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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18)화 (218/220)

217화

콰아아앙─!

황제는 감고 있던 눈을 들어 알현 홀의 문을 바라보았다. 복도와 홀을 가르는 커다란 문이 반쯤 박살 난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쯧. 그냥 열어도 충분하거늘.”

잠가 놓은 것도 아닌데 굳이 부셔야 했느냐는 타박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세히 보다 보면 부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감시자들 몇 명이 문을 부수고 홀 안으로 튕겨 들어왔을 뿐이다.

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곧 피를 뒤집어쓴 이들이 부서진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흘린 피로 찬란하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흉흉한 기세의 갑옷들을 입고 홀 안으로 들어온 자들.

체드란과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었다.

밝은 백금발 머리에서 누구 것인지 모를 피를 뚝뚝 흘리며 들어온 체드란은 머리가 걸리적거리는지 쓰윽 뒤로 넘겼다. 그로 인해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황제 하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드러났다.

“오랜만이구나. 내 첫째 아들이여.”

일견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황제의 말에 체드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첫째 아들이라……. 살면서 처음 들어 본 호칭임을 황제는 알까.

“나엘라 대공비는 오지 않았느냐. 검을 꽤 쓰기에 함께 올 줄 알았더니.”

그는 당연하단 듯 나엘라를 찾았다.

딱 봐도 이 자리에 그녀가 없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엘라가 어딘가에서 몰래 잠입하고 있다는 걸.

그에 대한 증거로 황제는 프리야를 바라보았다. 퉁퉁 부어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꽤 아끼는 아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도 보는 눈이 꽤 쓸 만하지 않은가. 이 아이가 쓰는 검이 대공비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아본 것을 보면.”

프리야가 황제에게 잡히기 직전, 거칠게 반항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런 몰골일 터.

“그런 생각을 하였다.”

체드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황제는 계속 입을 열었다.

“너도 지엘라도, 파르로시에 데테로아까지. 이제 보니 전부 마호세르디와 친분이 생긴 것 같더구나. 어쩌면 마호세르디는 황실 핏줄에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내 핏줄들을 귀히 여겼나 보아.”

피식, 체드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본 황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지만 금세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체드란의 반응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였다.

“아니면 내게 당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 것인가. 그래서 마호세르디 사람들이 체드란 너도 불쌍히 여겨 주더냐.”

황제의 손짓에 홀 곳곳에 숨어 있던 감시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체드란에게 불리한 형세였다. 황제에게는 인질들이 있었고, 그들을 감시자들이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체드란, 너는 착각하고 있다. 황제의 자리는 그런 시선을 받아선 아니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그 누구도 탐할 수 없고, 우러러보는 지고의 자리가 이 자리니라.”

마치 아들에게 조언하는 아버지처럼 황제는 자상한 어조였다.

그러나 황제가 오래도록 착각해 온 것이 하나 있었다. 체드란은 그 착각을 정정해 주려 홀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황제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체드란은 살아온 처음으로 황제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었다.

“그리고 다음 황제가 될 데테로아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데테로아는 스스로 위험을 감수했고 그 대가를 치렀다. 황태자로서, 다음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사람들에게 나서는 걸 선택했다.

사람들의 혼란 속에서 진정한 방향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마호세르디는 황실 핏줄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배신당한 동지로서 그 아픔을 이해한 것일 뿐이다.”

주군에게 충성했던 가장 충직한 검들이, 오랫동안 제국의 서쪽을 지키며 제국의 방패라고까지 불렸던 이들이 돌아선 이유는 모두 하나였다.

황제의 의심, 그리고 배신.

“당신은 그만큼 충성스러운 자들을 스스로 버렸다. 그 어리석음이 이 순간을 만든 것임을 혼자만 모르는군.”

황제가 버린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마호세르디, 노헤스카, 루부스, 란첸트 등등 그 이름들은 모두 황제를 위해, 제국을 위해 한 몸 바쳐 검을 들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제게 검을 들이댈까 두려워 먼저 내쳤으니 그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원래도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크게 울리니 기괴할 정도였다.

“나의 고집이 이 순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아니, 고집이 아니라 아집이다. 한 번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사고가 객관적이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저만 옳다고 믿는 그런 아집.”

“우습구나! 비록 내 계획이 실패하여 수세에 몰렸으나, 만약 성공했다면 그렇게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체드란은 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말이 통하질 않았다.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는 계획임을 왜 모른단 말인가.

아무리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한들, 그 계획의 시작이 편협한 사고와 그릇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면 실패의 원인 역시 같았다.

“보아라, 체드란.”

황제의 손짓에 감시자들이 칼을 꺼내 들며 하녀들을 겨눴다. 그중 한 명은 거친 손길로 프리야의 목 아래에 검을 바짝 붙였다.

“여기서 네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거나 내가 죽으면, 이들의 목숨은 없다.”

홀 가득 기름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하녀들의 옷이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에게까지 뿌린 모양이었다.

“검을 버리고 항복하라, 내가 그리 말하면 어찌하겠느냐? 그럼에도 날 죽이는 데 집중할 텐가?”

대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다 말하며 하녀들을 포기할 것이냐고 반복적으로 충동질을 해 댔다. 비릿한 표정으로 묻는 황제를 보면서도 체드란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때, 홀의 2층 난간에서 감시자 하나가 쿵 떨어졌다.

“끄아아악─!”

가슴에 검상을 입은 채 떨어진 자는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 뒤로도 몇 명이 더 난간에서 추락했다. 하녀들과 감시자들이 모여 있는 중앙과 2층 난간은 떨어져 있어, 그들의 옆으로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곧 난간 위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며 황제는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드디어 왔구나.”

나엘라는 투구를 벗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2층 난간을 빙 둘러싸듯이 라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간에서 떨어지는 시체들이 점점 쌓여 가고 있음에도 황제는 오로지 나엘라만 바라보았다.

“그래. 마호세르디에서 내가 유일하게 탐을 냈던 아이, 나엘라 마호세르디.”

황제가 황좌에 깊숙이 등을 파묻으며 나엘라를 편히 내려다보았다.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하녀들을 포기하고 황제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고작 하녀일 뿐인 그녀들을 위해 검을 내릴 것인가.

선택을 돕기라도 하겠다는 듯 황제가 다시 한번 손짓을 했다. 벌벌 떨고 있던 하인 몇 명이 성냥에 불을 붙였다.

이 성냥을 떨어트리기만 하면 불이 번지고 사람이 산 채로 타들어 가기 시작할 터였다.

“폐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정작 난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엘라는 황제가 강요하는 선택이고 나발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에 되레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맞아 본 것이 언제가 마지막입니까?”

황제의 얼굴이 웃음을 걸친 그대로 점점 굳어 갔다.

“이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게로구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냥 궁금해서요.”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그 답을 곱씹던 나엘라가 갑자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누군가에게 맞긴 맞았었다는 뜻이죠? 황자셨던 시절, 다른 형제들에게 맞은 건가요?”

황제의 손아귀가 황금으로 조각된 의자의 팔걸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 말은…… 여기 있는 이들은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저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폐하의 자존심을 깎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상대하려면 똑같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죠.”

“그래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겠다?”

“아뇨. 역시 그건 싫네요.”

나엘라가 체드란에게 눈짓을 하자 단숨에 그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의 기세가 변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구는 그들에게 황제가 끝까지 비웃음을 날렸다.

“과연 누구의 검이 더 빠를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냐. 아쉽게도 저들의 성냥이 가장 빠를 것이다.”

하인들은 불이 꺼지면 다시 새로운 성냥을 꺼내 불 붙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제 목숨줄인 걸 아는지 손을 벌벌 떨면서도 잠시도 꺼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곳에서 가장 빠른 이들은 저들이 아닐 겁니다.”

나엘라는 난간 아래를 보던 상체를 천천히 뒤로 물렸다.

“저는 제 사람들이 가장 빠르단 것을 믿어 의심치 않거든요.”

그때였다. 하인들의 가슴에서 푸욱 검이 솟아났다.

“컥……!”

그들의 손에서 성냥이 툭 떨어지자 누군가가 재빠르게 잡아챘다.

“앗 뜨거!”

연신 손을 털면서도 방정맞게 구는 자는 감시자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2층 난간에서 떨어진 시체들이 단숨에 일어나 하녀들을 감싸고 있던 감시자들과 하인들을 베어 버렸다.

“그러게, 장갑 끼라고 했잖아.”

분명 감시자들의 시체라 생각했던 이들이 느긋하게 잡담을 나누며 하녀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설마 하녀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시체로 위장했던 것인가.

전부 다 가짜는 아니었는지 맨 밑에 깔려 있던 자들은 미동이 없었다. 맨몸으로 낙법도 없이 바닥에 추락하기엔 위험하니 시체를 쿠션 삼아 떨어진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폐하.”

어느새 상황은 역전되었다. 당황한 황제의 표정을 응시하며 나엘라는 2층에서 서서히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진짜 감시자들을 체드란과 기사단이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엘라가 잠입시킨 가짜 감시자들 또한 체드란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당신의 계획이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제국민들을 위한 치세를 펼쳤다면, 충직한 귀족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그를 위해 노력했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인복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재가 즐비했다.

만약 이 모든 인재를 제국을 지키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그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그러나 이미 지나 버린 일이었다. 황제는 몰락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이 앞에 있었다.

“당신의 핏줄들이, 마호세르디가,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당신 때문에 잃어야 했던 것들을 되찾는 모습을 이제 보게 되실 겁니다.”

참아 왔던 설움과 분노들이 터져 나올 테니까.

나엘라는 더 말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끝맺음할 시간이다.

붉게 변한 황제의 얼굴이 극심한 노기를 담고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황제는 깨달은 모양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나엘라에게 졌음을.

체드란은 차오르는 많은 감정을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전원.”

모두의 기세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모든 불행의 종지부를 찍을 이 순간만을.

“황제를 잡아들여라.”

그 말이 신호탄이 된 듯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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