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13)화 (213/220)

212화

요즘 들어 황제는 점점 무표정을 짓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 연합군이 들고일어났을 초기만 해도 온종일 분노에 가득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축 가라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 황제를 보좌하는 이들은 죽을 맛이었다. 아니, 죽음이 코앞에서 달랑거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분노하던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란첸트 백작이 연합군을 도왔다라……. 그래서 북쪽 성문은 뚫렸나?”

섬뜩하리만큼 평온한 어조에 보좌관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본인이 성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고 보고받은 것을 전달할 뿐이면서 보좌관은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황제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번 되물었을 뿐.

“북쪽 성문이 뚫렸느냐 물었네.”

“예? 예! 란첸트 백작은 성문이 열리자 본인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원군을 노리고 향한 것 같습니다. 클루아조 소공작도 아마 그때 같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클루아조의 갑작스러운 도주.

이 와중에 그가 사라졌다는 건 지원군 쪽에 무언가를 시도하려 한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북쪽 지원 가문들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연합군은 언제쯤 당도할 예정이라던가?”

“아마 내일 점심은 지나야 할 것입니다. 수시로 정찰을 내보내고 있으나 모두 돌아오지 않아서 정확한 확인은 힘듭니다.”

“연합군 측에서 대자보를 붙였다지. 귀족들의 반응은?”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은 포착되었으나, 경계가 심해진 터라 감시자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보고가 들어가면 응당 분노가 쏟아져야 하는데도 황제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피식 웃기까지 했다.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던 황제가 고요히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옳았지 않은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배신을 염두에 뒀어야 했어.”

본인이 자초한 결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언제든 자신을 배신할 자들에게 제대로 목줄 채우지 않은 탓이라고, 황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진즉 행동에 옮겼어야 했거늘 신중을 기하라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그리 말했던 센텐의 일원들은 현재 살아 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헤르만 혼자 대피해 본궁에 머물고 있었을 뿐.

나머지들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면 배신일 게 뻔했다. 황제에게는 이미 눈 밖에 났고 연합군이 승리할 것 같으니 몸을 내뺀 것이다.

“친위대를 불러들여라.”

“예? 친위대라면 이미 본궁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시녀장의 처형을 맡은 자들과 귀족들의 가족을 붙잡고 있는 이들까지 전부 불러들이란 말이다. 또한 남은 수도군까지 모두 불러들여라.”

“그, 그럼 성문은 어쩌시려 그러십니까?”

그나마 수도에서 연합군을 막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을 꼽자면 성벽과 성문들이었다. 제대로 수성을 준비하고 싸운다면 누가 수도를 뚫을 것인가. 고작 버티는 게 한계일 수는 있더라도, 그리 쉽게 뚫리지는 않을 터였다.

“중앙 귀족에서 배신자가 또 나온다면 앞과 뒤를 동시에 상대할 뿐이다. 그럴 바엔 전부 황궁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낫지.”

차라리 황궁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겠다는 말이었다. 상대가 보통 전력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해 주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명령을 전하겠나이다.”

보좌관도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사람으로 오랜 시간 지내 온 이상 이제 와서 배신을 할 수도 없었다. 과연 수십 년간 황제의 보좌관이었던 자신의 목숨을 연합군이 살려 줄까. 그러니 황제의 명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녀장과 인질들은 어떻게 할까요?”

보좌관은 그렇게 말하고도 순간 덜컥 겁을 먹었다. 자신도 모르게 인질이라 말한 것 때문이었다. 명목상으로 황제가 그들을 데려온 건 보호였으니, 황제의 숨겨진 추악함을 그대로 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질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들 중에서 수준 있는 기사단을 소지한 가문만 추리고 관련자들만 끌고 와라. 가족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도 연합군에 붙을지는 두고 봐야지.”

“그럼 시녀장은 그대로 처형할까요?”

“아니, 시녀장은 좋은 패가 되겠지. 시녀장도 끌고 와라.”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마치 어떤 패가 더 좋을지 고르는 것처럼 굴었다.

보좌관은 그 순간 무궁한 역사를 자랑하던 제국의 황궁에서 인질극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대 황제의 업적들 속 가장 추잡한 불명예를 남길 그런 인질극이.

“명한 대로 따르겠나이다.”

보좌관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

“경계가 너무 삼엄하네요.”

아마 이때까지의 경계 중 가장 삼엄할 터였다.

지금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순순히 최후를 맞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할 터.

다만 어떤 수를 쓸 것인지 예측이 안 되는지라 최대한 변수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황궁에 붙잡힌 인질들을 구출해 중앙 귀족들이 황제에게 붙을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고.

“자정까지 30분 전입니다.”

나엘라가 검을 꺼내고 자세를 낮추자 다른 이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만으로 이 많은 감시를 뚫고 인질들을 구하리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다른 묘수를 찾아야 했다. 예를 들면 인질들이 머무는 궁의 호위병이나 친위대를 모조리 끌고 나올 만한 일을.

“20분 전에 시작하자.”

뒷산에서 천천히 내려온 이들은 목표가 훤히 보이는 곳에 하나둘 몸을 숨겼다. 숨죽이는 와중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시간을 벌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바로 인질로 위장한 이들이 탈출하는 것처럼 꾸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고, 탈출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인질들 역시 동요할 테니 황궁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럼 인질로 위장했던 이들은 탈출극을 벌여 도망치고, 그사이에 남은 자들이 인질들을 구출할 계획이었다.

물론 건물 중 일부에는 불도 지를 예정이었다. 황궁에서 갑자기 불이 나면 순간적으로 시선이 집중될 테니, 그때만큼은 다른 이들을 구출하고 있을 아군들에게 도움이 되겠지.

“맨날 불만 지르고 다니는 느낌이네.”

“방화범이네요.”

사람들은 대공비가 방화범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그러나 불만큼 눈에 확 띄는 효과적인 수단도 없었다.

“시간 됐습니다.”

예정됐던 시간이 도래하고 나엘라는 작은 손거울을 들어 창문 하나를 비췄다. 반사된 빛이 창문에 아른거리자 누군가 커튼을 걷고 나와 시선을 보냈다. 이제 인질로 위장할 자들까지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바로 시작하라는 신호만 보내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건물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친위대들이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계획은 시작도 안 했거늘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고 주위를 날카롭게 살펴보니 몇몇 이들이 호위병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친위대가 황급히 건물을 나서는 걸 보면서도 그들을 막거나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내막을 알고 있는 자들인 것 같았다.

나엘라는 필요한 정보라는 생각에 장검을 집어넣고 작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검집도 벗기지 않은 장검을 역수로 쥔 채 바닥을 기듯이 다가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은 세 명이니 제 뒤에 두 명 더 따라오라 지시하고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이동했다.

“─── ─── 그래서 ──”

“그럼 ── 지금 당장── ───”

저들이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고 있기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들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엘라는 뒤에 있는 이들에게 각자 한 명씩 상대해 단번에 제압하라고 눈짓했다. 그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 그녀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단번에 땅을 박찼다.

그러자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크게 뜨는 것까지 보였다. 그들이 입을 벌려 다른 호위병들을 부르면 큰일 나는 상황이기에 나엘라는 단번에 상대의 목을 휘감고 뛰어가던 속도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땅에 처박았다.

상대는 헤드록에 걸린 상태로 그녀의 무게와 회전력을 감당하지 못해 쓰러졌고, 곧 코앞에 단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쉿.”

여자로서 남자보다 작은 체구와 적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할 때,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게를 이용하는 방식과 속도였다. 나엘라는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쓰고 있으니 호위병 제압 정도야 너무 쉬웠다.

그녀가 여전히 제게 헤드록이 걸린 상대를 두고 다른 쪽을 보니 이미 그쪽도 모두 제압된 상태였다. 나엘라는 시간도 별로 안 남은 마당에 길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친위대는 왜 사라졌지?”

“윽……. 누구─!”

퍼억.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나엘라는 가차 없이 응징을 가했다. 그녀의 발길질에 명치를 얻어맞은 이가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말할 생각은 없겠지?”

황궁 호위병씩이나 되는 상대고, 기밀 정보를 가질 정도의 권한을 가진 이라면 쉽게 입을 열 리가.

“잠깐─!”

퍽, 퍼억─!

호위병이 또 큰 소리를 내뱉으려 하길래 목을 위협하던 단검까지 치우고 제대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치 북엇국에 넣을 황태를 두드리듯 가해지는 손길에, 상대는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아직도 말할 생각은 없겠지?”

“아, 아니, 이제 말할─!”

역시나. 상대는 황궁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입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나엘라가 발을 다시 들어 올리자 상대가 기겁하고 빠르게 뱉었다.

“말하겠다. 아니, 말하겠습니다.”

등에 직격했던 발이 약간의 틈을 남기고 멈췄다. 상대는 겨우 멈춘 발길질에 안심하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과연 누가 알았을까. 이것도 전부 연기라는 것을.

기세에 잡아먹히면 끝이라고 상대방은 제압을 당했을 때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위대는 왜 사라졌지?”

“그게, 황제 폐하께서 당장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수도군들이 성문을 포기하고 황궁으로 들어올 예정이라 그들이 이곳으로 올 겁니다.”

명령은 진작에 내려졌으나 수도군이 황궁까지 들어오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며 이제 곧 도착할 거라는 말까지 술술 불었다.

“그럼 친위대는 전부 본궁으로 들어간 건가?”

“예. 예. 맞습니다.”

“시녀장 처형과 황태자의 감시는?”

“그곳에서도 전부 물러난다고 합니다. 아, 시녀장은 지금쯤 본궁으로 끌려가기 시작했을 테고 황태자 전하도 끌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상은 잘…….”

설마 또 다른 인질인가?

시녀장은 처형하는 것보다 인질로 잡는 것을 택했고, 데테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쓸 만한 인간들을 전부 인질로 잡는다면 황제가 최후의 발악을 할 예정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럼 이곳은?”

욕심 많은 황제가 이곳에 있는 인질들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엘라는 상대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