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가이드는 센티넬의 개.’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센티넬 황제가 세운 카를 제국은 가이드를 개 취급했다.
마계의 침공은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시작되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인간계를 점령한 마족들은 인간들의 마지막 성지인 카를 제국마저 집어삼키려 했고 제국은 선천적 이능력자인 센티넬들을 내세워 이를 막았다.
센티넬은 영웅, 그리고 가이드는 영웅의 시중을 드는 하인일 뿐이다.
가이드는 능력을 과하게 사용한 센티넬을 진정시켜 주는 존재지만 센티넬들은 가이드를 귀히 대하지 않았다.
센티넬이 지켜 낸 제국이기에 센티넬만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전쟁에 나가 본 센티넬들은 안다. 가이드가 얼마나 필요한, 아니, 소중한 존재인지.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도 깨닫게 된다.
특히 강대한 이능을 지닌 센티넬일수록 이를 절절하게 느꼈다.
“무너지지 마라!”
황태자보다 뛰어난 이능을 지녔다는 소문이 있는 자이거 대공 레온하르트가 불의 방벽을 더 두껍게 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버텨! 조금만 더 버텨라!”
마물들이 불의 방벽에 녹아내리자 방벽 너머에서 마족들이 진을 쳤다. 병사들이 한시름 놓으려는 그때, 한 마족이 검은 마기를 화살처럼 쏘아 불의 방벽을 갈랐다. 마기의 화살이 한 병사의 목 줄기를 꿰뚫었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진 병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부관이 나서서 레온하르트에게 외쳤다.
“각하! 이미 폭주의 전조가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원군은 없습니까? 후퇴하게 해 주십시오!”
“부상병들을 마족의 먹이로 던져 줄 셈이냐! 조금만 더 버텨라!”
전진은 일 보도 어렵지만 후퇴는 백 보도 쉬웠다. 여기서 후퇴하면 기껏 수복한 땅까지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이능을 끌어냈다. 불이 더 거세지고 방벽이 더 두꺼워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이거군은 레온하르트의 이능과 합력할 수 있는 이능을 지닌 센티넬들과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레온하르트의 이능에 힘입어 불의 방벽 너머에서 모래 폭풍을 일으켰다.
방벽 너머에 있던 마족들이 방벽을 기웃거리다가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아예 후퇴하지는 않았다.
오랜 전쟁으로 마족 역시 인간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다. 센티넬들은 가만히 두면 모든 이능을 소진해서 죽는다. 마족들은 레온하르트가 알아서 죽어 나자빠지기를 기다렸다.
‘제기랄!’
레온하르트는 입 안에서 욕설을 짓씹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끝을 알 수 없는 강맹한 이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무능력자들의 말일 뿐이다.
전쟁터에선 이능은 써도 써도 모자랐고, 이번 칼덴 공국 수복 작전은 방어전이 아니라 공성전이었기에 평소보다 더 많은 이능을 필요로 했다.
‘가이드가 있다면……!’
사실 가이드의 가이딩에도 한계는 있다. 특히 레온하르트처럼 강한 센티넬은 보통 가이드들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제대로 피로를 풀지 못한 채로 계속 이능을 사용하였고 결국, 심장에 고여 있는 근원 이능까지 쓰게 되었다. 근원 이능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생명력과 같아 가장 강력한 힘으로 여겨지지만, 이 힘을 쓰는 것은 수명을 깎아 쓰는 것과 진배없다.
심장이 점점 비어 가는 것만 같은 감각에 몸이 비명을 질렀다. 레온하르트가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를 뱉어 냈다.
“퉤!”
“대공 각하!”
검은 핏덩이가 섞인 피는 그의 몸 상태가 위험하다는 걸 알려 주는 신호였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다. 마족들은 불의 방벽이 꺼지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테니까.
“부상자를 뒤로 보내고 대열을 맞춰라!”
레온하르트는 소매로 피를 닦아 내며 외쳤다. 심장이 너무 크게 두근거려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핵심 전력을 빠르게 죽여 버리는 게 더 승리할 확률이 있을 텐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불을 제어하는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지휘관의 태도는 빠르게 전염된다. 모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려던 그때.
“모두 일어나세요.”
크고 또렷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닿았다. 아니, 딱히 목소리가 큰 것도, 또렷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목소리에 인도력이 담겨 있을 뿐.
듣는 것만으로 센티넬들의 동요를 가라앉혀 주는 목소리였다.
한 센티넬이 경외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레이디 율리아나!”
‘레이디 율리아나? 그녀는 지금 황태자 전하와 있어야 하는데…….’
황태자 알렉산더의 가이드인 율리아나는 수복한 칼덴 성에서 안전하게 있어야 했다. 황태자는 인류 최후의 보루로서 최우선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며 황태자의 가이드 역시 같은 존재니까.
군인으로서 훈련받은 가이드 부대조차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거늘, 그녀가 어떻게 이 최전방에 있단 말인가?
의문을 입으로 내기도 전에, 힘 빠진 등에 가느다란 손이 닿았다. 레온하르트는 꼴사납게 신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다 참지는 못했다.
“윽……!”
닿은 손에서부터 따스한 힘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힘은 난폭하고 압도적인 것이 아니다. 부드럽게 감싸고, 따스하게 풀어 주는 힘이다. 인도력은 곧장 상처 입은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금방이라도 사지가 조각날 듯 불안정했던 몸이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온기를 머금은 인도력이 몸 구석구석을 휘돌며 폭주하려던 세포들을 가라앉히고 격려했다.
텅 비어 가던 심장이 다시금 힘을 얻어 힘차게 이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며칠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등을 짚고 있던 율리아나의 몸이 푹 무너졌다.
“알마예르 영애!”
레온하르트는 번개처럼 빠르게 율리아나를 받쳐 안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졌지만 불의 방벽이 무너지는 일 따윈 없었다. 강 옆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끝없이 힘이 솟았다.
품에 안은 율리아나는 너무 가녀렸다. 마족과의 근접 전투에서도 절대 지지 않는 레온하르트는 이 작은 여인이 제게 누구도 줄 수 없던 단단한 안정감을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가능할 지도 모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니 그녀가 얼마나 무리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영애. 영애! 정신 차리십시오. 다시 칼덴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괜찮, 아요. 각하께선 정말…… 강하시네요. 설마 이렇게 힘을 많이 쓸 줄은 몰랐어요.”
율리아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폭주 직전의 센티넬들을 데려와 주세요. 제가 가이드하겠어요.”
“영애!”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 해요.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맑은 하늘색 눈이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것 같은 푸른 하늘. 마족이 점령한 어둠의 땅에서는 볼 수 없는 푸르디푸른 빛.
레온하르트는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 수준의 센티넬들을 데려와라!”
율리아나가 차근차근히 폭주 직전의 센티넬들을 가라앉히며 가이딩을 해 주자 부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센티넬이 아닌 병사들도 황태자의 가이드가 직접 최전방까지 와 주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것이다.
그리고 방벽 너머에서 동향을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이 하나둘씩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버티기만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겠지만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흥미를 잃은 것이었다.
“마족들이 물러난다!”
“우리가 승리했다!”
“와아아―!”
병사들의 환호를 들으며 율리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레온하르트는 율리아나를 받아 안으며 문득 제 냄새가 신경이 쓰였다. 불 냄새와 재 냄새를 풍기는 자신을 곱게 자란 영애가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아…….’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병사들에게 외쳤다.
“레이디 율리아나가 우리를 구하셨다!”
황족이자 자이거 대공이자 최전방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운 용맹한 센티넬 영웅의 말에 병사들이 화답했다.
“레이디 율리아나!”
“율리아나 만세!”
“대공 각하 만세!”
환호와 함께 병사들은 승전보를 울리며 칼덴 성으로 귀환했다.
이후 레온하르트는 칼덴 공국의 영토를 완전히 인간의 땅으로 선포하는 절차를 마친 뒤 돌아갈 예정이었다.
자이거 대공가는 제국과 인류의 방패이자 창검이다. 자이거 대공 레온하르트는 인생의 대부분을 마족과 싸우며 보냈고 정치와 가십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레온하르트는 병사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의 옆에 서 있을 때는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이 온 얼굴에 가득했다. 언제나 빛을 잃고 탁했던 눈은 메마르고 타락한 땅에서 유일한 희망처럼 반짝였다. 푸른 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웃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승리에 도취된 탓일까. 레온하르트는 율리아나로부터 시선을 떼려 애를 쓰며 잠시 죽은 동료들을 위해 묵념했다.
‘…내가 왜 이러지.’
묵념 중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얼굴에 입 안을 아프게 깨물었다.
다음 날, 알렉산더와 함께 제도로 향하는 율리아나의 행렬을 먼발치에서 보고 난 후에야, 수런거리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욕심을 버리는 것은 언제나 익숙했다.
1화.
Chapter 1. 다시 시작하는 열두 살
또각또각 높은 구두 굽이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구두 소리는 일정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튀었다. 율리아나는 넘어질 듯 말 듯 비틀거리고 휘청이면서 탑을 올랐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약해 빠진 몸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용량이 작은 폐를 쥐어 짜 댔다. 볼품없이 마른 다리는 구두를 신고 몇 층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결국 중간부터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올랐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앙상한 팔로 계단 손잡이를 거의 부둥켜안다시피 한 채로, 율리아나는 겨우 탑의 꼭대기 층에 올라설 수 있었다.
휘이잉―.
탑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창밖을 내다보자 세찬 바람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상쾌함이었다. 차가운 바람 덕분에 어지럽게 흔들리던 시야가 깨끗해져서 땅 아래의 것들이 무척 작게 보였다. 아름다운 궁들로 이루어진 드넓은 황궁은 높은 위에서 보아도 아름다웠으나 장난감처럼 작았다.
똑. 율리아나의 손등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려나?”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위를 올려보았으나 밤하늘은 야속하리만치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아서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은하수가 그대로 다 보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그럼 이 물방울은 어디서…….
후두둑.
“아.”
율리아나는 깨달았다. 빗방울이 아니었다. 이건…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나는 것도 몰랐네.”
율리아나는 손으로 두 뺨을 닦아 냈다. 얼마나 울었는지 뺨은 세수라도 한 것처럼 온통 젖어 있었다. 눈물을 닦아 내는 지금도 끊임없이 흘렀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아니, 눈물샘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고장 난 곳은 심장일 테니. 심장이 갈가리 찢겼는데 눈물샘 따위가 대수일까.
율리아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탑이 이렇게 높았나? 매일 보긴 했어도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라 이렇게 높은 줄은 몰라서 새삼 놀라웠다.
죄를 저지른 센티넬 귀족을 가두기 위해 지어진 첨탑에는 현재 아무도 머물고 있지 않았다. 다만, 첨탑 옆, 죄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 지어진 작은 건물에서 머무는 율리아나는 이 탑을 매일 보았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이 탑으로 달려왔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 황태자의 약혼녀가 번듯한 별궁도 아니고 첨탑 옆의 건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황태자비 궁이 수리 중이라 임시로 쓰라고 하더니, 애초에 그 궁을 쓰게 할 생각이 없던 거지. 그것도 안젤리카를 위해서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서 안젤리카에게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들로서는 자신이 안젤리카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잔인할 수 없다.
“죽어야 하는데….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두려웠다.
무서웠다.
억울하기도 했다.
율리아나는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땅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으로 흐르지 않고 그대로 뚝뚝 바닥으로 향해 떨어지다가 사라졌다. 공기 중으로 흩어진 것일까. 사랑을 위해 물거품이 되었다는 어느 동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도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율리아나는 눈을 감았다.
사랑은커녕 상처만 켜켜이 쌓여 가는 약혼 생활이었다. 물론, 상처를 준 사람은 율리아나가 아니라 그녀의 약혼자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인 알렉산더 카를. 제국의 모든 여자가 꿈꾸는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자리는 율리아나에겐 지옥일 뿐이었다.
‘아악! 전하…!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그만…!’
‘잘못?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자비 없이 날아오는 손길. 율리아나는 알렉산더를 떠올리면 그의 잘생긴 얼굴보다도 그의 커다란 손이 먼저 떠올랐다.
분명 처음 봤을 때부터 난폭하지는 않았다. 난폭하기는커녕 다정했다. 어미를 모르는 사생아라도 휴렌의 여동생이지 않느냐며 제법 허물없이 대해 주기도 했고, 그녀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는 휴렌과 바이델을 막아 주기까지 했었다.
정을 줄 상대가 없던 율리아나는 그 작은 호의를 구명줄처럼 붙잡았다. 그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온 마음과 온몸을 바쳐 은애했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율리아나가 알렉산더의 폭주를 막기 위해 정말 몸을 던진 순간부터.
‘빌어먹을 가이드! 가이딩을 핑계로 내 침실에 기어 들어온 것이냐? 뻔뻔하기 짝이 없군! 이 수치도 모르는 암캐 같으니!’
알렉산더는 폭언을 퍼부었고, 이를 들은 휴렌은 무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너를 책임지느라 안젤리카와 헤어지지 않았느냐. 투정 부리지 말고 그 정도는 감당하도록 하거라.’
알렉산더가 전투 중에 폭주 상태에 접어들었기에 도와달라고 한 사람은 큰 오빠인 휴렌이었다. 하지만 휴렌은 마치 율리아나가 알렉산더를 유혹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해하려 했다. 휴렌의 말대로, 알렉산더는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으니까.
‘그렇지만 왜 모두가 안젤리카를 사랑하는 건데? 알렉산더뿐만이 아니라 휴렌과 바이델까지. 도대체 왜?’
율리아나가 알렉산더와 약혼한 후부터, 휴렌과 바이델은 안젤리카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지난 무도회에서 가족인 휴렌과 바이델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인 알렉산더가 아름다운 안젤리카를 둘러싸고 크게 웃던 장면을 떠올렸다.
‘절 놀리시는 건가요? 너무해요!’
‘하하. 그대의 반응이 귀여우니 그러지.’
‘화내는 모습이 뭐가 귀엽다고 그러세요?’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체하는 안젤리카와 그녀를 둘러싼 채 다정하게 웃던 남자들.
벽의 꽃이 되어 샴페인만 축내던 율리아나는 그 무리에 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하면 매서운 눈초리들이 채찍이 되어 그녀를 사납게 때렸으니까.
“흑…. 흐흑…….”
율리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도 그렇게 다정할 수 있는데. 왜 가족인 나한테는 이렇게 잔인해? 왜 나한테는…. 애정 한 조각도 주지 않아? 왜?’
그래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를 다시 봐 줄 거라고.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었을 때도 가족들이 자신을 귀히 여겨 줄까 설렜었다. 가족들에 대한 기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았다 뜨면 기대감은 잡초처럼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율리아나에게 주는 건 증오와 비웃음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랬지.”
율리아나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칼덴 공국의 영토를 수복한 승전 연회는 성대하게 열렸다. 마지막 전투에서 율리아나는 가이드로서 크게 활약했기에 알렉산더와 가족들에게서 칭찬을 듣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을 애써 달래려 했다. 연회 끝 무렵에 더 큰 사건이 터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황제의 사망.
그 어떤 일보다 큰 사건이 아닌가. 율리아나는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알렉산더를 보필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그런 그녀를 비웃듯이 황궁 내 그녀의 처소가 아닌 후작저로 돌아가기를 명했고, 다음날 후작저로 첩지가 도착했다.
율리아나는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황제가 승하한 지금, 황태자인 알렉산더는 황제가 될 것이고 약혼녀인 율리아나는 황후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 대리인의 자격으로 율리아나 알마예르에게 황비의 품계를 내리노라.
첩지에는 율리아나를 황후가 아니라 황비로 임명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황비 첩지를 받은 알마예르 후작은 크게 노하여 율리아나를 불러 호통을 쳤다. 첩지 내용을 모르는 율리아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우선 용서부터 빌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제가 어리석어서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시기에 이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는 탓에…….”
“읽어 봐라!”
툭. 눈앞에 떨어진 황궁으로부터 온 첩지를 읽은 율리아나의 눈이 흔들렸다.
‘황비? 내가 왜 황비야? 그리고 황비라는 품계가 있었나?’
율리아나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후작이 말했다.
“황태자가 고(古)문서를 뒤져 예전에 황비라는 품계가 있었다는 걸 알아내어 다시 부활시켰다더구나.”
와그작.
심장은 종이로 만든 것일까.
마치 어린애의 손안에서 구겨지는 종이처럼 심장이 뭉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율리아나의 눈이 텅 비어 갔다.
“황비를 들인다 해도 당연히 그 여자가 황비여야지. 네가 얼마나 못났으면 가이드이자 약혼녀로서 몇 년을 봉사했는데도 이딴 대접을 받는단 말이냐.”
후작은 분노하며 율리아나를 노려보았다. 저 눈길을 받으면 율리아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아니. 하찮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끔찍하고 역겨운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땅바닥을 비참하게 기는 벌레가 된 듯한 감각. 율리아나는 뱀 앞에 선 더러운 쥐새끼처럼 움츠러들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러나 제 뜻이 아니에요. 저도 황비는 싫어요. 아시잖아요, 지금도 전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금도 그런데 황비가 되면 절 얼마나 더…….”
허울뿐이라도 좋다. 허울뿐이라도, 상대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 따위는 영영 사랑받지는 못할 것이다.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황후일 터. 황후가 될 수만 있다면, 알렉산더가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없다. 진정 사랑하는 여인을 황비로 앉히든, 애인이나 정부가 몇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그 자리마저 주지 않으려 하다니.
황비라니.
그래도 이렇게 아버지가 화를 내는 걸 보니 희망이 보였다. 아예, 이참에 이 약혼을 모두 무효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갖고 입을 여는 순간.
“아버지. 저 황비는 정말 싫―.”
“쯧. 여기서 이 첩지를 거절해 봤자 가문만 우스워질 뿐이지.”
“……네?”
알마예르 후작은 율리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차갑게 품평하는 눈. 이 물건의 가격이 얼마일까, 감정하는 눈이었다.
와장창―!
그 차가운 눈빛에 율리아나에게 남아 있던 작은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후작이 입술을 열어 최종 판결을 내렸다.
“황비가 황후에 비해 떨어지는 자리이긴 하나 황제의 부인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입궁을 준비하도록 해라.”
“아버지!”
“듣기 싫으니 나가라.”
율리아나가 힘이 빠져 일어나지 못하자 후작은 하녀들을 시켜 그녀를 데려가게 했다. 질질 끌려 나가며 본 알마예르 후작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후련해 보였다.
“드디어 저 물건을 눈앞에서 영영 치워 버리는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와르르, 율리아나의 비참한 생을 지탱해 주던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졌다. 이제 율리아나의 생은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섰다.
휘이잉―.
높은 탑의 꼭대기에는 세찬 바람이 불었다. 창틀 위로 올라선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눈앞이 핑 돌았다. 율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느끼지 못했다. 다리가 벌벌 흔들리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이 비참한 생을 더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황비가 되면, 더 비참해질 뿐이야. 알렉산더는…… 나를 때려죽일지도 몰라. 아니, 죽일 거야. 시간문제겠지. 내 남편이 나를 언제 죽일까 벌벌 떨며 살고 싶지 않아. 나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는 가족의 애정을 구걸하며 살고 싶지도 않아.’
율리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첨탑의 난간 위로 올라서자 사방이 캄캄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마저 검었다. 위도 아래도 모두 새까만 어둠.
‘캄캄해. 어두워. 무서워. 하지만, 이번만 힘내면 돼.’
이번만 힘내면, 더는 힘내지 않아도 된다.
힘내서 버티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버틸 뿐이기만 한 삶은 싫다.
살짝 미소 지은 율리아나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공중을 유영했던 몸이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죽는 건 무서웠지만 죽은 후에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먼저 떠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 무섭지 않았다.
‘엄마. 이제 엄마 곁으로 가요.’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며 율리아나는 환하게 웃었다.
퍽!
제 머리에서 나는 것 같지 않은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의식이 멀어졌다. 새빨갛게 물든 시야가 가물거렸다. 천천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게 죽는 거구나. 생각보다 괴롭지 않네.’
지금 느끼는 고통보다, 아버지의 냉대가 더 아팠다. 휴렌의 싸늘한 눈초리가, 바이델의 폭언이 더 아팠다. 안젤리카에겐 더없이 다정한 남자인 알렉산더가 제게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해지는 남자인 게 더 아팠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 아팠다.
‘고통 없는 세계로 가고 싶어…….’
이런 선택을 한 죄인을 신께서 거두어 주시길 바라는 것도 사치일까. 죽어 가는 와중에도 눈물이 흐르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던 찰나.
“……리아나! 율리아나!”
누군가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급히 자신의 상처를 틀어막으려 애를 쓰는 몸짓이 느껴졌다.
‘누굴까? 설마 아버지? 오빠?’
더 궁금해할 새도 없이 율리아나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암전.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