험이 거짓은 아니라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나엘라가 왜 이곳에 왔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주를 돕기로 한 중앙 귀족들에게도 같은 것을 약속했다.

“거기다 제가 나서면 더욱 효과가 좋을 겁니다. 황제에게 충성해 온 란첸트 백작가가 배신한 셈이니까요. 중앙 귀족들은 더는 황제에게 미래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분명, 란첸트 백작의 배신을 확인하는 순간 중앙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연합군에 붙으리라.

소문만 빠르게 퍼진다면 새벽 총공세 때도 수도군을 쉬이 상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궁으로 진격하는 것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중앙 귀족들이 대신 수도군을 상대하거나, 연합군을 막는 자들도 줄어들 터.

잠시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문을 지키는 이들이 많아질 겁니다.”

“준비는 이곳에 오기 전에 끝냈습니다. 기사단과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지요.”

행동력 하나는 남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고 결정을 내린 후엔 뒤돌아보지 않는 자 같았다.

이런 이들이 곁에 있었기에 지금껏 황제가 버틴 거겠지. 그래서 자신들은 이리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고. 황제의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황제가 충신들을 믿고 좋은 정책들만 펼쳤어도 제국은 더없이 평화로웠겠네요.”

나엘라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하자 백작은 의미 없는 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길 바랐기에 황제를 옹립할 당시 도왔었지요. 그러나 대공 전하께서 황궁을 나가신 이후론 매일 후회하며 살았습니다. 후회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반란은 황제가 자신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된 순간 예정된 것이 아니었을까.

황제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자들, 또는 소중한 사람들을 인질로 붙잡힌 자들, 그 추잡한 의심과 탐욕에 상처받은 자들이 모여 반란이 완성되는 중이니.

나엘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꼭 다시 뵙길 바랍니다.”

“당연한 말씀을. 제 손으로 추대한 군주이니, 제 손으로 마무리 지을 때까진 눈을 감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회한이 가득 담긴 백작의 눈이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제 아들이 친위대인 건 아시겠지요.”

“들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그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만, 손녀는 꼭 부탁드립니다.”

백작의 아들은 스스로 친위대가 되는 것을, 황제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 연합군을 상대하다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는 삶은 아니리라.

그러나 손녀는 아니다. 어떤 선택도 한 적 없는 아이가 다른 이의 죄로 인해 죽게 된다면 백작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꼭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악수를 한 백작이 등을 돌려 문을 나섰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대?”

클루아조의 물음에 오언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입니다. 소공작께서도 준비하십시오.”

작전은 바뀌지 않았지만, 작전을 실행할 가문이 바뀌었다는 것을 방금 전해 들었다. 원래 나서기로 했던 중앙 귀족들은 대기하고, 다른 가문이 대신 오기로 했다.

“그래서 어떤 가문이 오기로 했는데?”

클루아조에게는 어떤 가문인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질문이 그치질 않았다. 오히려 왜 이리 입이 무겁냐며 타박까지 들었다. 나엘라의 명만 아니었으면 진짜 상대하기 싫은 귀족이었다.

“란첸트 백작가입니다.”

어차피 시간은 다 됐고, 곧 움직여야 하기에 먹고 떨어지란 심정으로 말했다. 놀랄 줄 알았던 클루아조는 되레 비웃음을 걸치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란첸트 백작은 뼛속까지 황제의 충신이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꼽자면 란첸트 백작일걸.”

진실을 말해 줘도 믿질 않으니 이를 어찌할까. 살며시 미간을 좁힌 오언은 괜히 밉상인 클루아조에게 말을 툭 뱉었다.

“나엘라 님께서 소공작님을 북부 지원군 앞까지만 모셔다드리고 철수하라 하셨습니다.”

“뭐……? 나 혼자 두고? 그러다 나 죽으면?”

“저희가 같이 가도 그들이 적대한다면 다 위험할 뿐이죠.”

사실 란첸트 백작이 함께 가기로 했지만,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바뀌기 전의 작전은 맞으니까.

“그럼 나 안 할래.”

“안 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 자격도 없다고.”

장난 같은 말이지만 나엘라가 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다. 이 전쟁 통에 클루아조 하나 죽었다고 난리가 날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젠장…….”

클루아조가 신경질을 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크지 않았으나, 점점 땅을 울릴 정도의 진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지키던 이들 가운데도 소란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횃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성벽 위에서 분주히 오갔다. 그러다 누군가 버럭 외쳤다.

“란첸트 백작가의 기사들이다! 란첸트 백작가가 반란에 가담했다!”

“당장 저들을 막아라! 궁병!”

란첸트 백작가의 배신을 열렬히 떠들어 대니 우리야 좋았다. 어느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백작가의 기사들은 말에 올라탄 채 왼손에는 방패를, 오른손에는 창을 잡고 있었다.

“뭐야, 진짜 란첸트 백작가야?”

클루아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오언은 그런 그의 등을 눌러 숙이게 했다. 저들이 맞붙는 순간 그들도 움직여야 한다. 성문을 연 후 성벽 위 궁병들을 피해 도주해야 했다.

“전원! 화살 장전!”

성문을 지키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궁병들을 대기시키고 화살 장전을 지시했다. 평소라면 성문 밖을 향하던 활이 오늘은 성문 안으로 조준되었다.

성문 근처는 건물이 없다. 대로만 존재하는 공터이니 이대로 화살이 쏟아진다면 백작의 기사단이 피해를 볼 건 뻔한 상황.

어느새 화살 범위 안쪽으로 수도군들도 집결하기 시작했다. 황제도 바보는 아니니 성문을 뚫을 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새 대비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때 기사단의 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오던 기사들은 점점 대열을 좁히더니 마치 송곳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화살의 범위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는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로 올리고 창을 굳게 잡았다.

적진 한가운데를 목표로 잡고 일점 돌격하여 대열을 뚫어 버리는 랜스 차지(Lance Charge). 안 그래도 속도가 빠른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적들을 뚫고 지나가기 위한 돌진 기술이었다.

“저걸 여기서 볼 줄이야.”

클루아조도 랜스 차지를 알아봤는지 감탄을 연발했다.

“발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화살이 우수수 방패를 때리며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란첸트 백작가의 기사단과 수도군이 맞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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