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래? 이미 정해진 건 아니지?”
“응.”
얼떨떨해하던 율리아나는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아. 지크는 귀족 가문의 전속 가이드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지.’
아카데미를 졸업한 가이드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국군 소속 가이드와 귀족 가문 소속의 가이드.
무상 교육을 받은 대신 제국군 소속 가이드로서 3년을 의무 종군해야 하긴 하지만, 이 의무기간이 끝나면 자유롭게 거취를 정할 수 있다.
(참고로 발라고프의 가이드 부대는 발라고프 가문 소속의 가이드 부대지만 제국군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중간적인 성격을 띤다.)
강한 센티넬 가문일수록 뛰어난 가이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귀족 가문들은 아카데미의 우수 졸업생들에게 끝없이 러브콜을 보낸다.
현재 지크에게도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오고 있겠지만 전속 계약은 쉽게 무를 수 없는 이상 신중하고 싶은 모양이다.
데뷔탕트 무도회는 신년회에 버금가는 큰 행사이니 미래의 고용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터.
평민인 지크가 자신과 함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이델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바이델뿐만이 아니라 백작님이랑 파벨도…….’
휴게실에서 살벌하게 이를 갈던 미하일이나 언성을 높이던 바이델을 떠올리니, 지크를 파트너로 데려가는 건 오히려 그에게 못 할 짓 같았다.
“글쎄. 일단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이럴 땐, 핑계 돌려막기가 최고지!’
율리아나가 일단 둘러대자 지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아쉽네.”
“응?”
“데뷔탕트 파티 같은 때가 아니라면 내가 네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없잖아?”
“아…….”
그 말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제일 좋았던 건,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귀족 영애가 왜 굳이 아카데미까지 와서 가이드로 살려 하냐고 수군거리는 말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그것도 나름 친하다고 생각한 지크한테 편향된 말을 듣자 화가 치솟았다.
“기회가 없다는 뜻은 내가 여자 가이드니까, 당연히 남자 센티넬들과 파트너를 할 거라서?”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나간 말에 지크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두 손을 저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부정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내 말은―.”
목이 타는지 손에 든 술을 벌컥 들이켠 뒤 말을 쏟아 냈다.
“아름다운 미모에 빛나는 재능, 게다가 뛰어난 가문까지. 율리아나. 누군들 너를 가만히 놔두겠어?”
갑작스러운 상찬의 말에 율리아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괜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은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는 시선은 전생과 달라졌는데, 나만 계속 과거에 갇혀 있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억울했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일인 데다 현재는 너무나 달라져 버렸으니 누군가한테 하소연할 수도, 원망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크가 한 말은 너무 과했다. 율리아나는 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 그 정도는 아닌데…….”
“어떤 부분을 부정하고 싶은 건데? 빛나는 재능? 아니면 아름다운 미모?”
지크가 짓궂게 묻자 율리아나는 버벅거리며 답했다.
“두, 둘다!”
“오, 율리아나. 미모야 너도 거울을 보니 알 테고. 빛나는 재능? 마법학과와 협업해서 최초로 가이드석을 개발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그건 인정할게.”
가이드석의 발명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율리아나는 벅찬 기분에 휩싸였다.
회귀 후 이룬 성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첫 번째는 엄마의 생명을 연장한 것, 둘째는 비앙카의 죽음을 막은 것, 마지막은 가이드석을 발명한 것이다.
율리아나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가득해지자 지크도 흐뭇하게 웃었다.
“드디어 인정하는구나. 처음엔 ‘에테르를 연구하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야.’라고 겸양을 떨었으면서.”
“지크! 그만 놀려.”
“어이쿠. 무서우니 그만해야지.”
지크는 엄살을 떨며 율리아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율리아나는 든 잔을 지크의 잔에 부딪힌 후 꼴깍꼴깍 마셨다.
가이드학과 내에서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마당발인 지크는 훈훈한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모두의 인기인이다.
이것만 보면 바이델과 전혀 다른데, 툭툭 놀리는 화법이 왠지 바이델과 비슷한 느낌이라 편하게 말을 섞게 된다.
“지크, 어딨어?”
“간다, 가! 율리, 술 들어간 건지 확인하고 마셔.”
“알았어.”
지크가 다른 동기들이 있는 테이블로 떠나고 율리아나는 적당히 먹고 마시며 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니 이제 시작이었다. 군 가이드로서의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물론. 그전에 데뷔탕트부터 치러야 하지만.’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에 율리아나는 남은 잔을 단번에 비웠다.
*
“이거 별론데.”
“네? 레이디께서 다 확인하셨던 디자인인데…….”
“그래. 그런데 별로라고. 다시 못 만들어?”
제국에서 가장 값비싼 사치품이 모이는 거리, 엘로즈 스트릿의 키스 의상실은 한 손님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안젤리카 채텀.
황태자의 오랜 연인으로 사교계를 휘어잡는 백작 영애가 주문한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실의 대표이자 메인 디자이너인 키스는 쩔쩔매며 안젤리카의 시중을 들었다.
“그럼 다른 디자인을 가져오겠습니다. 우선 이 디자인 북을 보시면…….”
“이제 와서 언제 새 드레스를 맞춰? 무도회가 코앞인데. 아니면 저 드레스는 어때? 나한테 딱 어울릴 것 같은데. 저거 가져와 봐. 좀 입어봐야겠어.”
“죄송합니다만, 저건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드레스입니다.”
안젤리카의 눈매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키스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 완성이 되어 픽업만을 기다리고 있는 드레스를 다른 손님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그게 누군데?”
“네?”
“누구냐고. 내가 갖고 싶어도 못 줄 상대야?”
“그건…….”
키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드레스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안젤리카의 마음은 상했고, 키스가 모르는 사이 상황은 끝이 나 있었다.
“뭐야. 지금 재 보는 거야? 저 예약자랑 나 중에 누가 더 높은가? 하! 지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닙니다, 아가씨! 절대 그런 게 아니―.”
“됐어. 이 샵의 운영 방식에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그렇지만, 이제 이 샵에서 황궁에 납품할 물건은 없어질 것 같네.”
그 말에 키스의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네? 아, 아가씨!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무슨 드레스든 다 원하시는 대로……!”
“싫어. 누구를 거지로 알아? 건방지긴.”
안젤리카는 콧방귀를 뀌며 샵을 나왔다. 키스가 울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안젤리카를 따라 다니는 기사가 그를 거칠게 제압했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려는 건가.”
“아악!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크윽!”
“오해받을 행동 하지 말도록.”
키스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떠민 기사는 안젤리카를 호위하며 다른 가게로 떠났다.
“이럴 수가…….”
이제 막 유명세를 얻어 자리 잡기 시작한 신진 디자이너 키스는 황궁에 납품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절망했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빚까지 내며 엘로즈 거리에 본점을 내었는데 열매가 여물기도 전에 싹부터 뽑혀 나가다니.
그러나 안젤리카는 자신의 감정에 취해 타인의 생계나 꿈 따윈 알 바 아니었다.
‘흥. 그 드레스가 패털리 자작 영애 건 줄 모를까봐? 고작 자작 영애 따위를 신경 쓰느라 나를 홀대하다니. 일이 다 끊겨도 싸!’
감히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한 영애를 비호하다니, 저 의상실은 꼭 망하면 좋겠다.
쿵쿵쿵! 신경질적으로 걷는 안젤리카는 주변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호위 기사가 누군가가 안젤리카에게 부딪히기 전에 먼저 나서서 사람들을 밀쳐내었다.
“악, 뭐야?”
“길을 막지 마라.”
호위 기사 쟝이 황궁 기사 단복을 입고 있는 만큼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기사는 자괴감을 느꼈다.
‘이러려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게 아닌데…….’
쟝은 안젤리카를 보았다. 아름다운 영애지만, 호위를 하면서 느낀 것은 성격은 얼굴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니 황제 폐하께서 약혼을 반대하시지.’
황제의 반대로 황태자의 약혼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공공연했다.
처음엔 그저 아들을 결혼 전까지 자유롭게 풀어 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인 줄 알았으나,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여론이 변했다.
‘혹시 안젤리카 영애에게 뭔가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안젤리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변했고, 안젤리카는 이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게다가.
알렉산더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의 수가 눈에 보이도록 늘었다. 황제에게 자신의 딸이나 조카딸을 선보이는 귀족들도 늘어났다.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 하는 것이다.
심지어 호위 기사인 쟝까지 ‘이 영애보다는 내 사촌 동생이 더 나은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할 정도니 다른 귀족들은 어떻겠는가.
“신문 사세요. 신문이요! 아카데미 졸업생 특집 기사가 포함되었습니다! 단돈 오 쿠퍼!”
거리에 나와서 신문을 파는 아이는 아주 똑똑하게도 뻣뻣한 나무판에 신문의 하이라이트 페이지를 붙여서 흔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어제 졸업식이었지.”
쟝이 중얼거렸다. 사촌 동생의 졸업은 아직 몇 년이나 남아 있다. 만약 어제 졸업했다면 사촌 동생을 핑계로 화제의 레이디를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쟝의 중얼거림에 안젤리카가 관심을 보였다.
“졸업식? 아카데미 졸업식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어제 황도 로열 아카데미 졸업식이었죠.”
눈치가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안젤리카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어서 잘 몰랐던 쟝이 ‘그’ 이름을 꺼냈다.
“알마예르 영애도 어제 졸업했다고 합니다. 아, 특집 기사에 사진도 실려 있네요. 옆에는 기사 바이델이군요. 기사 바이델은―.”
“그 알마예르 영애? 그 사생아를 말하는 건가요? 하, 어이없네.”
바이델이 자신의 후배라는 말을 하려던 쟝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정신이 나갔어. 주목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야. 알마예르에서 받아 줬으면 얌전히 있다가 결혼이나 할 것이지. 아, 구혼하는 남자가 없어서 공부를 하나?”
안젤리카의 이죽거리는 목소리엔 가시가 가득했다. 쟝은 사촌 동생에게 들은 알마예르 영애의 이야기와 안젤리카의 추측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의아했다. 그러나 지금 그걸 설명했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쯤은 눈치 없는 그로서도 알 수 있었다. 쟝은 얼른 저 멀리 있는 가게로 뛰어가서 문을 열었다.
“아가씨. 너무 오래 걸으셨습니다.”
“그래요. 여긴 좀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면 좋겠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