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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20)화 (220/220)

219화

“음…….”

나엘라가 어색히 웃으며 길을 비켜 주다. 그러나 세 사람 사이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입장이 애매한 것이다. 나엘라는 감시자들에게 악감정이 있고, 단제는 제 부인이 껄끄러운 존재라는 걸 알지만 가족들이 믿고 받아 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마리즈는 마리즈대로 제 입장이 난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들의 어색함은 나엘라의 뒤를 따라왔던 체드란이 끼어들며 깨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먼저 인사를 건네는 단제를 따라 마리즈도 인사를 했다. 체드란은 나엘라를 흘끗 보더니 가볍게 받아 주었다.

“경계 지역에서 막 오셨나 봅니다.”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애초에 체드란도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단지 나엘라의 오라버니라는 것, 친위대 단장이었다는 이유로 인사를 건넨 것이라 분위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결국, 보다 못한 나엘라가 먼저 나섰다.

“두 분 다 피곤할 테니 일단 방에서 쉬세요. 집사에게 오라버니께서 쓰던 방을 치워 놓으라 일러두었습니다.”

나엘라가 단제를 대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체드란은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다나한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던 것만 보았던 탓이다. 단제에게도 다나한에게 대하던 것처럼 행동할 줄 알았기에 더더욱 놀라웠다.

“그럼 저희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단제가 후에 제대로 인사를 하겠다며 위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이 부부는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나엘라, 같이 좀 가자니까 왜 혼자…….”

하일모라와 지엘라가 팔짱을 끼고 나오다가 멈춰 서고.

“간만에 술이나 한잔하자더니 왜 데이트인 것처럼…….”

그 뒤를 따라 나오던 에스토도 멈춰 섰다.

“아니, 왜 나는 안 끼워 주고…….”

거기다 다나한까지.

현관 앞에서 어색함의 끝을 달리는 이들이 전부 모인 셈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차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사실 이들은 에스토를 위로하기 위한 술자리를 핑계로 자리를 비우던 중이었다. 단제와 마리즈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불편할 만한 자들은 미리 빠지려던 터였다.

“다들 어딘가 나가려던 중이었나 보군.”

단제가 먼저 말을 꺼내자 한 명씩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문제는 마리즈였다. 그들 중 단제와 사이가 나쁜 이들은 없었지만, 마리즈는 조금 다른 상황이니까.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에스토가 나섰다. 다들 제 기분을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피부로 와닿는 시선만 봐도 모를 수 없는 수준이다.

다들 마리즈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하필 오늘 전대 시론 후작의 장례식을 치르는 바람에 더 눈치를 보는 거였다.

그러나 에스토는 그러지 않길 바랐다. 비록 아직 마음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으나─.

“마호세르디 부인을 뵙습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무슨 뜻인지 깨달은 이들은 조금 착잡한 얼굴을 하고서 마리즈와 인사를 나눴다. 에스토가 무엇을 삼켜 냈는지 알 것 같아서, 그 뜻이 퇴색되거나 왜곡되지 않길 바라서.

“에스토.”

단제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에스토의 마음을 알기에 뒤채는 죄책감과 안타까움, 고마움이 눈빛에 혼재되었다.

“형님.”

오래전 처음 봤을 때처럼 형님이라 부른 에스토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다들 피해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검을 휘두르는 단제를 보고 배우고 싶다며 달려들던 에스토였다. 나엘라 친구라더니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오늘을 시작으로 열심히 털어 내 보려 합니다.”

단제의 손이 에스토의 어깨를 한 번 꾹 잡고는 떨어졌다.

“고맙다.”

“아닙니다. 그러니 마호세르디 부인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단순한 면이 있거든요.”

단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에스토에게 또 듣고서야 마리즈는 살포시 웃을 수가 있었다.

단순하다는 얘기에 다나한과 나엘라가 바로 인상을 썼으나 하일모라와 지엘라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나엘라도 가끔 엄청나게 단순하지.”

“어머, 다나한 경은 안 그런데요?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데.”

한 번 웃음을 터트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나엘라와 다른 이들은 간만에 한잔하기로 했다고 전하고는, 내일 식사를 약속하곤 자리를 떠났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이들이 사라지고, 방으로 올라가던 마리즈가 주춤거리며 발을 멈췄다. 의아한 얼굴로 단제가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리즈?”

어느새 입에 붙어 버린 이름이 단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재촉으로 알아들은 걸까? 마리즈는 다시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었다.

“괜찮은 건가?”

“그냥…… 이런 게 가족이구나 싶어서요.”

단 한 번도 가족의 정을 느껴 본 적 없는 마리즈이기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떠들던 말 속에 숨겨진 다른 말들이 그녀를 흔들었다.

“내가 당신 부인이라서, 그래서 당신이 미안해하지 않길 바라 신경 써 준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게 진짜 가족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단순한 게 아니다. 가족이니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고자 마음 써 준 것이다.

마리즈는 새삼 마호세르디가 어떤 곳인지, 서로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고, 자신이 언젠가 저 사람들 사이에 속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호세르디는 모르겠지만…….”

단제가 해 본 적 없다는 걸 티 내듯 어색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적어도 나는 그대의 가족이지. 부부니까.”

그 한마디가 마리즈에게 어떤 뜻이었는지 단제는 알까.

마리즈의 눈동자에서 결국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너…….”

저택을 나오자마자 나엘라의 눈이 가늘어지며 에스토를 노려보았다.

“오늘 같은 날은 그럴 필요 없잖아.”

“뭐가?”

“그냥 오늘만이라도 마음껏…….”

나엘라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안다. 왜 굳이 참고 넘겼느냐고, 단제도 오늘만큼은 이해했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걸 테다.

나엘라는 본인이 아끼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감싸는 편이니까.

“말했잖아. 털어 내겠다고.”

“굳이 오늘부터?”

“응. 아버지의 죽음부터.”

나엘라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하필 그 얘기를 에스토가 꺼내다니, 이건 반칙이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하나 더 있어.”

“뭐가 또?”

이미 말문이 막힌 나엘라는 에스토가 또 뭐 때문에 그러나 싶어 노려보았다.

“후회하지 않으려 했는데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어서.”

“뭔데?”

그때 누군가가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정원에서 거닐던 이였는데, 마치 에스토를 기다린 것처럼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외출 준비하고 나오라더니? 이렇게 다 같이 움직이는 거였는지는 몰랐는데.”

처음 만났을 때와 성격이 가장 많이 변한 파르로시가 그곳에 있었다.

“술 한잔하러 갈 건데 같이 가시죠.”

에스토의 권유에 가장 놀란 것은 파르로시 같았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모양새가 마치 제정신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엘라는 이마를 짚었다. 파르로시를 마호세르디로 데려놓은 건 저였다. 심지어 황후의 장례를 치르던 날,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하려 하던 그녀를 보았다.

이때까진 제대로 못 한 모양이었지만 조금씩 변하려 노력하던 모습을 본 이상 어쩔 수가 있나.

“그래, 까짓거 술집 하나 전세 내자.”

이 자리에 차기 공작인 다나한과 막내딸인 자신도 있고, 또 대공인 체드란도 있는데 술집 하나 전세 내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비록 공작령 전체가 연합군의 승리로 축제 분위기라 해도 말이다. 술집은 꽉꽉 차 있겠지만 권력을 써서 어떻게든…….

“가능할까?”

가능성이 없다는 듯 하일모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 인원으로 호위 없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술은커녕 온종일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돌아올 판이었다.

“그냥…… 저택에 있는 술 꺼내 오자. 식당에 아무도 못 오게 하고.”

결국, 그들은 몇 걸음 나가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저택 파티홀로 향한 그들은 하녀들에게 부탁해 술 창고를 열었다. 얼떨결에 파르로시까지 참가하게 된 술자리는 어느 순간 작은 연회처럼 번졌다. 마호세르디 기사들이 한 명씩 추가되고, 나중에는 공작까지 내려와 술잔을 들었다.

하인들은 연신 술과 음식을 갖다 날랐고 조용히 보내려던 하루가 시끌벅적해졌다.

하일모라가 제대로 기분 내겠다며 연거푸 와인과 독주를 번갈아 들이키더니, 중반쯤에는 얼굴이 붉어져 잔을 높이 들었다. 그 안에는 맥주와 독주가 섞인 폭탄주가 들어 있었다.

“우리의 승리를─!”

하일모라가 술을 찰랑거리며 외친 말에 이번 전쟁에 관해서는 잘 얘기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외쳤다.

위하여─!

맑은 종소리 같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곧장 다들 술을 들이켰다.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들이키던 나엘라가 순간 놀라서 체드란을 쳐다보았다. 유리 소리를 싫어한다던 그의 말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괜찮아요?”

너무 늦게 물은 것이 아니냐며 체드란이 웃는 얼굴로 손에 쥔 것을 들어 올렸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유리로 된 언더록 잔이었다.

“이제 괜찮아진 거예요?”

늦어도 너무 늦은 물음에 체드란은 대답 대신 그녀가 쥐고 있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이 전쟁의 가장 큰 공헌자, 나엘라 노헤스카를 위하여.”

나지막이 들린 그의 말이 정말로 모두 끝났음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서로 눈을 맞치고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설마 둘이서만 선창을 한 겁니까? 저 다 들었습니다.”

마호세르디 기사단장 중 크젠키 경이 끼어들며 무효라고 난장을 피웠다. 그러고는 다시 하자며 제 술잔을 높게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도 황급히 빈 잔에 술을 채워 넣고 입에 있던 음식들을 삼켜 냈다.

“이번 전쟁의 가장 큰 공헌자이자─!”

크젠키의 목소리가 식당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직도 저렇게 성량이 좋았다.

“마호세르디의 사랑받는 막내딸─!”

나엘라가 대체 무슨 건배사가 저렇게 기냐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노헤스카의 꽃 같은 대공비─!”

그놈의 꽃 같은 대공비는.

저게 다 체드란의 꽃 선물을 들은 마호세르디 사람들이 계속 놀려먹느라 뱉은 말이었다.

“나엘라 마호세르디였던, 그러나 이제는 나엘라 노헤스카인 그녀를─!”

모두가 신나서 함께 외쳤다.

위하여─!

나엘라도 이번만큼은 빼지 않고 힘껏 외쳤다. 뭐 어쩌랴. 자신이 고생한 건 맞는데.

그렇게 술을 삼키고 다시 잔을 채운 나엘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체드란에 대해 선창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속내를 눈치챈 이들이 그녀 마음대로 해 주기 싫다며 붙잡아 앉히고는 연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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