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최후의 발악
211화
“막아! 막아야 한다!”
“반란군이다! 모두 죽여라!”
수도군이 외치는 소리가 절박하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의미했다.
궁수들의 화살을 모두 막아 내며 돌진한 란첸트 백작가의 기사단은 크게 반원을 그리며 수도군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대열을 망가트리고 전장을 종횡무진한 것이다.
앞과 뒤를 동시에 뚫려 수도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란첸트 백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마대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추가 지원 병력 선두에 섰다.
수도군은 당장 자신들을 농락하는 기마대를 상대하며 다가오는 병력까지 막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과 마주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기사단을 보며 궁수들이 활에 화살을 건 채 긴장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금방이라도 돌격할 것 같던 란첸트 백작은 성문 위 궁수들의 화살 범위 직전에서 멈춰 섰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양측의 군대가 맞부딪칠 듯 일촉즉발의 긴장이 전장에 내리깔렸다.
철거덕거리는 소음과 말의 호흡만이 울리는 어둠 속에서 클루아조와 나엘라의 기사단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틈을 타 성벽 위에 파고들자 잔뜩 조여진 공기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활을 쏠 듯이 긴장한 궁병들 사이로 성문을 담당하는 지휘관도 보였다.
이런 시대에 성문 담당관이라고 한다면 좌천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연합군이 들고일어나며 바짝 군기가 들었을지언정, 좌천된 인물의 역량이 높을 리가 만무했다.
성문으로 오르는 계단에 몇 안 되는 병사를 세워 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어째 이렇게 제대로 된 인물이 하나도 없는지.
“준비.”
오언이 소리 죽여 전하는 말에 뒤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이들도 검을 고쳐 쥐었다.
어차피 이 많은 궁병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들의 역할은 지휘관을 흔들어 궁수들이 백작가의 기사들을 노리지 못하게 유도하는 것.
“가자.”
나엘라의 기사들이 성벽 위를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한편 그 시각.
북쪽 성문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황궁에 보고되었다.
센텐의 일원들이 모두 테러를 당한 마당에 성문까지 난리가 났으니 소란이 일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거기다 상대가 그 란첸트 백작가다. 황궁을 지키는 이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황제의 압박에 다들 숨을 죽이고 있을 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암암리에 전장의 상황을 공유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가장 동요시킨 것은 다른 일이었다. 평생을 황가에 충성해 온 시녀장의 처형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딸인 프리야한테는 매정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그녀는 황궁 사용인들에게는 인망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본궁을 관리하는 동안 은연중 도움을 받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동요는 친위대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숨어들던 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톨레로 상단의 호위 병력 중에도 가장 정예라고 꼽히는 이들과 함께 잠입한 말리는 프리야를 힐끔 보았다.
“괜찮겠어?”
“당연하지.”
그녀는 오늘 황궁의 하녀들이 입는 옷을 갖춰 입고 머리까지 단정히 묶었다.
“나도 돕기는 어려울 것 같아. 황태자 전하의 구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
“정말 괜찮아.”
프리야의 눈동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이 말리의 눈에는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보여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다른 친위대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프리야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약속 장소는 황궁에서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을 만큼 구석진 건물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불빛 한 점 없는 공간에 친위대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안내해 준 친위대까지 벌써 네 명이나 이 일에 가담한 것이다.
“그대들이 톨레로 상단의 사람들인가.”
코더 우부라는 직접 오지 못했다. 그는 이런 임무에 어울릴 만한 무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말리가 임시로 잠입조를 지휘하기로 했다.
“네. 맞습니다.”
말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금 말을 걸었던 기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친위대 중 가장 힘이 있는 자인지 다들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연락을 받기로는 대공비 전하의 사람도 함께 온다고 했는데, 혹시 그대인가.”
당장 데테로아의 구출을 앞둔 시점이니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를 질문이지만 말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다른 건 아니고 중앙 귀족들의 가족이 폐하께 잡혀갔다는 것은 아는가? 대공 전하나 황태자 전하께서 어쩔 수 없이 황제의 편에 선 귀족들의 처우를 어떻게 하실지 궁금하여…….”
말리는 이 기사가 왜 그들을 도왔는지 눈치챘다.
인질이 잡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편에 선 가족들을 염려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보고자 움직인 것이리라. 자신들의 도움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인질을 구출할 예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리는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자신들을 도운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이들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 당장 자신들을 돕더라도, 이 친위대들 역시 가족의 생사가 걸리면 정보를 전부 토설할 수도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다들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보안이 가장 중요할 때였다.
그들의 간절함은 이해하지만, 어차피 아침이 오기 전에 구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족을 이만큼 걱정하고 데테로아의 구출에 도움을 준 상대이니 힌트 정도는 줘도 되지 않을까.
얼굴빛이 가라앉은 기사에게 말리가 물었다.
“혹시 가문이 어떻게 되십니까?”
“란첸트 백작가라네.”
“예? 란첸트 백작가요?”
그럼 이 친위대 기사가 그 란첸트 백작의 장남이란 말인가.
“……설마 아직 모르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란첸트 백작님께서 연합군에 가담하셨습니다.”
기사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혼란이 여실히 느껴졌다.
“지금 북쪽 성문에서 수도군과 전투를 벌이고 계십니다.”
기사는 신음을 삼켰다.
“아버님이라면 그러실 만하지. 잠깐, 그럼 폐하께서 딸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괜찮으실 겁니다.”
말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자 함께 있던 다른 기사들도 제 가문을 대며 물었다. 심지어 한 사람은 이미 연합군과 전투를 치른 가문이었다.
“도르만 후작가일세. 아버님께서 프로일리 평야 전투의 지휘관이었지. 염치없는 것은 알고 있네. 그때의 출전 가문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아버님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여 물어보네. 혹시…….”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 수장의 생사를 알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나 적이라면 더더욱.
그걸 친위대가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제 아비를 죽였을지 모르는 상대에게 물어볼 정도로 절박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말리의 눈빛을 알았는지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계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네. 다만, 나도 란첸트 경처럼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어 방법을 찾고자 했을 뿐이야.”
황제가 저지른 짓은 무엇 하나 옹호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도르만가에 한 짓은 특히나 도가 지나쳤다.
도르만 후작가의 가주는 억지로 전쟁의 지휘관이 된 데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가족들까지 끌고 갔단 말인가?
생판 남인 말리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다.
“도르만 후작님은 노헤스카 대공령에 포로로 붙잡혀 계십니다.”
은원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나엘라는 적의 지휘관이었던 도르만 후작을 살려 두었다.
그것이 후에 어떻게 돌아올지는 알 수 없으나, 상대가 크게 안도하는 것만으로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리는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평생 감사를 드려도 모자라겠군. 시간이 지체되고 있으니 어서 움직이세.”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황태자의 구출을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가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야가 말리에게 인사를 전했다.
“나는 이만 가 볼게.”
그 덕에 친위대의 관심도 그녀에게로 향했다.
“하녀복? 혹시 본궁에 잠입하려는 거면 소용없을 걸세. 새로운 얼굴이라면 아예 출입시키지 않으니까.”
“본궁 잠입은 아닙니다.”
“그럼 설마, 시녀장 쪽인가?”
“네. 맞습니다.”
순간 친위대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말리와 프리야의 눈에 띄었다. 혹 시녀장 처형과 관련된 정보라도 있는 걸까.
“만약 시녀장을 구출하러 가는 거라면 내가 말하는 곳으로 가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본궁 하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걸세. 시녀장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눈치였네.”
친위대에서 낯선 이름과 장소가 나오자 프리야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적게나마 희망이라도 본 듯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프리야가 허리를 푹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 감사할 것 없네. 솔직히 본궁 하녀들만으론 가망성의 거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다른 이가 간다면 조금 더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움직여야 한다.
친위대와 다른 이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도 프리야는 연신 감사를 전했다.
“무운을 빌겠네.”
이제부터는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일 터.
그렇게 인사를 나눈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갔다.
*
중앙 귀족들의 가족이 끌려간 곳은 당연히 황궁 안이었다.
계속된 패배로 황제는 병력을 분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안방으로 인질을 끌고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인질 구출 작전은 연합군이 황도 앞에서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데테로아도 구출한 것은 물론, 갑자기 나타난 연합군에 온 신경이 쏠릴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모든 시선이 궁에 쏠린 지금보단 친위대나 수도군의 피로도가 최고치를 찍었을 때 움직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사람은 이성적으론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것을 택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나엘라 님, 준비됐습니다.”
일전에 나엘라가 탈출했던 황궁 뒷산의 절벽. 그곳에 팔심이 약한 여자들도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간이 계단이 설치되고 있었다.
“적어도 동굴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을 거예요.”
구출된 인질들이 나엘라가 숨어 있던 동굴까지는 무사히 도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예정대로라면 황제가 인질들을 뒤쫓을 시간이 부족해야 했다. 수도 앞에 나타난 연합군에서 체드란이 별동대를 따로 이끌며 황궁까지 진격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나 구출 시간이 당겨진 탓에 인질들의 안전이 위험해졌다.
황제는 이곳에 동굴이 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엘라가 도주했을 당시 이 절벽을 싹 확인했을 테니까.
당장은 이곳을 순찰하거나 지키는 인원이 없다지만, 인질들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거기다 지금쯤이면 황제에게 란첸트 백작의 배신과 클루아조의 도주 사실까지 모두 들어갔을 터. 비열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황제이니 곧 인질들에게로 눈을 돌릴 것이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야 데테로아와 시녀장의 구출 가능성이 커진다.
“인질, 황태자, 시녀장까지 셋이네.”
그것도 동시에, 황제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한다.
동굴의 존재를 인지한 황제, 연합군이 당도하기까지 한참 남은 시간.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