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변화의 시작 (1)
영결식이 치러졌다.
“떠나간 동료들을 추모합시다.”
신무학관의 총관주 백의판관 선인혁이 간만에 모습을 나타내 추도사를 읽었다.
“본 백의판관 선인혁이 정의롭게 살다간 이들에게 경의를. 어려움 속에서 누구보다 정의롭게 맞서 싸웠던 금천관 은해월 교관….”
선인혁이 차례로 사망한 교관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번에 희생된 교관을 차례로 호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총 일곱 명의 희생.
동료의 죽음에 금천관과 은천관의 교관들은 엄숙하게 동료들의 안식을 빌었다.
더러는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결식은 다소 맥이 빠진 구석이 있었다.
무림맹의 앞마당이나 다름이 없는 무한성의 코앞에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무림맹이 흉수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함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건을 덮으려 한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이에 교관들은 분개했다.
“정말 너무 하는군.”
“강호의 명사가 아닌, 일개 교관의 죽음이라고 사안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왜 무림맹에서는 아무런 후속 조치가 없는 거야!”
불만은 당연했다.
무림맹 산하 신무학관의 교관이 희생당했다면, 가장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은 무림맹이어야 할 터.
하지만 불만이 고조됨에도 무림맹은 침묵했다.
마치 복수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처사였다.
“정말 너무하네요. 평생 맹을 위해 헌신해오신 교관분들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 같아요.”
“동감이야. 맹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사건을 처리할 줄은 몰랐어.”
여매홍과 모용선야의 말에 초운휘는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이중 세작이네.’
흉수를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흉수를 밝힐 수 없는 쪽이겠지.’
어쩌면 저기 누워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동료의 등에 칼을 꽂은 흉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니 알릴 수 있을 턱이 없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가, 적과 결탁한 배신자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서로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며, 곧 거대한 조직의 균열을 야기할지도 모르니까.
‘꽤 골치를 썩이고 있겠군.’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느덧 추모식은 끝을 고해가고 있었다.
“…정도의 의기를 세우다 스러져 간 영령들이시여. 부디 평안 속에 잠드소서.”
나지막한 선인혁의 추도문을 끝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조용하지만 나지막한 비탄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영결식이 끝을 맺었다.
***
수일 후.
학관의 일상도 조금씩 돌아왔다.
멈춰져 있던 수업이 재개되었으며, 한산하던 연무장에도 기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한 일상의 어느 날.
오랜만에 참석한 아침 조회에서 여매홍이 소곤거렸다.
“초 교관님. 들었어요?”
“뭘 말입니까?”
“이번에 신무학관에 대대적인 개편이 있을 것 같다는 모양이에요.”
대대적인 개편?
딱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단어였다.
“저기 보세요.”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곳에는 주류파 교관들이 세상이 멸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개편 소식을 듣고 계속 저 상태더라고요. 인사 평가 방식도 변한다던데, 지금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우던 분들로서는 절망적인 소식이겠죠?”
“이럴 수가.”
세상의 멸망을 본 듯한 얼굴로 초운휘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잠깐만요. 거기가 아니에요.”
“평온한 일상이 박살….”
“아이참.”
뒷덜미를 잡아당긴 여매홍이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오히려 초 교관님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다고요!”
“적당히 시간을 때우면 안 된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터덜. 터덜.
불에 홀린 나방처럼 주류파 교관들에게로 걸어가니 여매홍이 어깨를 붙잡았다.
“성과제로 바뀐다니 꼭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에요.”
“성과제요?”
“앞으로는 실전형 인재를 키워내는 분들을 특채한다던 걸요?”
동천관의 문제아들을 잘 이끌어온 교관님이라면 분명 잘할 거예요.
여매홍이 덧붙였다.
“웬 실전형 인재?”
“최근 사건에서 겁을 먹은 관도들을 지키다가 교관분들이 피해를 입었잖아요? 비상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관도를 육성할 필요성을 깨달은 거죠.”
대충 이해가 갔다.
심지어 금천관의 관도조차 갑작스러운 실전에 얼어붙어 칼도 꺼내지 못했다던가?
덕분에 교관들이 대신 칼을 맞아야 했고 말이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들이 그렇지, 뭐.’
실제로 미래, 혹은 과거에서 무림맹의 후기지수들은 미숙한 경험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피해를 엄청나게 입었으니까.
하지만 수긍과는 별개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율’이 찾아와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주군.”
대외적인 정파의 새로운 희망인 독안신검 독고율.
실제로는 마교도 조차 학을 떼는 암혼흑풍사의 일좌(一座) 사마율이 말했다.
“신무학관에 변화를 가져오려 합니다.”
“변화? 왜?”
사마율이 사악하게 웃었다.
“정파의 개들이 강해져야, 써먹을 방법이 많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글러 먹었다.
정파의 신성은 글러 먹었다.
사마율이 덧붙였다.
“정파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재능있는 인재라도 현재의 나약한 수련 방식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이참에 저희가 후임을 만들 때처럼 인세에 지옥을 만들고, 모르는 사이 등을 떠밀어….”
슬쩍 째려보니 얼른 사마율이 말을 바꾸었다.
“버리는 것은 위험하니, 다른 방식을 취해야겠지요. 작금의 수련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개인의 성장 가능성보다 문파나 가문의 배경을 보는 정파의 방식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동의하는 바였다.
‘실제 전쟁이 시작되고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들이 설치다 여럿 죽어 나갔지.’
실전 경험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가 지휘관을 맡겠다며 정치 싸움을 하다 일선의 협객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
“꽤 괜찮은 생각이야.”
정파가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망천회도 곤란해질 테니까.
“다만 단점도 있습니다.”
“단점? 그게 뭐지?”
“무림맹주의 목을 따는 일이 더 힘들어질 테지요.”
아직도 포기 안 했냐?
다행히 사마율은 무림맹주 목을 따는 일 대신 새로운 목표를 깨우친 모양이었다.
“허나. 정파를 먹는 일은, 정실부인을 찾는 일에 비할 수 없는 하찮은 일. 눈물을 머금고 양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 머금지 말고, 막 양보해도 돼.”
다행이다.
이 극악무도한 놈이 마음을 바로 먹어서 말이다.
“그러니, 주군께서는 어서 정실부인을 찾아, 작은 주인을 서른 명쯤 만들어주십시오.”
“야이…. 내가 종마냐?”
사마율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신무학관 총관주 백의판관 선인혁을 꼬드겼습니다. 염화광도 마길상의 호응도 얻었습니다.”
“염화광도라.”
붉은색 옷에 붉은 머리카락.
거기에 붉은 도를 찬 도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신무학관의 실세라 할 만하지. 다만 좀 귀찮아질 것 같긴 한데.”
“주군께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동천관에서의 일도 거의 끝나가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중간시험에서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대략적으로 파악이 끝났다.
아직 ‘그녀’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인즉 조만간 은천관을 살펴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
“뭐, 주군의 능력이라면 금방 공적을 세워 승급하시겠지만….”
동천관 업무일지를 보던 사마율의 표정이 허옇게 질렸다.
“안 되겠습니다. 글러 먹었습니다.”
“……야.”
표정 안 풀어?
“안 되시겠습니다. 글러 먹으셨습니다.”
그게 아니잖아.
사마율의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이대로는 망합니다. 틀렸습니다. 오직 특별 가점에 집중해야겠군요.”
“방법이 있을까?”
“방책은 만들기 나름이죠. 앞으로 가산점을 얻을 수 있는 특별 임무를 배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특별 임무?”
“지금까지는 동천관은 동천관도끼리, 각 관은 독자적으로 운용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동천관의 관도나 교관은 동천관에, 은천관의 관도나 교관은 은천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나름 꽤 전통 있는 방식인 데다,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장점도 있었다.
“상위 관도가 하위 관도를 괴롭히는 일이 많다고 들었어. 쉽게 허락을 할까?”
바로 이것.
신무학관은 기본적으로 무공지상주의다.
강자가 약자를, 유명한 문파의 제자가 이름 없는 문파를 깔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심지어 오대세가에서도 최고로 꼽는 남궁세가 출신이지만, 동천관의 지박령이라 불리던 남궁윤호가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사마율은 당당했다.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 아닙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현직 정파의 희망이 스산하게 웃었다.
“이 정파의 개들을 써먹을 정도로 조련해 두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달달한 성과만 챙기시면 됩니다.”
일석이조.
일타쌍피 아닙니까?
사마율이 더없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 결과.
“확실히 지금까지는 조금 무른 감이 있었죠. 강호인이라면 실력고하에 따라 어느 정도 경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솜씨 좋은 현직 정파의 희망, 겸직 마도의 수괴는 지나치게 유능했다.
착실하고, 열정적인 데다, 정의롭기까지 한 여매홍의 선망을 살 정도로 말이다.
“역시 독고율 대협이세요. 벌써부터 정파 무림에 큰 변화를 가져오다니, 새삼 놀랍네요.”
“여 교관도 그렇게 생각하죠? 진짜 독안신검 대협은 멋진 것도 모자라, 능력도 좋으셔….”
“변화라…. 피가 끓어오르는군.”
조현과 양 교관도 잔뜩 흥분하며 한껏 찬사를 늘어놓았다.
감동과 흥분에 떠들어 대는 셋을 보며 초운휘는 무미건조하게 호응했다.
“아. 피. 가. 끓. 어. 오. 르. 네.”
변화의 내막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도무지 동감할 수 없는 탓이었다.
***
‘지독한 놈.’
천생 협객을 연기하는 ‘율’은 빈틈이 없었다.
더러는 교관실에서.
더러는 연무장에서.
심지어 길에서 만난 교관들을 향해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변화입니다!”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은 안온하고 평안한 변화!”
“모두. 어린 날 되새기던 영웅의 발자취를 떠올려 보십시오!”
더없이 강렬한 연설로 교관들을 하나둘 휘어잡더니.
“변화를 위해 제가 가장 앞장서겠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짊어질 것이요!”
“대가와 권한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 학관에 변화를!
며칠 지나니 호응하지 않는 교관이 없게 되었다.
오히려 교관들은 반겼다.
“와-아! 역시 독고율 대협이셔!”
“이런 분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바랐어.”
“하긴. 지금까지는 너무 단조로운 일상이었지.”
심지어 주류파 교관들.
하루 최고의 고민거리가 뭐로 저녁 술안주를 때울까 고민하던 이들마저, 눈빛이 달라졌다.
“변화? 가끔은 나쁘지 않지.”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적 영웅을 꿈꾸었어.”
“죽었던 열기. 다시 되살려 볼까?”
모두가 저 내일의 강호가 찬란할 것이라 믿으며 하나 같이 독고율을 찬양하게 되었다.
“강호의 미래가 어둡구나.”
초운휘는 혀를 끌끌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