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적령기 무림교관-54화 (54/194)

제16장 방학. 그리고 면담. (4)

면담이 끝이 났다.

한쪽 옆구리에는 선물 상자, 다른 한쪽에는 술 한 동이를 이고 떠나려는데, 모용소혜가 따라붙었다.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그렇게 시작된 짧은 동행.

길을 걷고 있던 모용소혜가 흥얼거리는 교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교관님.”

“어. 왜.”

“남궁 오라버니는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것은 또 뭐야.”

“얼굴이 무척 좋지 않아요.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막 하소연을 하려던 모용소혜는 문득 교관의 입꼬리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다.

‘알고 있었구나.’

굳이 감정을 읽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 수상쩍은 교관은 모든 전말을 알고 있으면서 관망했던 것이다.

“왜. 모른 척하시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뭘, 말야?”

“남궁 오라버니 일이요.”

“강호인은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가요?”

“앞으로 더 X 같은 일만 있을 텐데, 그쯤은 혼자 버텨내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매사에 나태한 교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지라 조금 혼란스럽다.

‘감정을 읽어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목소리에 담긴 진심 정도는 어린 자신이라도 알 수 있었으니까.

“감정을 읽지 않은 것은 잘했다. 편리한 능력이지만, 그런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거든.”

모용소혜가 화들짝 놀랐다.

‘내 능력을 알고 있어?’

모용세가에서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이 능력을?

생각을 읽은 것처럼 교관이 대답했다.

“아는 능력이거든.”

“그런 거예요?”

“응.”

역시 이상한 교관이다.

하지만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교관님. 질문이 있어요. 만약 교관님이 남궁 오라버니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글쎄다.”

옆구리의 선물 상자를 추스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감히 나한테 뭔가를 강요할 만큼 간 큰 놈들은 없었는데.”

“아잇, 참.”

질문이 잘못되었네.

모용소혜가 질문을 정정했다.

“만약 뭘 선택해도 최악의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그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해요?”

“곤란한 결정이네.”

흐음 하며 콧소리를 내던 초운휘가 고개를 주억였다.

“귀찮은 결정은 떠넘겨야지.”

“네? 떠넘겨요?”

“왜 나만 X 같이 고민하냐. 날 고민하게 만든 저 X 같은 놈도 똑같이 머리 쥐어짜게 만들어야지.”

“그건 그냥 악취미잖아요.”

“애초에 강호 자체가 악취미인걸, 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아, 모용소혜는 단서를 달았다.

“그래도. 그래도 꼭 결정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죠?”

“그때는 최후에 전부 잃고 죽어가더라도 웃을 수 있는 선택을 해야지.”

묵직한 목소리에 현기가 담겼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모용소혜가 눈을 빛냈다.

“최후에 웃을 수 있는 선택이요?”

“응, 그런 게 있어. 내 모든 것이 날아가도, 후회 없이 웃을 수 있는 선택 같은 것이 말이야.”

어조에 담긴 생생한 감정에 모용소혜의 마음이 철렁거렸다.

“몰라? 내가 X 되지만, 저 새끼가 더 X 되면, X 되면서도 배가 당기게 웃을 수 있는 일 말이야.”

취소다.

순식간에 존경이 식었다.

“찌질해요. 너무 찌질해요.”

“진짜라니깐.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면 몸이 지옥 불에 불타는 중에도 웃음이 나와.”

“흥! 그건 경험담인가요?”

히죽.

대문 앞에 선 교관이 선물 주머니를 추스르며 웃었다.

“글쎄. 어떨까?”

***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밥 짓는 냄새가 길가에 자욱한 가운데, 초운휘는 휘적휘적 길가를 걸었다.

그러던 중에 뒤통수를 찌르는 기파가 느껴졌다.

기파는 어둑어둑해지는 골목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며 안쪽으로 향하자,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주군.”

독고율이었다.

“뭐야. 갑자기 불러내고.”

“은월비적을 유인했습니다.”

그제야 초운휘는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아, 맞다. 그 도둑놈. 까먹고 있었네.”

완전 시시한 일이라 잊고 있었네.

“별문제 없었어?”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자가 노리는 물건에 대한 말을 흘리자 바로 미끼를 물더군요.”

“역시 도둑놈들은 단순해. 이용해 먹기 편하단 말야.”

“미끼가 먹음직스러웠던 거지요.”

품속에서 사마율이 은빛으로 빛나는 천을 꺼내 보였다.

“무영사라면 천하의 모든 도둑들이 탐내는 기물 아닙니까.”

무영사.

십만대산에서 영기를 먹고 자라난 누에에서 뽑아낸 실을 가리키는 물건이다.

질기기가 이를 데 없고, 가볍고 탄성이 뛰어나 옷을 짜면 능히 창칼을 막아내고, 수화가 불침하는 지고의 보물이다.

‘뭐, 은월비적은 다른 이유로 탐을 내는 듯하지만.’

중요한 것은 은월비적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 염광을 꼬드기는 일만 남았네.”

“그 또한 손을 써 두었습니다. 충현 관주에게 받아둔 외출증을 주군의 책상에 올려 두었거든요.”

역시 독고율은 듬직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염광을 꼬여낼 준비를 착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네. 뭐, 너무나 간단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지만.”

“애초에 하찮은 버러지입니다. 주군께서 심력을 쏟으실 필요는 없지요.”

간단하게 독고율을 치하하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좋아. 은천관 장악은 잘 되어가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조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부탁?”

독고율이 부탁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조금 궁금해졌다.

“무슨 부탁인데?”

“그게…. 혹 단야를 불러들여도 되겠습니까?”

“단야를?”

“주군을 보필하기 위해서는 음지에서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 신분은 워낙 노출이 되어 제약이 많은 데다, 정보와 공작 쪽은 제 특기가 아닌지라.”

“그건 그렇지.”

유능해서 가끔 깜빡하지만 독고율은 암살과 파괴 쪽이 전문이다.

음지에서 정보를 모으고, 공작을 하는 일은 암혼흑풍사 중에서도 단야 녀석이 가장 능했다.

‘단야라….’

어딘가에서 밤의 황제라 불리고 있을 녀석이니, 독고율을 도울 수 있다면 효율적인 계획 진행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단야가 움직이면, 분명 다른 암혼흑풍사도 알아챌 거야.”

“분명 그럴 테지요.”

그렇게 된다면?

간단하다. 충성심 높은 암혼흑풍사 전원이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져 왔다.

“…단야를 불러들이는 것은 생각 좀 해볼게.”

“주군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당장은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조금 버거울지 모릅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독고율은 하오문에 도움을 받는 일이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안 돼. 암혼흑풍사는.’

이 평화로운 일상을 깰 수는 없으니까.

***

다음 날.

교관실에 들르자, 안에는 거의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다들 바쁜 모양이네.”

본격적으로 가족 면담이 시작된 탓인지, 당직을 서던 조현 교관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자리를 찾아가자 책상 한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외출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 있구나.”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두었으니, 염광이 보지 못할 리가 없겠지.

“방문은…. 내일 저녁인가?”

시간은 꽤 넉넉하다.

‘가만. 남궁윤호 녀석도 닷새 후에 외출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날짜를 헤아리고 있자니, 꾸벅꾸벅 졸던 조현 교관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 초 교관님.”

“꽤 피곤해 보이네요.”

“어제만 해도 세 곳을 다니며 면담했거든요.”

하루 종일 긴장해서 잠도 자지 못했다면서 조현이 덧붙였다.

“참. 여 교관님은 괜찮은가요? 저는 열한 명도 버거운데, 여 교관님은 담당 관도가 서른 명이 훌쩍 넘잖아요.”

“알아서 잘하겠죠.”

건성으로 대꾸했더니 조현 교관이 가재미 눈을 하며 흘겨왔다.

“매정하네요. 힘들 때는 내조를 잘해야 한다구요. 나쁜 남자는 인기가 없어요.”

“제가 왜 내조를 합니까?”

누구 혼삿길 막을 일이 있나.

정당히 반문했지만, 조현은 아무래도 듣고 있지 않는 모양이다.

“호호호. 가끔 밀당도 나쁘지는 않죠.”

뭐래는 거야.

초운휘는 외출증을 품에 넣고 터덜터덜 교관실을 빠져나왔다.

***

다음은 백리세가인가?

기억을 되짚어가며 길을 찾아가자, 익숙한 길이 나오며 무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 끝에 보이는 위압적인 장원.

무한장이라고 쓰인 현판을 확인한 초운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도의 어미 애비를 두들기고, 별채마저 박살 냈다.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이라도 웃으며 다시 찾아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켕기는 기분을 털어내고, 다가가자, 무한장의 입구에서 번을 서던 무사 둘이 가로막았다.

“멈춰라. 이곳은 무한장이다.”

“그대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

고압적인 언사와 함께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 둘.

허튼 말이라도 하면 칼부터 뽑아 들 흉흉한 기색이었다.

‘당연한가? 마인이 습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경계를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초운휘가 품속에서 교관명패를 꺼내 내밀었다.

“동천관 교관 초운휘입니다. 오늘 면담이 잡혀 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살벌한 기세로 노려보던 두 사람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동천관 교관….”

“…초운휘?”

뭐야. 왜 이렇게 놀라?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진 두 사람이 다급하게 문을 두들겼다.

“열어! 아, 열라고!”

“아가씨의 손님이 오셨단 말이다!”

이쪽을 돌아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흡사 호랑이에게 쫓기는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라, 저도 모르게 등 뒤를 돌아봤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기이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둥둥둥둥.

장원 안쪽에서 거대한 북소리가 들리며, 문이 양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열린 틈새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 초운휘는 기가 막혔다.

“이건 또 뭐야.”

정문에서 대청까지 이어진 붉은 비단길. 그 곁에서 양쪽에 시립하고 선 백리세가의 무사들.

“오셨다! 그분이 오셨어!”

“에잇, 뭣들 하느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해?”

“아궁이에 화력이 부족하다! 어서 나무를 가져와!”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무사들 너머 시비와 하인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야. 얘들 왜 이래.’

날을 잘못 찾아온 것 아닐까 싶던 차였다.

“뭐해욧! 준비한 대로 하지 않고!”

과도하게 기운찬 목소리가 들리자, 잔뜩 긴장한 무사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귀빈의 무한장 방문을 환영합니다!”

질서정연하게 머리를 숙이는 이들 너머 붉은색 궁장을 입은 백리설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

장원 안쪽으로 발을 밀어 넣기 무섭게 백리설이 다다닥 달려왔다.

“교관니이임!”

동시에 이어지는 몸통 박치기.

슬쩍 한 걸음 피해 움직이자, 백리설이 자세를 낮춘 채 두 손을 위협적으로 펄럭였다.

“어째서 피하시는 거죠?”

“왜 다짜고짜 공격하는 거야?”

“감격의 해후에요. 사랑을 담은 환영이라고요!”

삼 일 전에 봤잖아.

거리를 좁힌 백리설이 냉큼 안겼다.

“십 년 만의 재회 아닐까요?”

“응, 아니야.”

도리도리.

품속에서 부비적거리는 머리 가마를 내려다보던 초운휘가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교관님이 오시는 날이잖아요.”

그건 그런데.

가족 면담치고는 너무 화려하지 않냐는 말이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환대는 차치하고, 저쪽에 이상한 것도 눈에 들어왔다.

“나를 야속하게 바라보며 끌려가는 쟤들 뭐야.”

“점심거리에요. 든든히 먹고 다니셔야죠.”

“황소 세 마리와 돼지 일곱 마리를 점심으로 먹어?”

“조촐하게 준비했지만, 모쪼록 남기지 말고 즐겨주세요.”

아무래도 백리설의 오늘 목적은 암살이 아닐까 싶다.

사인은 복부 폭발 혹은 과식으로 인한 호흡곤란이 아닐까?

얼떨떨해하고 있자니, 한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어서 오게.”

백리선호였다.

잔뜩 주눅이 든 무한장주 내외를 등 뒤에 세워 둔 채, 그가 인사를 건네왔다.

“일전에 봤지? 백리선호일세. 이쪽은 내 조카인 무한장주와 그 내자일세.”

자신과 있었던 일은 전해 듣지 못했는지, 초면이라며 인사를 권한다.

“무, 무한장주 백리정순이오.”

“초, 초 교관님을 뵈어요.”

두 사람은 일전의 일은 기억하는지 덜덜 떨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겁을 먹은 모습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뭐, 함구해달라는 약속은 지키는 모양이네.’

적당히 인사를 건네자, 백리선호가 안쪽을 가리켰다.

“어서 안으로 들지. 우리 설이가 많이 기대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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