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제국 역사상 반란을 꿈꾼 자는 있어도 단 한 번도 넘어 본 자는 없다는 황도의 성문.
그곳이 텅 빈 곳간처럼 활짝 열리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 찾아오지 않은 칠흑 같은 새벽이건만, 묘한 기운이 흐른다는 건 평범한 시민조차 알고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귀족 저택의 테러와 북쪽 성문 전투, 황궁으로 몰려간 수도군, 한적한 밤거리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인질들.
그것만으로도 황도에 거주하는 모두가 느꼈다. 아침이 오면 새로운 주인이 생기리라고.
“대공 전하,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연합군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체드란도 묵직한 성문이 점차 틈을 벌리는 것을 보았다.
수도를 둘러싼 네 개의 성문 중 가장 큰 이곳은 중앙 광장을 지나 황궁까지 이어지는 대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승전식을 열거나 황실의 결혼식 같은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성문에서 황궁까지 순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진작부터 연락을 주고받던 중앙 귀족들이 그 길 위에 사병들을 이끌고 서 있었다. 직접 성문까지 열어 주며 말이다.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체드란의 옆에는 다나한과 마호세르디의 기사단장들, 노헤스카의 기사단장들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말고삐를 쥔 채였다. 말들도 주인을 따라 푸르릉 콧김을 뱉으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세를 알아차린 중앙 귀족들이 길을 터 주자, 어느새 성문 앞이 활짝 트였다.
이윽고 체드란은 검을 빼 들어 모두에게 소리쳤다. 승리가 코 앞인데 사령관의 말이 빠져서는 섭섭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체드란을 따라 뒤에 도열한 연합군이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승리가 뒤따를 것이다─!”
우아아아아─!
연합군 전체가 내지르는 함성이 꼭두새벽부터 황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전원─!”
흥분하는 법이 좀체 없는 체드란의 애마조차 푸르릉거리며 울어 젖혔다.
어느새 연합군 전체가 쿵, 쿵, 발을 굴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수도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황궁까지 돌격하라─!”
와아아아─!
체드란이 제일 먼저 말을 박차고, 그 뒤를 따라 연합군이 성문을 향해 달렸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듯 말들이 거세게 대로를 짓밟고 달렸다. 곧 황도를 하나씩 밝히는 불이 민가부터 켜지더니 귀족들이 머무는 구역까지 번졌다.
승리를 코앞에 둔, 마지막 전투의 개전(開戰)이었다.
*
“시작됐습니다.”
연합군이 내뱉는 함성이 란첸트 백작가까지 들려왔다. 창문 너머 어둡기만 하던 황도가 하나둘 켜지는 불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엘라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깔끔히 묶고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나섰다.
나엘라가 백작가 현관으로 나가니, 그 앞에 여럿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름이 없음에도 마호세르디가 치른 전쟁에서 늘 생사를 넘나들며 움직이던 그녀의 기사단이었다.
평상시 가볍게 입던 옷들은 모두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진짜 기사단처럼 반짝거리는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들이 새로웠다.
“앞으로 이런 전쟁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한마디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튼이 장난스럽게 뱉는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들도 아는 것이다. 나엘라가 간절히 원했던 바를 모두 이루고 나면 자신들은 진짜로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을 거고, 기사들 또한 각자의 삶을 찾아갈 터였다.
훌쩍 말에 올라탄 그녀가 말머리를 움직이며 이들을 마주 봤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마지막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이름도 없는 채로 매번 사선을 넘었으나, 우리가 승리로 이끈 전쟁에서조차 어떤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생각보다 엄숙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는 기사단이 처음 만들어진 날부터 이어져 온 삶을, 흔적도 없어 어쩌면 허망할 그들이 지나온 길을 언급했다.
“이제는 이름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름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마호세르디에서 치른 전쟁 이후, 처음으로 기사단 대부분이 이곳에 모였다. 그동안 하녀로서 그녀를 지켜 오던 지안, 제니, 가린뿐만 아니라 수도에서도 내내 도와주던 서튼, 말리, 오언, 미아까지.
그 외에도 조용히 흩어져 있던 이들이 전부 모였다. 지금 이곳에 없는 이는 황궁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클로에와 프리야뿐이었다.
“이름이 생겼으나 알리지 못함을 아쉬워하지 마라.”
멋들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가명으로 쓰던 ‘라엘’이라는 이름이 붙어 버린 기사단.
“우리의 존재 목적은 언제나 같음을 잊지 마라.”
처음 기사단이 만들어졌던 그 목적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위험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일이든,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일이든 한순간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순간에 서로를 믿고 냉정히 굴어야 함을 잊지 않는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도 그러할 것이다.”
늘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된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연합군이 승리해 제국의 주인이 바뀌면.”
당연히 바뀔 테고 연합군은 승리할 것이다.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헤스카에서 축제를 열 테니 다들 필히 참석하도록.”
진중하던 이야기가 장난으로 끝을 맺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더 잘 어울리기에 모두 가벼워진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노헤스카에 뭐 유명한 게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마호세르디 공작님이 늘 수고비를 두둑하게 주셔서 저희 돈 많은 거!”
“야! 그래도 서튼만큼 많겠냐.”
“왜 서튼만 말하냐? 솔직히 지안이랑 너희 돈 얼마 받아? 하녀 월급까지 받지?”
서튼과 지내더니 전부 물이 들었나. 어느새 돈 얘기로 떠들썩해져 서로 술을 쏴야 하니 뭐니 작은 다툼이 이어졌다.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좋지만, 이제 이들도 나서야 하는 때가 왔다. 적당히 진정시키려는 찰나, 누군가 다가왔다.
“대공비 전하.”
“란첸트 경.”
지오르라고 했던가. 란첸트 백작가의 장남이자 친위대인 그가 말을 붙여 왔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기사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뵙게 되니 새삼 다시 느껴지는군요.”
“그대가 친위대니 내 첫째 오라버니의 실력은 잘 알 테지. 기사라고 한들 큰 오라버니를 넘은 적은 없네.”
“단장님을 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못 봤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를 뛰어넘은 사람이 친위대 내에서도 없었다니 나엘라의 어깨가 퍽 으쓱해졌다. 단제는 평생을 걸고 꺾고 싶은 상대였으나, 다른 이에게 꺾이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느덧 불빛으로 환히 밝아진 황도를 바라보던 지오르의 낯이 가라앉았다.
“저 또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아까부터 그가 하던 말이다. 연합군의 편에 서서 돕겠다고, 이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딸아이를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게 해 달라고 바득바득 우겨 댔다.
“란첸트 경, 받은 은혜를 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높이 사겠네. 다만 우리와 함께 가면 분명 친위대를 상대하게 될 걸세.”
“상관없습니다.”
“내 오라비도 그것이 두려워 오지 않았건만, 그대가 하겠다는 말인가?”
단제조차 평생 자신이 이끌던 친위대를 상대할 수 없어 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쯤 동쪽 땅끝, 마호세르디와 제스라 왕국 국경 지역에서 승전보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대쪽같은 기사도 그저 승전 소식을 기다리며 신경 쓰지 않길 바랐다.
“자네와 함께 나온 친위대에게도 혹여나 참여할 생각은 하지 말라 전하게.”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는 등을 돌렸다. 그녀의 기사단도 친위대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말고삐를 쥐었다.
“연합군에 합류한다. 가자.”
이들은 일제히 말을 박차며 대문을 향해 달리더니 금방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를 한참 바라보던 지오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무사를 기원하며 말이다.
*
황궁은 황도에서 서북향 끝에 있는 곳으로, 천혜의 성벽과 같은 산을 뒤로하고 수도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위치해 있다. 심지어 지대조차 수도민들이 사는 곳보다 약간 높아 황도 어디에서든 궁이 보이고, 황궁 어디에서든 수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다 황궁 근처 일정 구역 안에는 불순한 무리가 숨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 건 고사하고, 나무조차 밀어 시야가 훤했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황궁을 향해 돌진하는 연합군들의 모습이 가림 없이 보인다는 의미였다. 연합군을 막으려 위에서 지켜보던 자들은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꿀꺽 침을 삼켰다.
엄청난 빠르기로 수도 중앙을 가로지른 연합군은 금세 황궁까지 다다랐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중앙 귀족들의 사병들도 하나둘씩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여기저기 발품 팔며 설득했던 이들은 연합군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합류 의사를 밝혀 왔고, 그 외에도 각자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가문이 연합군의 뒤를 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자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론체가 거센 바람을 뚫고 다가와 크게 외쳤다. 수도를 휘감고 있는 성벽과 성문 말고 황궁의 성문이 또 하나 있는데, 지금 그곳이 활짝 열려 있다는 말이었다.
척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따로 병력을 보내 확인해 볼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진입할 것인가.
그러나 체드란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나친다!”
수도 성문을 지나고 대로를 달린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체드란은 황궁을 주시하고 있었다. 본궁 안에서 손톱처럼 보이는 횃불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더니, 순식간에 본궁 전체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황제가 연합군의 수도 입성을 알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성문을 비워 둔다는 것은 구태여 이곳을 막아 시간을 벌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연합군은 환대인지 방치인지 모를 성문을 지나 점점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궁에 있는 수많은 궁과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궁이자 제국의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이가 사는 궁, 바로 본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군들과 친위대에게 둘러싸여 빽빽한 인간 숲에 휩싸인 궁이.
“아무래도 이대로 뚫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이때까지 연합군이 겪었던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는 듯 미동 없이 단단한 기세가 느껴졌다. 수도군의 1열은 방패를 땅에 박아 넣은 채였고, 그 사이사이 틈마다 2열이 끼어들어 창을 가로로 눕힌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이대로 저 사이에 뛰어 들어갔다간 사방을 향한 창에 말이 찔려 죽을 테고, 기수는 땅에 굴러떨어질 터였다.
“속도를 줄여라!”
연합군은 속도를 줄이고 본궁 앞에 서서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체드란과 연합군 측 몇몇 기사단장의 시선이 빠르게 오고 갔다. 그중 한 명이 대치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세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수도군과 친위대에게 말한다!”
나름 굳건하게 버티고 있으나 연합군이 나와 외치자 그들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한 번 충성을 바친 이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기사의 자부심이자 근간임을 알고 있다─!”
대치 중인 두 무리 사이로 기묘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기사는 본인들이 충성한 자가 어떤 자인지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며, 잘못된 길을 가려는 주군을 막는 것 또한 우리의 일임을 잊어선 안 된다! 더 많은 후회와 피를 흘리기 전에 다잡기를 바란다─!”
연합군과 중앙 귀족들의 사병은 어느새 본궁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