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황제를 사로잡았다─! 모두 투항하라─!”
한 기사가 고래고래 외친 말에 전의를 잃은 친위대가 하나씩 투둑투둑 검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연합군의 공세에도 아직 버티던 자들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많은 친위대와 달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던 자들도 황제 생포 소식에 결국 검을 버린 것이다.
“연합군이 승리했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다나한이 제일 먼저 외친 말이었다. 그 순간 모든 연합군이 한마음이 되어 함성을 내질렀다.
와─!
연합군의 승리는 금방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전의 뒤처리가 시작되었다.
“황태자 전하.”
막 의식을 차린 데테로아에게 코더 우부라가 연합군의 승리를 전했다. 그는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도 폭포처럼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군요.”
바닥까지 내려갔던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 아직 안색이 파리한 데테로아도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수도 많았네. 모두…… 정말 고생했어.”
코더의 등을 두드려 주던 데테로아는 찡하게 울리는 코끝에 괜히 한 번 훌쩍거렸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되리라 믿었지만, 불안에 떨었던 지난날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황제에게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인 채 많은 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날들. 그 속에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던가.
황제의 패악을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테로아는 늘 자신의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특히, 황태자란 자리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약점이 되어 살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되는지, 밖에서 검을 들고 있는 이들을 지켜보며 황궁에서 편히 몸을 뉘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괜찮아질 터였다.
“전하.”
눈물을 훔치는 이들 사이에서 사피오가 데테로아에게 다가왔다.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다가와 데테로아가 누워 있는 침대에 놓았다.
“이제 막 일어나신 것을 압니다. 회복하셔야 한다는 것도 알고요.”
“그대는…….”
사피오라면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데테로아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톨레로 상단을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다.
불세출의 천재라고 했던가. 야만족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똑똑한 자라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대공비 전하께서 그동안 고심해 오신 황궁 체계 개편안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양의 서류 뭉치가 그 위로 다시 쌓였고, 그 덕에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이것은 제국 영지들의 실태 보고서입니다.”
또 한 번 서류 뭉치가 쌓였다. 심지어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쳐 내야 할 귀족 무리와 그들의 비리가 담긴 자료들입니다.”
데테로아는 심란한 눈으로 쌓인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건만 당장이라도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였다. 이젠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커흠.”
방금까지 눈물을 찍어 내던 코더가 은근슬쩍 눈길을 피했다. 그 말은 곧 코더도 이 종이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더불어 이럴 때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사피오가 어쩐지 조금 부끄럽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제국 내실을 다지는 정책들에 톨레로 상단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자 합니다. 7할 정도의 비용으로 체결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벅찬 감동이 가득했던 방 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
내전이 끝나자 데테로아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란첸트 백작가에서 좀 더 머물다 가시라며 만류했지만, 황태자가 되어 그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복귀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국 분위기는 흉흉했고, 이때를 틈타 반란분자들이 날뛸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마냥 쉴 수는 없었다.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란첸트 백작가와 몇몇 믿을 수 있는 가문의 기사들이 데테로아를 호위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군사들은 마음 놓고 돌아갈 수 있었다.
한창 황궁의 복구로 어지러울 적에 나엘라와 체드란, 몇몇 이들은 마호세르디로 향했다. 노헤스카의 군사들이 본래 영지로 돌아간 것과 다르게 마호세르디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던 탓이다.
그 일을 위해 나엘라는 마호세르디 저택의 자신이 쓰던 옛 방에서 옷을 꺼내 입었고, 체구가 큰 체드란의 옷은 잊지 않고 수도에서 챙겨 왔다. 내전을 마음먹은 것은, 결국 오늘의 일을 위해서다.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마호세르디에서는 축제는커녕 기뻐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되레 모두가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을 만큼 엄숙함으로 가득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을 때 전대 시론 후작의 장례식이 이행되었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사이 장대비로 변모했다.
우산을 들고 있던 나엘라는 검은 장갑을 고쳐 끼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에스토가 보였다.
지난날 장례를 치렀던 무덤 앞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든 일을 끝낸 그들은 약식으로나마 전대 시론 후작의 장례를 다시 치르기로 했다. 간단한 무덤 축복과 장례 미사이지만, 이것으로 에스토는 묵혀 두었던 마지막 인사를 전대 후작님께 건넬 수 있을 것이다.
검은색 제의를 입은 사제가 기도문을 읊는 것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신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나니─.”
나엘라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 숙였다. 에스토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차마 그 모습을 계속 볼 수가 없었다.
“나엘라.”
옆에 있던 체드란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아 위로하고는 금방 놓아주었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무슨 일인가 바라보니 반대쪽에서 하일모라가 그녀에게 눈짓하고 있었다.
“가자.”
하일모라가 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잠시 헤맸다.
“이럴 땐 순 헛똑똑이라니까.”
“응?”
“지금 같을 때 에스토 옆에 우리가 있어 줘야지. 쟤 우리 아니면 친구 없잖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작게 미소 지은 나엘라는 체드란에게 다녀오겠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에스토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제가 들고 있는 우산을 나눠 썼다. 그건 하일모라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토가 충혈된 눈으로 양옆에 다가온 나엘라와 하일모라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둘 다 바깥쪽 어깨들이 젖어 가고 있었다.
나엘라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에스토, 내 검, 돌려주지 않아도 돼.”
에스토는 그 검의 담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부디 자신의 검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랐다.
“나는 뭘 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
하일모라는 지금 딱히 가진 게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이젠 솔로니까 가끔 만나서 술 한 잔 정도는 하자.”
그리 위로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일모라는 알아주는 주당이니까.
술이 그다지 세지 않은 에스토이니 죽어날 미래가 눈에 그려졌다. 그럼에도 잔뜩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축축한 목소리에 나엘라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눈물을 흘릴 순 없었다.
그래도 대답을 들었으니 되었다. 에스토의 말이 뭐에 대한 동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오랜 친구인 셋은 장례 미사가 끝나도록 서로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단제는 온종일 비가 쏟아지다가 한순간 맑게 변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아마 시론 후작의 장례식이 끝났을 터다.
비가 온 뒤라 땅이 질퍽했지만 말을 달리기에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철저히 그의 기준이었다.
“괜찮은가.”
마리즈를 돌아보니 그녀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말발굽에 사방으로 튀던 흙탕물이 어느새 하얀 뺨에도 묻어 있었다.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장례식에 참석하려면요.”
“……내게는 자격이 없어서.”
그의 마음엔 많은 돌이 무겁게 굴러다녔다. 그 많은 돌 중에는 에스토와 관련된 것들도 당연히 존재했다.
단제는 시론 후작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심지어 일정 부분 일조하였을지도 모른다. 에스토를 보기에 죄스러운 만큼 그 중요한 자리에 뻔뻔히 참석할 순 없었다.
장례식은 떠나간 사람을 기리는 자리이자, 떠나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워낙 어린 시절부터 마호세르디령을 떠나 있어 유대감이 별로 없는 자신보다는 시론 후작과 연이 깊은 이들만 참석하는 게 나았다.
“나 때문에 일부러 늦게 가는 건 아니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단제가 힐끗 바라보았다.
“나는 푸르텐가의 사람이니까 괜히 끼면 분위기를 망칠 거 아니에요.”
애도와 인사는커녕 유대 깊은 이들만 모인 장례식에 방해꾼이 되는 걸 걱정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어쩐지 대답 없는 단제를 보며 마리즈는 작게 웃음을 흩뿌렸다.
“거짓말 되게 못하네.”
단제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니라며 급히 해명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경계 지역에서 함께 지냈던 둘은 서로를 대하는 데 훨씬 편안해졌다. 제스라 왕국과 맞닿은 곳이라지만, 두 사람에게는 몸이 고될지언정 마음은 편한 곳이었다. 평생을 황제의 곁에서 피 말리며 살아온 덕에, 일거수일투족 보고되지 않는 삶은 심적인 안정을 불러일으켰다.
애초에 다나한이 내전에 참여하기 전 제스라 왕국 외각을 뒤집어 놓은 탓도 있었고, 내전에 의해 경비에 날이 선 만큼 함부로 움직이는 자가 없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경계 지역이라 한들 그냥 걸려 있는 무기들이 좀 살벌하고 주민들이 좀 우락부락한 시골 마을 같았다.
점점 마음이 편해지고 여유가 생기자, 서로 대화도 많이 나누게 되었다.
“근데 진짜 친위대 단장 자리는 다시 안 맡을 거예요?”
“내겐 자격이 없소. 친위대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놈의 자격은 대체 언제까지 찾을 거예요?”
뭐만 하면 자격, 자격 아주 지겨워 죽겠다며 툴툴거리는 마리즈를 보며 단제가 작게 웃었다. 결혼 후 입꼬리만 올리는 미소조차 본 적이 없었건만, 이제는 이런 투정까지 오고 가는 수준이 된 것이다.
마리즈는 은근슬쩍 진심을 끼워 넣었다.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해 본 적이 없다면서요.”
절 돌아보는 단제에게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평생 누군가를 지켰던 사람이니 그걸 가장 잘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된 건 이번엔 본인이 지킬 사람을 선택해 보라는 말이었어요.”
“그게 꼭 황궁이 될 필요는 없지.”
“어휴, 답답해. 그럼 누굴 지키려고요? 마호세르디라도 지킬 거예요? 아니면 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입이 잔뜩 튀어나와 툴툴거리던 마리즈는 순간 사레에 걸릴 뻔했다.
지금 저 사람이 뭐라 한 거지? 설마 날 지키겠다고?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아니 그게…….”
“마호세르디까지 올 적에도 계속 지켰고, 지금도 지키는 중이잖는가.”
그것도 그렇다. 감시자들에게 쫓기던 와중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다면 위험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쉽게 몸을 뺐겠지.
당시엔 급박했기에 생각할 짬도 없었던 터라 새삼 깨달았다. 어쩐지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바람에 마리즈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단제는 말이 많지 않기에, 자연히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호세르디가 가까워지는지 저택이 점점 커질수록 마리즈는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저택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보였다. 사용인들조차 전대 시론 후작가과 오랜 인연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를 애도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저택 분위기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마리즈는 어쩐지 불편한 마음과 동시에 바짝 긴장이 되었다. 비가 내린 후에 달려오느라 흙탕물이 잔뜩 튄 제 옷이 좀 껄끄러웠다.
오늘이 정식 인사 날이나 다름없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그렇게 말에서 내린 마리즈가 단제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때마침 저택을 나오던 이와 마주쳤다.
“나엘라.”
단제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 돌렸던 나엘라의 눈동자는 마리즈에게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