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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들의 목줄을 손에 쥐고-31화 (31/120)

31화.

“잠시 앉아 계시면 다과를 내오겠습니다.”

붉게 물든 눈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집사는 황급히 응접실을 나갔다. 발라고프 백작이 자신의 부재 시 율리아나가 왔을 때 해야 할 일을 이미 지시해 두었기에 고용인들은 물 흐르듯 접대 준비를 했다.

하녀들은 매일같이 버려지던 호화로운 디저트와 차를 종류별로 내왔고 응접실은 곧 꽃이 가득 든 화병들로 꾸며졌다. 율리아나는 당황하며 집사를 바라보았다.

“불편하신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그런 부분 없어요. 그런데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아가씨께 과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껏 누리시지 못했던 것을 맘껏 누리셔야지요.”

집사의 공손한 말에 율리아나는 얼떨떨해하며 일단 집사가 우려 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딸기향이 퍼졌지만 혀끝에 닿는 맛은 담백했다. 블렌딩이 궁금할 정도였다.

“차 맛이 좋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나이 지긋한 집사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앞 접시에 다과를 올려 주었다.

차를 홀짝이며 밀푀유를 한 입 떠먹는데,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쿵!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가 조금 뒤에 문이 열렸다.

“……?”

문은 열렸는데 들어오는 이가 없어서 문 주변을 보니 파벨이 문틈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누님이 오셨다고……. 아!”

파벨의 시야에는 율리아나가 꽃병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었다. 율리아나를 발견한 파벨이 상기된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누님을 뵈어서 반갑습니다. 파벨 발라고프입니다.”

집사 앞이라고 처음 보는 척하는 모습이 귀엽고 앙큼했다. 율리아나는 일어나서 살짝 치마를 들어 올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발라고프 영식. 율리아나 알마예르입니다. 공언된 관계는 아니지만, 누이로 여겨 주신다면 저도 발라고프 영식을 동생으로서 아끼겠습니다.”

검술 연습을 하고 왔는지 미약한 땀 냄새가 났다.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자 파벨은 얼른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파벨은 손을 꼬물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샤라고…….”

“네?”

“파샤라고, 불러주세요. 발라고프 영식 말고요. 존대도, 쓰지 말고…….”

‘파샤? 파벨의 파인 건 알겠는데 샤는 뭘까?’

의아해하면서도 율리아나는 끄덕였다.

“응, 파샤.”

파벨의 얼굴이 밝아졌다. 집사가 율리아나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이름 첫 글자 뒤에 샤를 붙여 애칭을 만드는 것은 옛 왕국 시절의 풍습이랍니다.”

“그렇군요.”

옛 왕국 시절의 풍습. 발라고프 백작저의 외양은 다른 귀족 저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부는 조금 독특했다. 응접실의 벽지나 실내 장식도 그렇고, 소품도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묻어났다.

‘발라고프가 속해 있던 옛 왕국은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도 제국과 조금 달랐다고 했지.’

율리아나는 발라고프의 장서관이 궁금해졌다. 책을 사랑한다는 미하일은 얼마나 다양한 책을 모으고 있을까? 작가에 관해서도 많이 알겠지? 내 침대 밑 일기장을 누가 썼는지도 알고 있을까?

미하일 본인도 가이드인 데다가 가이드 부대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그가 지닌 지식은 정말 대단할 터.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파샤.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아…….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괜찮아. 땀이야 금방 마를 텐데.”

“냄새 날 텐데…….”

“애한테서 냄새가 나 봤자 얼마나 난다고.”

군인들의 땀 냄새도 맡았던 율리아나다. 그녀는 땀 냄새 걱정을 하는 파벨이 너무 귀여워서 쿡쿡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손수건에 코를 묻고 킁킁거려 봐도 기분 나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거 봐. 냄새 안 나.”

“누님…….”

파벨은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빨갛게 되어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래도, 금방 씻고 올게요. 잠시만요.”

파벨은 얼마 전 율리아나의 방을 찾아왔던 그 날쌘 몸놀림으로 후다닥 응접실을 나갔다. 집사가 율리아나에게 살짝 조언했다.

“누님께 잘 보이고 싶은 사내에게 너무하셨습니다.”

“그, 그런가요?”

고작 10살짜리인데 사내라고 할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집사의 기침 소리와 함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소리도 섞여 들렸다.

“뭐? 율리아나가 왔다고?”

우당탕! 커다란 소리가 난 뒤 곧 문이 열리며 발라고프 백작이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이 파벨이 우당탕 응접실로 들어올 때와 너무 닮아서 율리아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율리아나!”

큰 소리로 율리아나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온 발라고프 백작은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언제 뛰었냐는 듯 얼른 옷매무새를 다듬은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율리아나. 잘 지냈니?”

“안녕하세요, 백작님.”

“집에 잘 왔다. 뭐라도 좀 먹었니?”

명백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기뻐 보였다. 그는 심지어 바로 뒤에 파벨이 다가온 것조차 뒤늦게 눈치챘다.

“파벨도 왔구나.”

“네, 아버지.”

정말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온 파벨은 표정 없이 꾸벅 인사한 뒤 율리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라고프 백작과 미하일을 번갈아 본 율리아나는 신기함에 눈을 깜빡거렸다.

꿀빛 금발에 약간 채도가 다른 녹색 눈. 발라고프 백작과 파벨은 서로 나이만 다른 같은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고 파벨은 발라고프 백작을 많이 닮았으니까, 넷이 함께 있으면 단란한 가족처럼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족 놀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물론 보러 오겠다고 파벨에게 한 약속을 지키러 온 것도 맞지만,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다.

파벨은 율리아나의 옆자리에 앉았고 미하일은 율리아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조금 숨을 고를 시간을 준 뒤, 율리아나는 적당한 때를 봐서 본론을 꺼냈다.

“백작님,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율리아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단다. 물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백작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작게 호흡을 고른 뒤 미하일의 눈을 응시했다.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한 녹색 눈 두 쌍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가이딩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가이딩?”

발라고프 백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율리아나, 가이드로 태어났다고 해서 꼭 가이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특히 귀족 영애는―.”

“그건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가이드로 살고 싶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니?”

“네. 가이드로서 전쟁에 나간다는 뜻이죠.”

미하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건 파벨도 마찬가지였다. 부끄러워할 때에도 약간 멍해 보이던 파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율리아나를 보았다.

“전쟁이라니, 네가 왜! 귀족 영애가 왜 전쟁에 나간단 말이냐. 절대 안 된다.”

“안 되고 되고는 제가 정하는 거예요. 귀족 영애가 전쟁에 나가면 안 된다는 명문화된 법은 없으니까요.”

“율리아나!”

“…….”

율리아나는 발라고프 백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 없는 시선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미하일은 자신의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율리아나의 시선은,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내 뜻을 막나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닐 수 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율리아나는 그저, 말싸움을 하기 싫어서 입을 다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하일은 알고 있었다. 율리아나가 진짜로 그에게 그렇게 말한다 해도 자신이 할 말은 없다는 것을.

아버지니까? 키워 준 적도 없는데 무슨 아버지란 말인가. 존재도 몰랐다는 말은 변명일 뿐이다.

‘애초에 내가 니엘라에게 굳센 믿음을 주었더라면 그녀가 말없이 떠나지 않았을 테지.’

당시 니엘라가 했던 수많은 고민을 미하일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임신까지 한 몸으로 익숙한 수도를 떠났을 그녀를 생각하면,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딸을 낳아 홀로 있는 힘껏 길렀을 걸 생각하면, 뼈가 녹을 것 같았다.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힘들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니엘라의 딸도 다른 형태의 힘든 길을 걷겠다니.

제국의 온갖 좋은 것만 즐겨도 모자랄 소중한 아이인데 말이다.

‘이 아이도. 이렇게 단단해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율리아나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법 부자인 친부를 만났는데도 들뜬 기색 하나 없다.

아니, 후작가의 고용인들을 매수하니 고귀한 알마예르 후작이 내가 네 외삼촌이라며 후작저에 데려왔을 때조차도 기뻐하거나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한다.

평민으로 자랐다면 귀족 영애가 되는 것이 기뻐야 할 텐데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환경이…… 율리아나를 어린아이답지 않게 만든 거겠지.’

그래서 ‘내가 네 아버지니까 참견할 거다.’라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언젠가 딸이 자신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도록.

‘그래도 지금도 내게 부탁하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안 좋은 시작은 아닐 거야.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미하일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최대한 율리아나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바람에 입가에서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가이딩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라. 음……. 넌 아직 어리니까 참전 경험보다는 이론 쪽에 빠삭한 사람으로 구해 보도록 하마.”

“감사해요.”

율리아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기쁨과 안도가 섞인 미소를 보자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미하일은 율리아나에 마주 웃어 주며 머릿속으로 자신의 가이드 부대원들의 리스트를 떠올렸다.

‘절대 여자. 절대 여자 선생으로 골라야 해!’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후원자의 딸에게 헛짓거리를 하지 않겠지만, 또 모른다. 작고 어린 여자아이는 쉬운 먹잇감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율리아나를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긴다거나, 화풀이 대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딴 짓을 하면…… 뼛조각 하나 남지 않게 죽여 버릴 거지만.’

이미 알마예르 후작가에서 구한 선생이 율리아나에게 해코지를 할 뻔했다는 걸 모르는 미하일이 속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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