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Chapter 14. 개들의 자각
도시에 있는 광장으로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광장에는 커다란 천이 내걸리고 영상석이 설치되었다. 같은 파장의 영상석을 매개로 멀리 있는 곳까지 영상을 전달할 수 있는, 오늘을 위해 마탑에서 박차를 가해 개발한 발명품이었다.
알브레히트 황제의 두 번째 황태자 책봉식.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아무리 폐하라지만 이렇게 황태자를 쉽게 바꾸는 건 좀…….”
“예끼, 이 사람아. 다른 분도 아니고 자이거 대공님인데 이게 맞는 거야.”
“그래. 황태자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닌데 사랑하는 아들보다는 좀 더 능력 있는 사람한테 가야지. 황제 폐하께서 구국의 결단을 하신 걸세.”
군중들은 이번 일에 저마다 입을 대며 의견을 펼쳤다. 그래도 지금껏 전쟁터에서 많이 활약한 레온하르트였기에 여론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알렉산더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알렉산더는 더딘 이능 성숙도 때문에 제대로 전쟁터에 나간 적도 몇 번 없으니 말이다.
“오오, 저것 봐! 뭔가 보인다!”
높은 사다리 의자에 앉은 마법사가 영상석에 손을 얹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영상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영상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광장에 내걸린 천에 쏘아지고, 흐릿한 영상이 투영됐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군중들이 열광했다.
“와아아! 황궁이다―!”
영상은 황궁 앞의 카를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카를 광장 역시 새벽같이 몰려든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영상은 카를 광장을 한 번 비추고 황궁 내부를 비추었다.
루비, 에메랄드, 진주, 다이아몬드. 다채로운 보석과 황홀한 황금빛으로 장식된 홀에 수많은 귀족과 신관들이 있었다.
홀의 맨 앞에는 황제와 대신관이 있었다.
황제 대관식 다음가는 큰 행사이기에 두 사람은 대단히 차려입었다. 황제의 예복을 입은 알브레히트와 마찬가지로 예복을 입은 대신관.
알브레히트는 카를 제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금색을, 대신관은 우주의 조화를 뜻하는 흰색과 검은색의 예복을 입었다.
각각 머리에 쓴 황제의 관과 교황관이 활짝 열어둔 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을 받아 후광처럼 빛무리를 만들었다.
군중들은 흐릿한 영상으로나마 그 고귀함을 보는 것에 감격했다.
“황제 폐하!”
“대신관님!”
“우리를 지켜 주세요!”
군중으로부터 수많은 염원이 쏟아져 나왔다.
곧 대신관이 엄숙한 목소리로 책봉식의 시작을 알리며 시작 기도문을 읊었다.
책봉식이 열리는 엠퍼러 홀.
시작 기도문이 끝난 이후로는 지난한 절차가 이어졌다.
이제 막 개발된 영상석까지는 아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엠퍼러 홀에 모인 수많은 귀족과 신관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고?”
“황자 전하의 모습이…….”
“오늘 새벽에 황도로 도착하셨다는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바로, 알렉산더와 안젤리카가 앉은 곳으로.
엠퍼러 홀은 맨 앞에 단이 있고 그 단으로 가는 긴 황금빛 카펫이 깔려 있다. 카펫의 좌우로 고위 귀족들이 앉을 의자가 깔려 있는데, 알렉산더와 안젤리카는 그 의자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황자 전하의 꼴은 말이 아닌데 성녀님은 얼굴에서 윤이 반지르르하네.”
맞는 말이었다.
지금 알렉산더는 제대로 옷을 갖춰 입기는 했으나 눈 밑이 쑥 꺼지고 입술이 부르터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피부 결부터 곱고 머리카락 하나 상한 부분이 없어서, 결계 지역에 다녀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움은, 안젤리카의 몸을 점령한 사타나키아가 여러 센티넬들을 잡아먹은 덕분이었다. 지금은 혹시라도 신관들에게 들킬까 봐 안젤라카의 뒤로 몸을 숨긴 상태지만.
안젤리카는 초조한 얼굴로 알렉산더를 힐끔거렸다. 초점이 없이 멍한 황금빛 눈. 아니, 황금빛이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빛을 잃었다. 그저 노란색 눈 같다.
‘알렉……. 미안해요. 그치만 나도 살아야지.’
안젤리카는 자신 안에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무시한 채 알렉산더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결계 지역에서 안젤리카는 사타나키아가 자신의 몸을 지배할 때에 몸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사타나키아가 일부러 일행을 마물이 있는 방향으로 몰아간 것과, 알렉산더를 호위하는 센티넬들을 하나씩 유인해서 잡아먹는 것을 말이다.
사타나키아의 정체를 의심한 알렉산더가 사타나키아를 죽이려 했을 때.
죽기 싫어서 사타나키아에게 협력했다.
“꺄악! 알렉! 알렉! 살려 줘요! 뜨거워!”
“……진짜 리카 맞아?”
“알렉! 살려 줘요! 꺄아아악!”
혼란스러워하는 알렉산더가 불꽃을 꺼트리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 사타나키아가 알렉산더를 세뇌했다.
그리고 결계 지역으로 가서 알렉산더를 구하러 온 알마예르 후작과 합류하여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후회해? 나와 손을 잡은걸?]
사타나키아가 의식으로 말을 걸었다.
‘입 닥쳐.’
[호오, 세게 나오는데? 오랜만에 콧바람을 쐬니까 건방지게 구네.]
‘…….’
[하긴 뭐. 지금 실컷 즐겨 둬.]
사타나키아는 킬킬 웃었다. 안젤리카는 입을 꾹 다물고 앞을 보았다.
“아, 황태자 전하…!”
뒤에서 탄성이 들리고, 그 말처럼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카펫 위를 걸어왔다.
붉은색 긴 망토를 늘어트리고 걸어오는 레온하르트는 마치 불꽃의 신처럼 보였다.
안젤리카는 황홀하게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 내가 저 남자와 약혼했더라면.’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알렉산더가 아닌 레온하르트를 잡았더라면 자신이 지금 이렇게 마족에게 사로잡힌 비참한 꼴이 되었을까?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구석은 있어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맘 붙일 가족 없이 외로운 남자였으니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아꼈으리라.
[하긴, 저 남자의 약혼녀였다면 우리 타겟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우린 네가 황태자의 약혼녀라서 접근한 거니까.]
사타나키아가 투덜거렸다.
[제길. 알브레히트는 운도 좋지. 예전부터 재수 없는 놈이었어. 인간치고는 너무 빈틈이 없어서.]
마족의 평가라. 처음 듣는 관점이었기에 안젤리카는 궁금해졌다.
‘그럼 알렉산더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긴. 아주 좋은 놈이지. 우리가 이용하기 딱 좋은 놈.]
사타나키아가 킬킬 웃자 안젤리카는 기분이 나빠졌다. 사타나키아 입장에선 아마 자신도 좋은 사람일 것이다. 이용하기 좋으니까.
[삐지지 마. 칭찬이잖아?]
‘그게 뭐가 칭찬이야.’
[칭찬이지. 너흰 죽이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안젤리카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공유하는 시야를 통해 사타나키아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타나키아의 시선은 바로, 율리아나에게 닿아 있었다.
단아하고 아름답게 꾸민 율리아나를 보자 안젤리카의 속이 뒤틀렸다. 내가 무슨 고생을 하고 왔는데, 저건 속 편하게 말간 얼굴로 앉아 있네.
[저년은 꼭 죽일 거야. 아주 갈가리 찢어 버릴 거야…….]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안젤리카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율리아나? 나도 저년이 싫긴 하지만…. 어째서?’
[몰라서 물어? 저년이 진짜 성녀잖아. 가짜인 너와는 다르게.]
‘뭐?’
안젤리카가 경악하는 사이, 대신관이 역대 황제들의 이름과 업적을 읊었다. 황태자위에 오를 레온하르트도 그와 같은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 후 긴긴 축사와 기도문이 다시 이어졌고 신관들이 성가를 부르는 것까지의 모든 절차가 끝났다.
황제는 대신관이 건넨 황태자의 관을 들어 올리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레온하르트 자이거 카를. 오늘부로 생략하였던 진짜 성을 되살리며 그대를 카를 제국의 황태자로 임명하노라.”
레온하르트 역시 황제의 자식이기에 카를이란 성을 쓰고 있었지만, 자이거 대공이 된 후부터는 카를이라는 성을 쓰지 않았었다. 알브레히트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레온하르트에게 모든 것이 허락될 것이다.
알브레히트가 단 앞에 무릎을 꿇은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로 황태자의 관을 올리려는 순간.
대신관이 저 멀리서 휘청휘청 걸어오는 인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교, 교황 성하?”
자고 있을 교황이 왜 엠퍼러 홀에 나타난단 말인가? 대신관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고개를 돌려 교황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황태자 책봉식에 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갑자기 왜?’
교황이 언제나 잠만 자다가 예언을 툭툭 뱉어 내는 기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왜 황태자 책봉식에 나타났을까?
타박, 타박.
하얗게 센 백발을 곱게 땋은 교황이 레온하르트가 걸었던 카펫 위를 걸어오자 주변이 죽음과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교황이 레온하르트가 있는 곳에 다다르기 전에, 대신관이 단에서 내려와 그를 말렸다.
“성하, 여긴 어찌…….”
“축복을 하러 왔다. 이제야 선명히 보이는구나.”
교황이 황제를 보며 물었다.
“부족한 신의 종이 황태자 전하께 축복을 올려도 되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교황이 웃으며 손을 위로 뻗었다.
휘오오, 손안에 휘몰아치는 정화의 힘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족들은 신앙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손을 모아 기도했다.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옳은 길을 택하신 당신께 축복을 내립니다.”
교황의 작은 목소리는 오로지 레온하르트에게만 들렸다. 레온하르트가 교황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는 때, 정화의 힘이 레온하르트에게로 쏟아졌다.
파아앗―!
거대한 신성력으로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겪은 적 없는 시간의 기억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