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나엘라는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를 바라보다 혀를 찼다.
“일어나.”
누워 있던 호위병은 기강이 잘 잡힌 말단 병사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자존심도 없는지 아예 굽신거리기까지 했다.
“호, 혹시 여기에 있는 귀족들을 탈출시키려고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설마 세 명이서요?”
본인 앞에 세 명밖에 없기로서니 설마 진짜 셋이 왔을까.
한심해 보이기는 해도 그의 태도가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나엘라는 게슴츠레 바라보는 걸 멈췄다. 이자를 잘만 이용하면 왠지 써먹을 곳이 있을 것도 같다.
“일단 시녀장의 처형은 멈췄다는 거고, 황태자는……. 일단 그쪽으로 간 인원들이 알아서 잘했기를 바라야겠네.”
“황태자 전하께 사람들이 갔다는 건 연합군이 당도했다는 거죠?”
이자가 유난히 굽신거리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나엘라가 연합군의 사람으로 보이니 이참에 적들을 도와주고 목숨이라도 구걸하려는 건가.
“이름, 가문, 직급.”
“예?”
“본인의 관등성명 대라고.”
“아! 프라토 남작가의 차남 로셜로입니다. 호위 병사들을 관리하는 부소대장이고요.”
부소대장이면 지휘계 최하위에서 한 계단 위로, 그나마 이 건물 하나 호위할 정도의 병력 지휘권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친위대는 전부 물러났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본인 소속인가?”
“네. 맞습니다. 저랑 같이 있던 둘은 분대장들이죠.”
그렇다면 인질 구출만큼은 일이 쉽게 풀린다는 얘기였다. 친위대가 없는 마당에 이 작자 한 명이면 호위 병력까지 물릴 수 있으니까. 이로써 동굴까지 도망치더라도 누군가 뒤쫓을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수도군이 오기까진 얼마나 걸리지?”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바로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그거라면 오히려 우리 쪽에선 반길 일이다. 유일하게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여기 있는 귀족 중에서도 따로 빼내 갈 인원들이 있다는 건데…….
“인질 중에서도 몇몇 귀족 가문의 가족들은 따로 끌고 가라고 했다면서.”
“그러니 얼른 움직이셔야 합니다. 수도군들이 도착하면 여기 있는 귀족 중에서도 쓸 만한 인질들은 골라서 데려가기로 했거든요.”
인질들의 호송을 수도군이 맡기로 했다면 다행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움직이면 그만이니까.
다만 임무 체계가 개판인 것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친위대의 단장이었던 단제나 부단장이 사라지고 주 지휘권자들이 무너졌기 때문이겠지.
이는 황궁 병력 및 모든 지휘 체계를 단제가 꽉 잡고 있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대가 날 도와준다면 사례는 톡톡히 치르지.”
“감사합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나엘라가 그들의 뒤쪽으로 손짓하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들이 하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소대장이었던 자가 화들짝 놀라는 것을 뒤로하고 나엘라는 서둘러 움직였다.
아무래도 대대적인 작전 수정이 필요해 보였다.
*
체드란은 달이 넘어가는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몇 시간 후면 황도로 출격하는데 아마 다들 그렇지 않을까. 시간에 맞춰 성문 앞에 도착하려면 일찍 출발해야 하니 아마 지금 잠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면 몰라도.
체드란은 아예 잠을 자지 않는 걸 택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기도 했으니 그리 무리도 아니다.
“대공 전하.”
그런 그에게 마든이 급히 달려왔다. 뒤늦게 마든의 뒤에 있는 론체도 보였다.
“무슨 일이지?”
“대공비 전하께서 보내신 급보입니다.”
“급보?”
단순한 보고라면 굳이 급보라고 보내지도 않았을 터.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급보를 펼쳐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시녀장 구출 실패, 황태자와 인질 구출 성공. 그러나 황제의 명으로 모든 성문에서 수도군이 물러났으며 황궁에서 최후의 발악이 이뤄지리라 예상. 당장 출격 요망. ]
수도군을 물렸다고? 그럼 수도군과 친위대가 전부 황궁에 있는 건가?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이쪽도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
“론체 경, 당장 마호세르디 측 사람들을 불러 주게.”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당장 의원을 불러야 합니다!”
란첸트 백작이 자리를 비운 저택에 데테로아가 업혀 들어왔다.
오는 길에 전투가 있었는지 구출조로 들어갔던 이들에게서 싸움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 뒤에는 연락을 받고 도착한 코더나 톨레로 상단의 사람들도 보였다.
“무슨 일이야?”
황급히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리가 달려와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나엘라 님. 오랜만입니다.”
“말리, 대체 무슨 일이야?”
“감옥을 빠져나오는 길에 소규모 전투가 계속 있었고, 그 와중에 이미 부상을 입고 계셨던 황태자 전하께서 더 다치셨습니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었다고?”
확인해 보니 데테로아의 두 다리는 부목으로 고정된 채 붕대로 감겨 있었다.
“도망칠까 봐 두 다리를 부러트려 놨다고 했습니다. 황제는 황태자 전하의 다리를 앞으로도 쓸 수 없게 만들라고 했지만, 친위대가 차마 그것까진 할 수 없었다더군요.”
“미친…….”
그것뿐만 아니라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데테로아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업혀 나오던 중에 계속 전투가 벌어져서 그런지, 어디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바닥으로 피가 뚝뚝 흘렀다.
“마침 저택에 의원이 있어서 다행이네.”
인질들을 구해 올 예정이었고 그 인질 중에는 란첸트 백작의 손녀도 있었기에 혹시 몰라 의원을 대기시켜 놨었다.
“죄송합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갈 곳이 여기밖에 없었습니다.”
“아니야. 잘했어. 마침 작전도 모두 변경했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래. 연합군이 조금 전 출발했을 거야. 아침이 오기 전에 이 전투를 끝낸다.”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말리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친위대 제복을 입고 있는 자였다.
이자가 톨레로 상단을 도운 건가 생각할 때 즈음,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란첸트 백작가의 장남, 지오르 란첸트라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그저 친위대 중 한 명이라 생각했던 이가 이 저택의 장남이었다니. 나엘라가 예상치 못한 조력자에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는데 어쩐지 지오르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친위대로서 큰 결단을 내려 주어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원래는 잠시만 도와주려 했으나 상황이 이상한 것 같아 함께 빠져나왔습니다. 저랑 같이 나온 다른 기사들도 있는데 그들은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갔고요.”
“좋은 선택이네. 몇 시간 뒤엔 수도가 뒤집힐 테니까.”
인사를 나누고도 지오르는 연신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나엘라가 편히 물으라 말하자 그제야 질문이 따랐다.
“혹시 제 딸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인질을 구출하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내가 먼저 얘기했어야 했는데 잠시 잊었군. 인질들은 무사히 구출했고 원래는 동굴에 잠시 머무를 예정이었으나 상황이 변해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네. 란첸트가의 영애도 현재 본인의 침실에서 쉬고 있고.”
단순히 인질들을 구출했다는 연락보단 직접 보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아 내린 선택이었다. 눈치 봐야 할 수도군들도 전부 황궁으로 들어갔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고.
그 선택이 효과가 좋았는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중앙 귀족들에게서 하나둘씩 연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합군에 참전하겠다는 연락이 말이다. 더불어 백작가에서 잠시 휴식할 겸, 란첸트 영애도 함께 돌아온 참이었다.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한평생 검만 잡은 이들이 미사여구를 곁들여 감사를 표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오르는 잠시 딸아이를 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주고받을 대화가 더 남아 있었지만, 그의 급한 마음도 이해가 되기에 흔쾌히 그를 보낸 뒤 데테로아의 상태를 마저 살폈다.
그사이 달려온 의원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전하의 상태가 어떤가?”
“기력이 떨어지신 차에 피까지 흘리셨으니 상태가 좋진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장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언제쯤 의식이 돌아오시겠는가.”
“그것까지는 확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생명이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면, 회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몫이었다. 이는 데테로아의 선택이었고 그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부러진 두 다리가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 다른 후유증은 없을지에 대해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녀를 불러 가장 좋은 방을 내어 달라 할 테니 그쪽으로 모시게. 이곳에 황태자 전하께서 머문다는 것이 발설되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겠네.”
사실 발설을 해 봤자 그다지 문제 되진 않을 거다. 황궁에 틀어박히기로 한 황제가 데테로아 하나를 잡겠다고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이자가 외부로 발설한다고 해도 당장 몇 시간 뒤면 연합군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의원은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며 결의를 내보였다. 그의 다짐을 감사히 받고는 톨레로 상단의 사람들과 누워 있는 데테로아를 옮겼다.
얼추 상황을 정리하고 나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나엘라의 기사단 사람들뿐이었다. 일단 그중에서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말리. 프리야는 어떻게 됐어?”
“시녀장이 주변 인덕이 있던 사람이었는지 그녀의 처형을 막으려 준비하던 하녀들이 있던 것 같습니다. 친위대가 그중 한 명을 알려 주었고 프리야는 그 하녀를 찾아갔습니다만…….”
“갔습니다만?”
“처형은 취소됐고 시녀장이 본궁으로 끌려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프리야도 만나지 못했고요.”
프리야의 성격이라면 아마 남는 걸 택했을 수도 있다. 시녀장을 구한 건 아니니 다른 기회를 엿보려 하겠지.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는 생각에 나엘라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잠깐 쉬고 있어. 당장 몇 시간 뒤에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황제가 벌일 최후의 발악이자 제국의 주인이 뒤바뀔 싸움이다. 남은 이들을 다독이고 쉬라 전한 나엘라는 본인도 잠시 쉴 생각으로 정원을 향했다.
이제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자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했고 이제 몇 시간 후면 그 결과를 알게 될 테지.
이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를 따지자면 마호세르디 공작이 젊었고, 황제가 아직 황좌에 오르지 못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엘라에게 시작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체드란과 결혼식을 올린 그때였다. 체드란을 만나고 그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랑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흘러온 것이다.
짧은 회한과 회상 사이로 옅은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진짜로 원했던 것들을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