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폐하.”
보좌관이 부르는 소리에 황제는 시간이 됐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궁 밖에서 연합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제 그것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보좌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막 황제가 됐을 때 만나 이날 이때까지 함께해 온 보좌관이었는데 자신이 늙은 만큼 이자도 많이 늙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고 성큼성큼 걷는 그의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황제가 향한 곳은 본궁에서도 가장 큰 알현 홀이었다. 3층까지는 천장도 없이 뻥 뚫려 있었고, 특히나 큰 계단의 꼭대기 층에 황제의 옥좌가 있어 웅장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곳이었다.
황제는 느긋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의자에 앉았다. 매번 자신이 앉았던 의자가 오늘따라 더 푸근하게 느껴졌다.
“폐하!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흐윽─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운 하녀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홀을 울렸다. 알현이 있는 날이면 많은 귀족들과 신하들이 가득 차서 자신을 바라봤을 홀에 오늘은 낯선 이들이 있었다.
등 뒤로 팔이 묶여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들은 지속된 구타로 얼굴이 다 터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를 평생 모신 시녀장과 그녀가 몰래 빼돌린 여자아이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프리야라고 했던가.”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깜박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 뭐라 말할 수도 없었지만, 황제는 끝까지 그녀를 풀어 주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시녀장의 탈출을 도우려 했던 이들 역시 같은 꼴이었다. 더불어 본궁 하녀들과 사용인 모두가 포박되어 꿇어앉아 있었다.
“뭣들 하는가. 준비는 끝났다고 하더니.”
기어코 황제의 입에서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황제를 도우면 살려 준다는 약속에 자원했던 몇몇 하인들이 이를 악물고는 장작과 기름통을 날랐다.
“여기저기 불태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저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랄까.”
시녀장의 화형은 자신을 수없이 뒤통수치고 우습게 보던 나엘라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수도군과 친위대는 이 사태를 모른 채 끝까지 연합군을 막다가 죽을 것이다. 이들을 죽이는 건 연합군이 그들을 뚫고 들어올 때 즈음이었다.
“본궁도 모두 불타 없어지겠지.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에 있는 그 무엇하나 뺏기지 않을 것이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없애려던 계획도, 센텐으로 귀족들을 묶어 두려던 계획도 고작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여자 하나가 모두 망쳐 놓았다. 반란의 싹이 보이는 연합군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행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모두 어그러져 있었다.
한 번 막지 못한 것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커져 더는 막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계획대로만 됐으면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곳에서 어리석은 이들을 제어하며 살았을 텐데.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당장이라도 자신까지 불살라 먹을 것 같은 분노를 터트릴 수가 없어서 모아 놨을 뿐.
황제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다.
*
말을 타고 달리던 나엘라는 활짝 열린 황궁 성문에 헛웃음을 뱉었다. 전투의 흔적도 없는 것을 보아 하니 애초에 열려 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저 멀리 본궁 쪽에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아무래도 본궁에 잠입하는 건 힘들 것 같은데요?”
그 말대로였다. 본궁 전체를 친위대와 수도군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앞을 연합군과 중앙 귀족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안쪽 상황을 좀 보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네.”
“그럴 거라고 생각하셨잖아요.”
일부러 친위대인 지오르에게 본궁 구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아쉬운 일이다. 프리야와 시녀장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으니 마음이 조급해져 더 그렇다.
“일단 체드란 쪽을 지원하자.”
“예? 그쪽이 가장 지원할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부부 일심동체야.”
하긴 결혼도 안 한 서튼이 뭘 알겠어.
점차 속도를 줄인 이들은 체드란이 있는 곳을 찾았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 친위대와 수도군을 설득해 본다더니 딱 봐도 잘 안 된 게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이 기사가 된 이유나, 친위대로서의 자부심 같은 것들을 쉽게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친위대 중에서 단 몇 명이나마 우리를 도와준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근데 클로에가 안 보이네.”
다른 궁에 있을 텐데 설마 프리야를 도와주러 따라간 건가. 그렇다면 클로에 역시 본궁에 있을지도 모른다. 연락도 없으니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기 대공 전하 찾았습니다.”
일단은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끼어들기 위해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런 곳에서 눈에 띄게 말을 타고 들어가다간 죽기 십상이다.
검을 들고 뛰니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기사단이 보였다. 어련히 잘 따라오겠거니 싶어 더욱 속력을 올렸다.
어느새 나엘라의 눈에 수도군을 뚫고 친위대까지 상대하는 체드란이 보였다.
캉─!
역시 친위대였다. 체드란이 휘두른 위협적인 검에도 하나하나 침착하게 막아 내며 물러나지 않았다. 체드란이 힘에 가속력이나 체중을 더하여 더 큰 힘으로 휘두르는 스타일이라 행동반경이 큰 것을 인지했는지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나엘라가 끼어들었다.
챙─ 끼릭─
날과 날이 부딪히며 긁어 내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에 친위대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체드란은 지체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검을 찔러 넣었고 결국 상대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두 명의 협공은 친위대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체드란은 나엘라의 안부를 물었다.
“이제 도착했나 보군.”
“네. 지금 도착했어요.”
투구 사이로 나오는 여자 목소리에 친위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으나 금세 감겼다. 체드란의 검이 방심한 상대를 시원하게 가른 것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친위대와 수도군의 반항이 생각보다 거세다. 애초부터 친위대는 쉽지 않은 상대일 것이라 예상했기에 체드란의 생각을 물었다. 어쩐지 너무 조용한 황제가 거슬리기도 하고.
“글쎄. 장소가 협소하다는 게 문제군. 차라리 엄청나게 넓었다면 연합군도 물량으로 승부를 보면 되는데 지형적으로 저쪽은 수비 형태를 띠어서 힘들어. 거기다 무작정 뚫는다고 해도 본궁 건물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황제의 감시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본궁 안에 깔린 모양인데 멋모르고 뛰어 들어갔다간 죽기 딱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부터 처리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네요.”
“이 정도면 시간도 많이 줄였으니 여기서 조금 지체되더라도 상관없겠지.”
둘이 대화하는 사이 친위대 셋이 달려들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체드란이 두 명, 나엘라가 한 명을 상대했다. 애초에 목적은 체드란이었는지 그들은 나엘라를 방해꾼 정도로 상정하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챙, 채쟁─! 검이 부딪히는 금속음 소리가 사방에 깔리자 나엘라는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상대가 친위대라도 나엘라의 검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에게 꺾지 못한 이는 친위대인 단제가 아닌, 마호세르디의 장남인 단제였을 뿐이니까. 또 지금 등을 맞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이었고.
나엘라는 검을 맞대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빼고 체드란에게 체중을 실었다. 한쪽이 힘을 빼 버리자 친위대의 검은 잠시 나엘라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등을 뒤로 밀어내며 상대방 검의 넓적한 면을 발로 차 버렸다.
조금이라도 밀릴까 싶었던 체드란은 역시나 꿈쩍하지 않았고 나엘라에게 검을 휘둘렀던 친위대의 손목만 꺾였다. 검을 놓쳤으면 더 좋았겠지만 역시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대신 그의 손목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빠른 속도로 몰아붙였다.
채앵─ 채재재재쟁─ 챙─!
그녀의 검은 이미 빠른 상태였으나 조금씩 더 빠르게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빨라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바로 몇 초 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나엘라와 검을 맞대던 상대는 주춤거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멈칫한 사이 나엘라의 검이 상대의 목을 향했다. 겨우 검을 들어 궤도를 틀었지만, 친위대 기사의 어깨를 긁고 지나갔다. 갑옷을 입어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진 않았으나 처음으로 공격이 먹혔다.
그 뒤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체드란. 도와줘요?”
어느새 상대하던 친위대를 처리하고 체드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나엘라였다.
체드란이 두 명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리란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색다른 광경이었다. 그의 앞에는 적이 늘어 어느새 세 명의 친위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명을 해치우는 사이 그는 세 명이나 상대하고 있다는 것에 와락 자존심이 상하는 한편, 또 이게 내 남편이다 싶은 팔불출의 낌새가 올라왔다.
나엘라는 얼른 체드란을 도와 나머지 친위대를 처리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실력을 아는 이들은 곧잘 하는 게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친위대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체드란이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안 나타난 것이 그 예였다.
“아무래도 천천히 진입하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우리도 전선을 조금 당기죠.”
나엘라와 체드란의 실력이 튀면 튈수록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전선이 형성된다. 친위대 정도의 실력이라면 연합군과 이들의 중간을 끊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자칫하다 친위대 사이에 고립될 수도 있기에 나엘라와 체드란은 다시 연합군 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걸음으로 한두 걸음 물러나던 찰나.
“─── ── ── 도와── ──”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작은 목소리는 아닌 것 같으나, 주변이 워낙 시끄러우니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뿐이다.
“누가 ─ ──주세요 ─── 본궁 ───”
들릴 듯 말 듯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어느 순간 주파수를 맞춘 것처럼 확 들렸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본궁 하녀들이 위험해요!”
본궁 하녀들? 정신이 번쩍 드는 바람에 나엘라는 전선을 당기자고 했던 것도 잊고 앞으로 나서 버렸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얽혀 검을 맞대는 이곳에서 작고 가느다란 여인이 하녀복을 입고는 뛰어들고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설마……. 클로에?”
맙소사. 뛰어들던 하녀가 클로에라는 걸 확인하고는 당장 라엘 기사단을 찾았다.
“오언! 말리! 앞길을 뚫고 클로에를 보호해!”
뒤쪽에 있던 그들은 나엘라의 목소리에 상대하던 적은 내버려 두고 바로 앞으로 튀어왔다. 그들도 클로에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피해 정신없이 달려오는 걸 본 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너 미쳤어? 거기서 뭐 해?”
따라왔던 서튼이 기겁하여 벌떡 외치자 그제야 나엘라를 발견한 클로에가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았다.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
“황제 이 미친 새끼가 본궁 하녀들을 산 채로 불태우려 해요!”
주변에 있던 친위대마저 놀라 전투를 멈추고 나엘라는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