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끝과 시작
216화
“진짜 미친 새끼….”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본궁 하녀들을 산채로 불태우려 하다니.
“그뿐만이 아니에요! 아예 본궁 전체를 불태울 거예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악에 받친 황제가 무슨 짓이든 하리라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아무 상관없는 하녀들에게까지 그리 행동할 줄은 몰랐다.
아니, 제 불찰이다. 애초에 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인질을 잡아간 것에서 그럴 만한 놈이었음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프리야랑 시녀장님도 그곳에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 프리야는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잔뜩 열받은 나엘라가 손목을 풀었다. 바로 친위대를 뚫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라엘 기사단은 날 엄호해! 체드란, 당신은 여기 정리 좀……!”
그나마 이곳을 맡길 이는 체드란밖에 없기에 전술 지휘를 부탁하려던 나엘라는 멈칫했다. 체드란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요?”
“감이 안 좋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체드란의 감은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쌓아 온 본능적인 예측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경험과 사건들에서 우러나온 불분명한 경고와 같은 것.
나엘라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독였다. 저 안에 있을 황제와 하녀들, 그리고 감시자들까지 떠올리며 상황을 따져 보았다.
“잠깐만, 클로에…….”
“네?”
“너 어떻게 나왔어?”
“뭐가요?”
“감시자들이 깔려 있을 텐데? 아무리 한 사람이라지만 하녀가 나가는 걸 모르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근데 어떻게 나왔냐고.”
그제야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클로에도 하얗게 질렸다. 나엘라의 말이 맞다. 그녀가 아무리 실력이 좋대도 제 뒤를 쫓는 사람 하나 없이 빠져나온 건 이상했다. 심지어 막은 자도 없었다.
클로에의 등줄기로 소름이 타고 흘렀다.
“설마 그럼 이게 함정이라는 거예요?”
“나나 체드란을 부르기 위한 함정이지 않을까. 우리는 프리야나 시녀장을 구하려 할 테니.”
“맙소사…….”
그것도 모르고 급급한 마음에 무작정 들어갔다면 분명 큰일을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함정임을 알아도 프리야와 시녀장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들어가야 한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아는 만큼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도 없다.
쉽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은 했지만, 황제는 마지막까지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함정임을 알아도 들어올 것이라 예상했기에 클로에를 보내준 것일 터.
입술을 짓씹다 못해 터졌는지 비릿한 쇠 맛이 났다.
“나엘라.”
체드란이 살짝 소강상태에 접어든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를 붙잡았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친위대도 행동을 멈추었다. 그들은 황제를 지키는 일을 명예롭다 여기며 평생을 바쳤다. 지금까지는 역모를 막는단 이유로 애써 덮어 두었으나, 힘없는 자들을 산 채로 불태우려 하는 건 그들로서도 더 이상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혼란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함정이 맞다면 황제는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다.”
“문제는 어떤 것이 기다리는지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도 대비해야겠지. 그대의 전문 분야 아닌가.”
나엘라는 체드란의 말을 곱씹었다. 전문 분야라는 그의 말대로다. 황제가 몇 수 앞을 내다본다면, 나엘라는 그것보다 더 멀리, 더 넓게 봐 왔다.
“정 안되면 그냥 나를 믿어.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야.”
“그건 안 돼요. 당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그런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당신을 넣지 않을 거예요.”
체드란을 못 믿는 건 아니다. 감시자들에게 그가 질 리는 없다.
다만 혹시 모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모두 제외하고 싶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니까. 몇 걸음 앞으로 원하던 미래가 다가왔는데, 그곳에 체드란이 없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가장 오랫동안 참고 견뎌 왔을 이 중 한 사람이 그였다. 그가 없는 미래는 생각할 수 없는 나엘라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절대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황제가 없는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황제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왜 자신들을 끌어 들이려 할까.
정말로 원하는 것은 나엘라나 체드란일까.
그렇다면 왜 원할까.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생각났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실제로 황제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줄 때가 왔다.
*
생각의 시작은 황제가 누구를 왜 원했는가부터였다. 황제의 생각을 알아야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도 예측할 수 있으니까.
더는 이 판도를 뒤집을 수 없다. 모든 계획을 실패한, 분노가 끓어 넘치는 자는 무엇을 원할 것인가. 분명 최소한의 복수를 원하지 않았을까.
‘황제는 공멸을 택한 걸지도 몰라요. 적어도 저 하나는 저승길 동무로 삼겠다는 거죠.’
체드란이나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적다. 황제는 한평생 남을 의심하며 살았던 자다. 애초에 가족이나 측근의 대한 믿음과 기대도 없었을 터. 자연히 상대적으로 배신감도 덜할 것이다.
그러니 면전에서 대놓고 굴욕을 선사하고, 오랜 계획과 이 전쟁을 망친 사람에게로 분노의 칼날을 겨눴을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상대는 나엘라일 터.
‘프리야를 보자마자 시녀장의 딸인 걸 알아봤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프리야가 내 사람인 것도 눈치챘을 거예요.’
알 수밖에 없다. 황제의 눈을 피해 프리야를 숨겨 온 데다, 고작 여인일 뿐일 프리야를 황궁에 잠입시킬 정도로 실력을 키워 줄 수 있는 곳은 마호세르디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시녀장은 나엘라의 탈출을 돕기까지 했다.
‘아마 황제는 체드란이 정문을 뚫고 시선을 돌리는 사이, 제가 몰래 그녀들을 빼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황제도 이제는 나엘라가 단순히 머리만 좋은 여인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의 앞에서 친위대를 따돌리고 도망갔으니 기사였다는 소문이 진실이라고 판단했을 터.
그러니 일단은 황제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목적을 이루기 직전이라고 확신할 때에야말로 상대가 가장 방심할 때니까.
체드란은 나엘라가 알려 준 것들을 곱씹은 뒤 검을 바로 잡았다. 친위대의 사기가 꺾인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부터 소수 인원으로 정문을 뚫는다.”
체드란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을 필두로 세우고, 마호세르디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방패 기사단에게 엄호를 부탁했다.
앞서 흩트려 놓아 친위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기세를 올렸다.
“상대가 친위대라 하여도 수적으로 열세다! 모두 밀어붙여라!”
검은 방패 기사단의 단장, 다나한이 외치자 이름답게 커다란 방패를 들어 올린 이들이 길옆을 막고 섰다. 쿵! 쿵! 붉은 월계수 기사단을 호위하며 땅에 방패를 박아 넣고는 상대가 틈을 비집지 못하도록 버텨 내었다.
두께도 무시무시하지만 크기조차 성인 남성의 반을 훌쩍 넘는 방패가 길옆을 막고 버티고 있으니 친위대로서는 죽을 맛, 붉은 월계수 기사단으로서는 그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본궁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검은 방패가 땅에 박히는 수 역시 늘어났다.
제일 선두에 있던 체드란은 거의 검무를 추듯 움직였다. 가벼운 몸놀림과 묵직한 검격, 아름다운 검의 궤도는 검무란 단어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검의 날이 상하든 말든 부웅 대검을 휘두르며 그야말로 친위대 사이를 날아다녔다.
그 뒤를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따르고 검은 방패들이 지켜 내었다.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본궁 하녀들이 위험하다!”
다나한은 명분이, 검에 실린 한 톨의 걱정이 전장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을 잘 알았다. 틈틈이 본궁 하녀들을 구하려 이리 애를 쓰는 것임을 과시해 친위대의 생각을 흔들었다.
과연 대의는 누구에게 있는가. 자신들은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친위대의 표정에선 고민이 깊어지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흐름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다나한은 더 열심히 외쳤다.
“대공 전하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을 지켜라! 지금 이 제국의 유일한 희망이다!”
체드란이 중요한 건 맞지만 정말 유일한 희망은 아니다. 그가 없다 하여도 당장 이 전투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다만 그런 말들로 친위대를 압박할 수 있다면 더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부러 예민한 단어만 골라 외치던 다나한은 두 기사단뿐만 아니라 연합군 전체가 거센 압박을 시작한 모습을 둘러보았다. 기사단과 연합군을 동시에 막아 내느라 친위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정문으로 진입한다!”
체드란이 기어코 친위대를 뚫어 내었다.
그 순간 검은 방패들이 재빠르게 끼어들어 양옆을 막아 주자 정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들은 본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융단, 샹들리에, 온갖 보석과 조각품으로 장식된 1층을 달렸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황제가 알현을 받는 홀 쪽으로 향할 때였다.
어디선가 감시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검은 두건과 검은 옷을 입은 개성 없는 차림새의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몸을 숨겼나 싶을 정도로 몰려들었다.
“죽음을 자초하는군.”
체드란은 이 많은 감시자가 모였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이 행보의 끝은 죽음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황제를 위해 목숨을 불 싸지르다니.
이쯤 되면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감시자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세뇌했기에 마지막까지 맹목적으로 구는지.
“그렇다 한들 감시자는 감시자지.”
말 그대로 그들은 감시하는 자지, 기사나 암살자가 아니다. 황제의 명을 받으면 암살을 실행하긴 한다지만, 애초에 그들은 잠입과 정보 수집에 가장 중점을 둔 자들이다.
제대로 기사단과 맞붙으면 승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다.”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음을 느끼며 체드란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연합군의 사기를 올릴 겸, 전장을 빠르게 정리할 겸 쉴 새 없이 움직였더니 체력의 소모가 꽤 컸다.
그래도 아까와 다름없는 자세로 검을 잡았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체드란과 붉은 월계수 기사단만으로 이곳을 뚫어야 했다.
“이번엔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런 체드란의 뒤에서 마든이 걸어 나왔다. 두칸을 상대할 때면 체드란 못지않게 날뛰던 잿빛 머리의 기사가 이번엔 감시자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
집사의 모습은 검을 든 순간 사라졌다.
“가겠습니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쉰 마든이 감시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뒤를 따라 체드란과 기사단도 달려들었다.
이제는 포위당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밖에 있던 연합군도 정문을 뚫은 것을 계기로 조금씩 밀려 들어올 테니까.
“감시자들이 암기를 사용한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체드란은 고개를 숙여 단검 하나를 피해 냈다.
기사들과의 전쟁과는 다르게 검이 아닌 무기도 튀어나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손에 든 모든 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두칸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간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붉은 월계수 기사단은 미친 듯이 몰아쳤다.
1층 알현 홀이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