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율리아나와 비앙카는 나란히 만찬에 불참했다. 아까 그 난리를 목격한 사람이 후작이니, 참석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두 사람은 루시와 하이디가 가져다준 식사로 배를 채운 뒤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아, 좋다.”
뜨끈한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몸을 퐁당 담그자 긴장했던 근육이 사르르 풀어졌다.
비앙카는 처음엔 너무 뜨겁다고 싫어했지만 물에 거품을 풀자 호기심을 보이며 들어와서 물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비앙카에게 물을 뿌려 같이 장난을 치며 비앙카의 몸을 살폈다.
‘……이상한 부위에, 사라져 가는 멍 자국들이 있네.’
애들이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뛰어다닌다고 하기엔 좀 많아 보였다.
그나마 사라져 가는 멍이라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비앙카의 행동들을 생각하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자, 아가씨들. 로션 발라드릴게요.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하녀들이 머리며 몸을 뽀송하게 말려 주고 로션까지 발라 주자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자, 여기서 같이 자자. 평소엔 불을 켜 두고 자?”
“응……. 작은 등을 하나 켜 둬.”
“그래. 잘 때는 유모랑 같이 자니?”
“아니? 비앙카는 혼자 자. 유모는 할 일이 많아서 같이 못 잔대.”
“……그렇구나.”
6살이면 혼자 잘 나이인가. 어린 시절을 귀족가에서 보내지 않아서 이 부분은 판단하기 힘들었다.
율리아나와 비앙카는 넓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이 오지 않는지 바스락거리는 비앙카에게 율리아나가 다가갔다.
“잠이 안 와? 손잡아 줄까?”
“응……. 졸린데, 무서워.”
비앙카에게 다가간 율리아나는 비앙카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인도력을 불어 넣었다. 비앙카는 몸속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기운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어?”
“괜찮아. 무서운 게 아니야. 언니가 하는 거야.”
“알았어……. 아, 따뜻해.”
스르륵 눈을 감은 비앙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따스한 힘이었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힘이라는 걸. 아니, 자신을 살리는 힘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물로도 풀리지 않았던 피로가 저절로 스러졌다.
“이게… 뭐야? 좋아. 따뜻해. 행복해.”
“아무나 느낄 수 있는 힘은 아니야. 비앙카가 센티넬로 발현할 아이라서 느낄 수 있는 거야.”
“그렇구나.”
가이드는 가이딩을 할 때 센티넬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처음 가이딩을 받는 비앙카는 놀라워하면서도 금세 적응하고 있었다. 가이딩이 제게 좋은 행위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리라.
그런데 이 느낌은.
‘……비앙카는 발현 전이라 이능을 쓴 적이 없을 텐데 왜 인도력이 많이 줄고 있지?’
이론적으로 센티넬은 이능을 쓴 후에 가이딩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능을 쓰지 않으면 가이딩도 필요 없다.
그런데 비앙카의 몸은 율리아나의 인도력을 제법 소모하고 있었다. 마치 이능을 쓰는 센티넬처럼.
그때, 율리아나의 잠옷을 빌려 입느라 헐렁한 목깃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같이 목욕할 때 보았던 멍이, 사라지고 있었다!
번개와 같은 깨달음이 왔다.
‘맙소사, 비앙카의 이능은 치유력이었어!’
비앙카는 지금껏 상처 입은 제 몸을 자가 치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 많던 멍들. 비앙카가 치유 이능을 지닌 것을 감안하면 원래는 더 심했을 터였다.
아까의 의문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다가온 손을 두려워하던 모습, 자신의 엄마와 유모를 두려워하여 경기를 일으키던 모습까지.
‘로젤리타와 유모. 둘 중에 누구지?’
율리아나의 하늘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때리다니.’
충격적이었다.
비앙카는 모두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했다. 사생아인 자신과는 다르게.
물론 지금은 자신이 사생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회귀 전 전생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다운 후작 부인은 자신의 딸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었고 휴렌과 바이델도 어린 이복동생을 지극히 아꼈다.
‘비앙카가 생각난다는 이유 하나로 안젤리카를 아낀다고 했으니까.’
지끈―.
예전 일을 떠올리자 심장께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저어 악몽 같던 옛날 일을 떨쳐 내며 비앙카의 문제에 집중했다.
‘만약 유모가 비앙카를 학대하고 있었다면, 후작 부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설마 후작 부인과 유모 두 사람이 모두 비앙카를 학대하던 것은 아니겠지.
‘……제발 그건 아니면 좋겠다.’
적당한 수준의 체벌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옷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을 때리는 유모라니. 차라리 후작 부인이 비앙카에게 무관심해서 모른 게 나을 것 같다.
율리아나는 한숨을 쉬며 비앙카를 재웠다. 이미 뜨끈한 목욕과 가이딩으로 비앙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금세 골아떨어졌다.
“후훗.”
작은 입을 새처럼 벌리고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통통한 뺨은 씻고 나와서 발그레했고 속눈썹을 길게 내려 깐 모습은 마치 성화 속 천사님처럼 사랑스러웠다.
요즘 매번 심통 난 얼굴을 보다가 이렇게 풀어진 얼굴을 보자 마음 속 앙금이 사르르 녹았다.
“편하게 자자.”
비앙카를 안아서 베개 위로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주었다. 율리아나도 눈을 감고 잠들려는 찰나.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샤?”
율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늘따라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비앙카를 깨우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서 창문으로 가자 예상대로 창문 뒤에 파벨이 있었다.
‘또 혼내려나? 별거 아닌데.’
파벨은 설레는 맘으로 창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최대한 쫑긋 세우게 되었다.
혹시 벌써 자나? 아니면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괜히 초조했다.
누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며칠간 왜 그리 허전하던지. 율리아나의 존재도 모르던 때는 이런 감정도 몰랐는데, 한번 누나를 갖게 되니 곁에 없는 게 너무 허전했다.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왜 알마예르에서 누님을 데려간 거지? 누님도 알마예르들보다 발라고프에서 살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데.’
파벨은 휴렌과 바이델을 알았다. 휴렌은 나이 차이가 꽤 커서 딱히 말을 섞은 적은 없지만 바이델은 비슷한 나이 대 모임에서 얘기도 몇 번 나눠 본 적이 있다.
콧대 높고 재수 없는, 전형적인 센티넬 귀족.
이야기를 들어 보니 휴렌은 바이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냥하고 걱정 많은 누님이 그런 놈들을 좋아할 리가 없지.’
근거 있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창문이 열렸다.
“누님!”
화악, 무표정했던 파벨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볼 살이 그를 제 나이 대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율리아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오는 거 위험하다고 했지.”
“그치만……. 보고 싶었는걸요.”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면서 불쌍한 척을 했다. 다른 아이들이 이렇게 조르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한 번도 똑같이 해 본 적 따위 없었는데. 율리아나의 마음을 녹일 수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편지를 보내면 되잖아.”
“이미 며칠 참았어요. 편지를 보내면 또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몰래 침입하는 건―.”
“언니, 누구야?”
언제 깨어났는지 비앙카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율리아나를 불렀다.
파벨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앙카를 보았다. 자신보다 서너 살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
‘저 애가 후처가 낳았다는 딸인가? 그런데 왜.’
“왜 저 아이가 누님 방에 있지요?”
“아, 친해지려고 오늘은 함께 자려고.”
“친해지다니. 이유가 뭐죠? 누님 동생은 저인데, 왜 다른 애랑 친해지려고…….”
“응?”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비앙카가 율리아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내 언니야! 비앙카가 동생이야!”
“웃기지 마. 누님의 동생은 나밖에 없어.”
파지직.
비앙카와 파벨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애처로운 표정을 지운 파벨의 얼굴은 율리아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서늘하고 무서웠는데도, 어린 비앙카는 겁도 먹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마주 노려보았다.
율리아나는 당황하며 아이들을 중재했다.
“처음 보자마자 싸우다니. 그러지 마.”
“누님. 저랑도 같이 자요. 그래 주실 거죠?”
“그건 좀…….”
“언니는 나랑 잘 거야, 바보야!”
“백작저에 와서 자기 그러시면 제가 여기로 올게요. 정식으로 편지를 보내면 될까요?”
다급하게 말하는 파벨을 보며 율리아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랑 같이 자는 게 뭐라고 저렇게 필사적으로 같이 잘 방 안을 쥐어짜고 있는지.
“그래. 내가 발라고프 저택에 가든지 네가 알마예르 저택에 오든지 하자.”
즐거운 마음에 흔쾌히 수락의 말이 나왔다.
‘사실 파샤 말이 맞긴 하니까. 비앙카는 내게 사촌 동생이지 친동생은 아니니까 파샤를 더 챙기는 게 맞지.’
알마예르에게 버림받고 삶을 포기했던 율리아나로서는 파벨에게로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비앙카의 일을 해결한 뒤에.’
어린아이가 학대를 당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이 일을 해결하면 그 뒤로 딱히 별달리 할 일도 없으니 발라고프 백작저로 쉽게 놀러갈 수 있으리라.
‘내가 이겼어.’
씨익 웃는 파벨을 보며 비앙카는 분해서 발을 굴렀다.
“이익! 너 싫어! 가!”
“흥. 오늘은 이만 가지만 다음엔 혼내 줄 거야, 알마예르 꼬맹아.”
“비앙카는 꼬맹이 아니야!”
“꼬맹이 맞아.”
싹둑 비앙카의 말을 자른 파벨은 다시 또 꿀 떨어지는 눈으로 율리아나를 보며 웃었다.
“그럼 누님 좋은 꿈 꾸세요. 내일 편지 보낼게요.”
“알았어. 조심히 가.”
“다른 말은 안 해 주시나요?”
“응?”
“나는 했는데.”
그게 뭐지? 고개를 갸웃하던 율리아나는 파벨의 말뜻을 깨닫고 “아!”하고 외쳤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파벨의 흐트러진 옷깃을 여며 주었다.
“너도 잘 자, 파샤. 좋은 꿈 꿔.”
“……네.”
파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앗, 떨어졌다! 그래도 움직이네?”
비앙카는 창틀에 매달려서 파벨을 구경했다. 율리아나는 파벨이 멀어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이제 진짜 자자.”
“응, 언니랑 같이 잘래.”
비앙카는 눈을 비비다가 율리아나의 옆에 딱 붙어서 잠들었다. 율리아나는 제 옆구리를 따끈하게 데우는 온기를 느끼며 잠들었다.
‘파벨은 잠버릇이 어떠려나?’
일단 비앙카는 별로 얌전하지 않았다. 율리아나는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비앙카를 피해서 침대 구석에 몸을 말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