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며칠 뒤, 율리아나는 공방에서 보낸 심부름꾼을 통해 가공이 완료된 보석들을 받아 보았다.
원래 이렇게 빨리 완성이 되진 않는데 율리아나가 공방에 갔을 때 별생각 없이 “가족들에게 선물할 거리서.”라고 말했더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완성이 되었다.
‘일부러 재촉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네.’
잔금을 치를 때 사례금을 더 얹어 주면 조금이나마 보상이 되겠지.
벨벳 함들을 열자 어두운 색의 쿠션 위로 보석들이 줄지어 있었다.
비앙카에게 줄 팔찌는 알알의 보석 사이로 작은 백금 구슬들을 넣어 만들었다. 사슬 참을 매달아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귀여웠다.
알마예르 후작과 휴렌의 가이드석은 검에 매다는 장식 참으로 만들었다. 장식 매듭에 가이드석을 달고 수술을 길게 늘어트리니 제법 근사해서 율리아나는 완성품을 보고 뿌듯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자이거 대공의 가이드석은, 일단 세 사람의 것에 비해 길쭉해서 어떻게 가공을 할까 고민을 했다.
공방 주인은 끝에 장식을 달아 목걸이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했지만 목걸이는 살에 닿는 느낌이라… 왜인지 부끄러웠다. 율리아나는 고민하다가 너무 화려하지 않은 부토니에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그렇게 완성된 부토니에는 길쭉한 붉은 오팔을 금잎사귀들이 감싸는, 붉은 검을 형상화한 모양새였다.
‘너무 과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려한 모양새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 부토니에를 한 레온하르트를 상상하니 흡족했다.
레온하르트의 붉은 머리칼과 황홀한 금안에 이 부토니에는 맞춘 듯 잘 어울릴 것이다.
‘브로치도 잘 쓰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자신의 아이스 오팔 브로치를 내려다보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관함을 닫았다.
그날 저녁.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휴렌은 서류에 파묻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답했다.
“들어와.”
당연히 보좌관일 거라 생각한 그는 달칵, 문이 열리고 나서도 상대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미간을 찌푸렸다. 바쁜 거 알면서 왜 이렇게 미적거리지?
“용건은?”
“음…. 식사도 거르셨다고 들어서, 요깃거리를 가져왔는데요.”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율리아나가 머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두 손에는 음식이 가득한 쟁반을 들고.
책상 위에는 서류가 가득해서 쟁반을 놓을 자리가 없어 보였다. 율리아나는 책상이 아니라 소파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 두고 휴렌을 보았다. 휴렌은 멍하니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책상이 진동하며 맨 위의 서류 한 장이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끼니는 거르지 마세요. 샌드위치라도 챙겨 드세요.”
율리아나는 휴렌의 앞으로 샌드위치 접시를 내밀었고 휴렌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우걱우걱 샌드위치를 먹었다.
‘얘가 웬 일이지? 뭐 부탁할 거라도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괜히 마음 한구석이 설렜다. 그는 율리아나가 무슨 부탁을 하든 들어줄 거라고 다짐했다.
샌드위치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휴렌이 율리아나가 내민 아이스티까지 벌컥벌컥 들이켠 후 물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뭐지?”
“네?”
“편하게 말해. 뭐든….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는 들어줄 테니까.”
해 줄 수 있는 선이라고는 했지만, 후작 대리로서 월권을 행사하게 되더라도 뭐든 들어주리라 결심한 후였다.
샌드위치가 무슨 맛인지 느끼지는 못했지만 배 속은 든든했다. 그건 단순히 음식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리아나는 민망해하며 뺨을 긁적였다. 어지간히 어려운 부탁인가 본데. 대체 뭐지? 휴렌이 고민할 때, 율리아나는 길쭉한 벨벳 함을 내밀었다.
“부탁할 건 없고, 이건 제가 만든 가이드석인데… 일단 검 장식으로 만들어 봤어요. 그렇지만 꼭 검에 달지는 않아도 되고요.”
“…가이드석이라고? 전하께 드린 것과 같은?”
“네. 황태자 전하께 전달한 것과 아주 같지는 않은데, 둘 다 제가 만들긴 했으니까.”
선물을 하는 건데 왜 이렇게 쑥스러울까. 율리아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상자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건 후작님 건데, 후작님께 서류 같은 거 보내실 때 같이 보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휴렌은 율리아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함을 열었다.
파랗게 빛나는 보석이 달린 검 장식. 손끝으로 보석의 표면을 더듬자 닿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아…….”
휴렌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느끼는 사이 율리아나가 설명했다.
“가이드석은 인도력을 담은 돌이에요. 마법사의 마법 시전을 돕는 마나석과 같은 거죠. 급하게 힘을 썼는데 주변에 가이드가 없다면 비상용으로 쓸 만할 거예요.”
‘비상용?’
가이드석에서 손을 뗀 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주변에 가이드가 있다면 이렇게 귀한 것을 매번 쓸 수는 없겠지.
끝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쓰리라.
“고맙다. 잘 쓰마.”
휴렌이 일어나서 제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부탁할 게 있나 했더니 선물을 받고. 답례로 좋은 걸 주고 싶은데 마땅한 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게 있었군.’
휴렌은 서랍 안쪽에서 실크 주머니를 꺼내어 율리아나 앞에 두었다.
“답례다.”
“답례를 받으려고 드린 건 아닌데요. 지금까지 뭐 해 드린 것도 없고 해서…….”
“연장자로서 받고만 넘어갈 수 없지. 나도 받고서 안 쓰는 거니까 부담 없이 써라.”
받고서 안 쓰는 게 뭐지? 율리아나가 실크 주머니를 열자 단검 한 자루가 나왔다.
“단검이네요?”
“그래. 생각해 보니 검 하나 들려 준 적 없구나. 호신용으로 하나쯤 들려 줬어야 했는데. 그리고, 이제 의무 복무를 하러 가지?”
“네.”
“단검 외에 다른 방어구를 챙겨 가도록 말해 두마.”
“네…. 감사해요.”
율리아나가 조심히 검집에서 검을 꺼내자 스르릉, 아주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검이 빠져나왔다.
‘날이 검은색이네?’
흑철 같은 건가? 검에 대해 잘 모르지만 굉장히 예리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대단한 물건인 건 확실히 느껴졌다.
‘나중에 바이델에게 물어봐야지. 그냥 가이드석을 주러 온 건데 과한 걸 받은 기분이네.’
원래 선물만 주고 가려고 해서 율리아나는 제 몫의 차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럼 가 볼게요.”
“아니다. 언제든 찾아오거라. 부탁할 게 있으면 편히 말하고.”
“네.”
탁. 휴렌의 서재에서 나와 바이델의 방으로 향하던 율리아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바이델과는 지난번 뒷산으로 나들이를 갔던 때 이후로 대화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만약에.”
“황제가 억지로 널 황태자와 결혼시키려고 하면 말이야…. 네가 그 결혼이 싫을 경우를 말하는 거야. 좋다면 뭐 상관없겠지만.”
“나한테 도망쳐도 돼.”
만약이라고 했지만. 여러 전제 조건도 붙이긴 했지만.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바이델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을 동생이 아니라 여자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소름이 끼친다거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바이델이 다르게 보였다. 가족으로 여기고 제 편이라고 믿었던 상대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결혼이건 약혼이건, 이번 생에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전생에서 워낙 약혼 상대로부터 상처받은 탓에 율리아나는 무의식적으로 약혼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을 삶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그저, 가이드로서 종군하다가 군인으로 죽을 거라는 소망만 있었다.
‘결혼을 하면. 내가 가이드로 살 수 있을까? 남편이 나를 이해해 줄까? 내가, 정상적인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저마다 정상의 기준이 달라서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율리아나는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율리아나에게 아무에게나 가이딩을 해 주는 매춘부나 마찬가지라고 했으나, 정작 그녀를 안은 알렉산더는 목석을 안는 것처럼 재미없다며 폭언을 퍼부었다.
전생의 약혼 생활은 그저 괴롭기만 했다.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위치는 율리아나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명예롭지도 않았고 부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비싼 드레스와 아름다운 보석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알렉산더는 폭력적이었고 고압적이었으며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뿐.
결혼을 한다면 부부 관계는 필수일 텐데,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두려웠다.
현재의 몸은 남자를 모르지만, 머리로는 알렉산더와 함께한 행위를 기억하고 있다. 이를 남편이 알아차린다면?
수많은 고민 속에서, 고민의 근원을 꿰뚫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면?’
율리아나는 눈을 꼭 감았다. 바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