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무학관 신입 교관 (3)
꿈을 꾸었다.
끔찍한 꿈이었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거대한 산이 솟아 있었다.
꺾이고 부러진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시체의 산.
그 산 아래로 검붉게 썩어 버린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시산혈해(尸山血海).
시체의 산과 피의 강.
그 꼭대기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이제는 곧 한 사람이 될 것이다.
헐떡이며 마지막 호흡을 이어가는 여인은 곧 숨이 끊어질 테니까.
피에 물든 적색 갑주를 입은 채, 시체의 산 위에서 여인을 바쳐 안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나를 구했지?”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헐떡인 후에 간신히 입술을 달싹인다.
“이제야…. 저를…. 봐주시는군요.”
“다시 묻겠어. 왜 나를 구했지?”
정말 사내는 궁금했다.
당연했다.
여인은 자신의 숙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숙적과의 승부는 이곳에서 갈려야 했다.
종막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수하라 믿었던 이들은 자신의 등을 찔렀고, 그보다 더 많은 적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으니까.
결과가 달라진 것은 숙적이라 생각하던 이 여인 때문이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등을 지키며, 목숨을 던져가며 막지 않았다면, 이곳에는 시체의 산 대신, 자신의 주검만이 놓였을 터였다.
“대답해. 왜 나를 살려 놓은 거야!”
하지만 사내는 고마움보다는 의문이 들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죽어야 했다.
아니, 죽기를 바랐다.
평생을 바쳐 지키려 한 이들조차 돌아선 지금, 더 이상 강호에 살아갈 의미가 없다.
그저 저들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죽기를 희망했다.
방금 전까지는.
“대체 왜 나를 살렸냔 말이야!”
사내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웅웅웅웅웅.
절망의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기파에 따라 초원의 풀이 일제히 몸을 눕혔다.
그때 그녀가 비로소 반응했다.
톡.
핏기가 빠져나가 차가워진 손을 뺨에 울린 것이다.
“울지 마요….”
차가운 손가락이 눈가를 스쳐 간 이후에 사내는 깨달았다.
자신이 울고 있음을.
“내가…. 울고 있어?”
언젠가 메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나?
눈가를 스친 손가락이 뺨 위에 살포시 올라갔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나는…. 나는….”
“그저 나쁜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해요. 무척 괴롭고 나쁜 꿈을.”
“안 돼. 숨을 쉬어. 숨을 쉬라고!”
“하지만 나와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가치 있었더라면.”
여인이 애써 웃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호흡에 목소리를 담았다.
“악몽의 끝에서라도 저를 다시 찾아주세요.”
쿵쿵쿵쿵.
시체의 산이 울리기 시작했다.
검붉은 대지 너머로 희뿌연 먼지와 함께 수많은 깃발들이 일어섰다.
“으아아아아아!”
거대한 핏빛의 깃발을 본 사내가 노호성을 질렀다.
“망천회!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
“에이! X발 새끼들!”
와지직!
잠에서 깬 초운휘는 깜짝 놀랐다.
잠결에 발길질을 했는지, 오른발이 벽에 박혀 있었다.
‘아이고. 실수했네.’
모처럼 꿀잠을 잤다 싶더니 옛날 꿈을 꾸고 말았다.
거기에 잠꼬대까지.
콰직.
발을 뽑자 판자가 우두둑 떨어졌다.
“헉. 이게 뭐야.”
화들짝 놀라 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다 문득 뚫린 구멍 너머로 이쪽을 보며 굳어버린 여인이 딱 보였다.
그녀는 가슴께에 붕대를 꾹꾹 감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완전히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입을 뻐끔거리며 얼어버린 그녀를 향해 초운휘가 착 손을 들어 보였다.
“어. 참 좋은 아침입죠?”
“어…. 어….”
“날씨도 좋네요.”
“꺄아아아악!”
동천관의 교관 숙소에 비명이 메아리쳤다.
***
역시나.
동천관에 출근하기 무섭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동천관주 충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다.
“첫날부터 벽에 구멍을 내놓다니 제정신이야?”
“그…. 벽이 너무 약해서.”
“전력으로 쳐도 그 정도는 아닐 걸세!”
충현은 씩씩거렸다.
하지만 초운휘도 할 말이 있었다.
“진짜 약한걸 어쩝니까? 아무래도 부실 공사인 듯? 에헷!”
“닥치게!”
깜찍하게 고개를 틀며 눈을 찡긋거렸지만, 오히려 화만 돋운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은 하지 않던 짓은 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충현은 한쪽에 놓인 종이를 들더니 휘리릭 뭔가를 적어 내렸다.
“그건 뭡니까?”
“뭐긴 뭐야! 자네가 변상해야 할 금액이지.”
“꽤 많은데요?”
“무림맹의 기물을 파손한 일이 푼돈으로 넘어갈 일인가?”
“무슨 나무를 금으로 칠했답니까? 다 썩은 것 같던데.”
“자네가 박살 낸 나무는 남만에서 난다는 철목이야! 무슨 뒷동산에서 대충 구한 나무로 건물을 지은 줄 아나?”
철목이라고? 진짜?
순순히 배상액을 받아든 초운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은자 삼십 냥?”
석 달 치 월급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썩어들었다.
하지만 충현은 선심 쓰듯 말했다.
“삼십 냥도 싼 것이네. 딱 목재값만 계산했거든. 마음 같아서는 수리비까지 전부 물게 하고 싶지만, 처음이라 봐준 줄 알아!”
충현의 살벌한 눈빛에 초운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젠장. 벌써부터 적자는 곤란한데.’
딱히 돈이 아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난생처음 정직하게 번 돈이 눈앞에서 날아가자 배알이 뒤틀렸다.
“또다시 기물을 파손하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부리부리한 충현의 눈빛에 초운휘는 침울해졌다.
***
울적하게 고지서를 받아들고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미, 미안해요. 제가 소란을 피워서.”
옆방에 있던 여자 교관이었다.
그녀는 스물 남짓에 화사한 외모의 여인이었다.
슬쩍 아래쪽을 살핀 초운휘는 생각했다.
‘붕대라는 게 꽤 단단하구나.’
시선을 눈치 못 챘는지 그녀는 큰 눈 가득 걱정을 담아 사과했다.
초운휘가 부패한 생선 눈깔을 한 채로 대답했다.
“말로만 사과하면 답니까?”
“저, 저도 같이 변상할게요.”
“전부요?”
“저, 전부는 어렵고, 절반이라면 나눠서 갚을 수 있어요.”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초운휘는 픽 웃었다.
‘진짜 모질지 못한 성격이네.’
벽을 부수고 아침부터 비명을 지른 그녀는 피해자다.
그런 주제에 변상하겠다니.
이런 약한 성격으로 어떻게 무림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감당할게요.”
“그, 그럴까요?”
확 안색이 밝아지는 모습이, 마치 성격 좋은 강아지 같다.
‘얼굴도 강아지상이고.’
잠깐 고민하던 초운휘가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여기는 남녀 구분도 없나요? 왜 남녀가 방을 같이 씁니까?”
“그야 동천관이니까요.”
“다른 곳은 달라요?”
“은천관만 해도 층마다 남녀 구분이 있고, 금천관부터는 아예 전각이 다르며, 신천관의 교관들은 별채를 따로 받는다고 들었어요.”
동천관이 똥천관이라 불린다더니, 차별이 꽤 심한 모양이다.
실력이 있어야 대우받는 것이 강호라지만 너무 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실력 지상주의 세상 같으니라고.
“참, 인사가 늦었죠? 초운휘라고 합니다.”
“여매홍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포권을 하고 있자니, 염광을 비롯한 일단의 교관들이 다가왔다.
“여 교관. 그치와 잘 지내는 것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흐흐.”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염광이 말했다.
“가끔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란을 피워 꼭 주목을 받으려는 녀석들.”
“벽이 약했다니까요.”
“흐흐. 단단하기로는 철에 버금간다는 철목이 약하다고? 농담이 너무 심해.”
염광은 한마디로 일축하고는 여매홍에게 다가와 목에 팔을 감았다.
“이놈은 두고, 어때? 식사나 같이 가지? 낮술이라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자고.”
“괜찮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 친해지자는 거잖아?”
“지금은 공무 중입니다.”
“쯧.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야. 관심종자 놈과 어울리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트리는 일임을 왜 몰라?”
느글느글한 염광의 시선이 여매홍의 가슴께를 핥듯이 스쳐 갔다.
여매홍은 슬쩍 몸을 세우며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내가 또 강요는 하지 않는 사람이지.”
한 걸음 물러선 염광이 주변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잔 걸치러 가려는데, 함께 할 사람?”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교관들이 곰살거리며 나섰다.
“하하. 교두님이 쏘시는 겁니까?”
“이거 아침부터 신나게 생겼군요.”
“헤헤. 저도 끼어도 괜찮을까요?”
순식간에 몰려든 교관 몇을 병풍처럼 두른 채 염광이 으스대듯 말했다.
“어이. 관심종자. 앞으로 처신 잘해.”
이내 우르르 빠져나가는 교관들을 보며 초운휘가 물었다.
“이 시간부터 술을 마셔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 동천관의 관도들은 딱히 무공에 열의가 없어, 단체 훈련은 쉬는 경우가 많거든요.”
“완전 개판이네.”
“진짜 열의가 있는 관도들은 교관들에게 배우기보다, 가전무공을 사사 받죠. 외부 고수를 초빙해 배우는 쪽을 선호해요. 개인 교습을 청하기도 하고요.”
“그럼 왜 굳이 학관에 들어왔대요?”
“인맥을 쌓기에는 여기만 한 곳이 없으니까요.”
“진짜 개판이네.”
밖에서 알아보긴 했지만, 이렇게 괴리감이 클 줄은 몰랐다.
“듣던 것과는 엄청 다르네요. 정도 강호의 요람이 다 썩었네.”
“동천관이 유난히 그렇죠.”
“아무래도 이곳을 이해하려면 한세월 걸리겠는데, 어때요? 식사나 하며 이야기하실래요?”
“초 교관님이 사는 거예요? 좋아요. 여기 급식은 무료라서 좋지만, 맛은 좀 그렇거든요.”
초운휘가 잽싸게 대답했다.
“급식소에서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 여기 급식은 무료에요. 괜히 사료라고 불리는 것이….”
“제가 사겠습니다. 급식소로 가시죠.”
냉큼 앞서 걷는 초운휘를 보며 여매홍은 픽 웃어 버렸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동천관의 교관들은 고압적인 이들이 대부분이다.
개중에는 돋보이기 위해 없는 공적을 부풀리고, 어떻게든 우위를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에 새로운 교관은 꽤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꽤 유쾌한 사람이야.’
비록 얼굴을 가린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언사를 툭툭 내뱉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까지 보던 교관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
어쩐지 답답한 동천관 생활이 조금 즐거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같이 가요!”
뒤따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