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적령기 무림교관-64화 (64/194)

제18장 흔적을 찾다 (4)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독고율을 찾아갔더니,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주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 어제 일이 있던 것을 네가 어떻게 아냐?”

“무림맹의 맹주 놈이 겁도 없이 주군을 찾아내라고 하더군요.”

뒤이어 이어진 설명에 대략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벽루 너머에 있던 것이 무림맹주였던 모양이군.’

어쩐지 기감이 무척 예리하고, 대응이 빠르더라니, 무림맹의 대빵다운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는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마침 현장에 있어,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요.”

“응, 그렇네.”

“다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조금 걱정입니다. 주군께서는 더 은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너무 대놓고 기운을 드러냈다.

마음이 흔들려 평정심이 깨진 것도 반성해야겠지.

‘색시만 연관되면 마음의 동요를 억누를 수가 없다니까.’

사람을 백 명 천 명 죽여도 평정심을 유지할 자신이 있는데, 유독 연인만 생각하면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지.’

어차피 색시만 찾아내고 이곳을 뜨면 문제가 없으니까.

“어제 일은 그래. ‘그녀’의 흔적을 찾은 것 같아서 무리했다.”

조금 전까지 불퉁하던 독고율의 표정에 금이 갔다.

“정. 실. 부. 인. 의 흔적 말씀이십니까?”

묘하게 강세를 주는 말투는 좀 피해줬으면 좋겠다.

누가 들으면 첩이 열 명쯤 있는 쓰레기로 오해할 것 같거든.

“응. 맞아.”

“정. 실. 부. 인.을 찾으셨다니….”

“확실한 것은 아니야. 다만, 그녀가 즐기던 향기를 맡은 것 같아.”

“흐음….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셨군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도망친 주군을 찾다가, 피 냄새만 맡으면 눈이 돌아가고 그랬지요.”

그건 좀 다른 것 같은데.

‘아니, 왜 다른 것도 아니고, 피 냄새를 맡으면 나를 떠올리는데….’

평화롭게 살아가는 소시민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어쨌든 당장 독고율은 마음이 동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좋습니다. 정실부인. 아들딸 구분 말고 열두 분만 낳아주실 분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혹 어떤 향기였는지 기억나십니까?”

뭔가 무서운 이야기가 들린 것 같지만, 마음이 급한지라 얼른 대꾸했다.

“향기는 설명하기 어려워.”

말하자면, 달콤한 것 같은데 은은하고, 향긋한 차향 같으면서도 굉장히 중독성 있는 향기랄까?

설명해 보라면 설명할 수는 있는데, 상대가 알아먹을지 모르겠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냄새에 반응하는 변태가 되는 듯한 느낌이라 꺼려진단 말이지.

다행히 손을 써두었다.

“은밀히 암혼향을 뿌려두었어.”

암혼향.

암혼흑풍사만이 알고 있는 비전의 추종향이다.

향초나 특이한 향기를 조합해 만드는 추종향과 달리, 진기를 특정한 방식으로 태워 상대에 각인시키는 비술.

“암혼향이라. 절묘한 수로군요.”

“응. 찾아볼 수 있을까?”

“한 사람쯤 불러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독고율이 자신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그날 저녁.

독고율은 연무장 한켠으로 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평범한 키에, 제법 예쁘장한 얼굴을 한 소녀였는데, 걸음걸이를 보니 꽤 명문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독고율은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어깨를 툭툭 쳐주었고, 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어쩔 줄 몰라 하다 쪼르르 사라졌다.

소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독고율이 다가왔다.

“뭐라고 한 거냐?”

“무공을 좀 봐주겠다고 했더니, 별말 없이 따라오더군요.”

“…그랬냐?”

“자꾸 말을 걸어 난감했습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힌 것 같은데 자꾸 제 쪽으로 넘어져서 곤란했고요.”

그러시겠지.

독고율은 꽤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혹시 사모가 될지 모르는 소녀와 접촉이 있었으니 식겁한 것이겠지.

‘역시 다른 사람이 찾게 하면 안 돼.’

색시의 취향인 ‘연상’에 ‘교관’이라는 조건을 만족하는 데다, 잘생긴 탓에 짜증이 나거든.

각인 효과랄까?

가장 먼저 나타난 취향의 남자는 자신이 되어야 했다.

“어땠습니까?”

“어땠을 것 같아.”

“아니군요. 산삼인 줄 알고 캤는데, 썩은 당근을 발견한 심마니 같은 표정이십니다.”

정확하다.

소녀는 자신이 찾던 연인이 아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분명 향기는 딱 맞았는데.”

“향낭(향주머니)에서 나던 향이었습니다.”

어째서 저 소녀는 색시와 같은 향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을까?

“저 아이의 소속은 알고 있어?”

“이름은 서옥랑. 소속은 청성파이며, 스승은 백운검 여재일 도장입니다. 주력 무공은 청운적하검이며, 청성파의 절기인 부운약표를 사사 받았다고 합니다.”

“…잘 아네.”

“가만히 있었는데도, 줄줄 늘어놓더군요.”

아마 정파적으로 미남 기준에 부합하는 외모 때문이겠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서옥랑이라. 귀에 익은데….’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과거를 애써 되새겨 내었다.

‘맞아. 신무학관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

사람을 몰고 다니는 여왕벌 계열은 아니라지만, 오 년이 넘게 신무학관을 다녔으니, 친구가 없는 쪽이 이상하리라.

‘청성파의 친구가 있었다는 것도 같고.’

기억은 완전치 않았다.

그녀와 화해하게 된 것은 정파와 수년을 싸운 이후의 일인 데다,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를 느긋하게 나눌 여력은 없었으니까.

다만, 중요한 단서를 구했다.

향기의 정체가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향낭 때문이라는 것.

‘생각해보면 색시 성격에 향주머니 같은 물건을 직접 사서 가지고 다닐 리가 없지.’

향주머니는 비싼 물건이다.

안에 들어가는 향초도 값비싼 데다, 가장 보편적인 사향만 해도 사향노루에서 극히 일부분만 채취할 수 있는 비싸고 귀한 재료다.

‘돈에 쪼들리는 색시가 거금을 들여 사치품을 구할 리 없고.’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친구에게 받은 향낭을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때, 망천회의 시대에는 추억의 단편이나, 유서, 누군가의 유품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니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

생각을 정리한 초운휘가 말했다.

“율. 서옥랑과 친한 아이들을 파악해 볼 수 있을까?”

“가능은 할 겁니다.”

“그들을 모두 불러내면 어떨까?”

그러자 독고율이 난색을 표했다.

“한둘은 몰라도 모두는 어렵습니다. 꽤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점도 마음에 걸리고요.”

“끙. 하긴. 꽤 활달하게 무리를 이끌고 다닐 것 같긴 하더라.”

“더군다나 은천관은 관도들의 거처가 성별로 명확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들은 적이 있다.

‘은천관부터는 성별별로 숙소도, 연무장도 나누어 쓴다던가?’

물자 아낀다며 수련용 허수아비도 고쳐 쓰는 똥천관과는 아주 대우가 천지 차이다.

“가장 문제는….”

독고율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은천관이 너무 큽니다.”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최소 동천관의 두, 세배는 된다더군요.”

“이런 제길.”

동천관도 워낙 광대해 샅샅이 뒤지는 데 반년 가까이 걸렸다.

‘그럼에도 은천관은 두, 세배는 더 크다고?’

정파 놈들이 제정신인가 싶다.

“주군. 가장 놀란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뭔데.”

“은천관 안에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학관 안에?

뭔가 잘못 본 것 아니고?

독고율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짜 마을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것이 있냐 물었더니, 대답이 뭔 줄 아십니까?”

그, 글쎄.

“강호행 실습을 나가기 전 모의전을 벌이는 연습용 마을이라고 하더군요.”

“…….”

미친 정파 놈들.

마교 놈들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정파 놈들도 정상이 아니다.

“심지어 숲과 강도 있었습니다. 역시 야외에서 적과 조우했을 때를 대비한 모의 훈련터라고 하더군요.”

목소리에 절절한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금천관은 그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주군. 무림맹은 미쳤습니다.”

신강의 사막에서 굶주리다 못해 흙을 뭉쳐 먹던 독고율이다.

깡촌 사막 출신인 율로서는 풍족하다 못해 돈이 흘러넘치는 정파의 문명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

“제길. 미행은 무리인가?”

“수색은 고사하고, 지형을 파악하는 데도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독고율의 고생이 훤히 보였다.

교관들을 장악하랴, 성격 나쁜 정파의 꼬맹이들을 휘어잡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재차 독고율이 제안을 했다.

“주군. 단야를 불러들이시지요.”

“싫다고 했잖아. 다른 암혼흑풍사가 냄새를 맡을 거라고.”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칫 올해 정. 실. 부. 인. 께서 금천관으로 넘어가신다면 어쩌시렵니까?”

“금천관에?”

눈앞이 암담해졌다.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은천관도 학을 떼겠거늘, 더 큰 금천관을 뒤져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좋아. 율.”

독사과를 베어 무는 느낌으로 초운휘가 말했다.

“단야를 불러들여.”

“존명!”

이제는 진짜 물릴 수 없는 상황이다.

***

연무장에 자리를 잡은 초운휘는 독고율의 조언을 떠올렸다.

- 주군. 단야의 일과 별개로 준비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독고율은 말했다.

- 동천관에서 확실한 성과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라도 실력이 떨어지는 이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성과라면 간단하지.”

교관의 실력은 자신이 맡은 관도를 얼마나 견실하게 키워냈느냐가 관건이다.

“내 손이 닿은 녀석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것도 싫고.”

적당한 시점에 다시금 쥐어짤 생각이었으니 문제도 없다.

문제는 다음 조건이었다.

- 주군께서는 강호행 전문 임시 교관으로 지원해 주십시오.

이유는 나름 적절했다.

- 인사 공백이 가장 크게 발생한 곳입니다.

- 가장 많은 관도들과 대면할 과목이기도 하지요.

- 더하여, 성과만 낼 수 있다면 이례적인 특채도 가능할 겁니다.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으니.

“강호행에 보호자가 왜 필요해?”

- 산 놈은 계속 굴리고, 죽은 놈은 어쩔 수 없지.

간단한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초운휘로서는 당최 무슨 일을 맡아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아이고, 골이야.”

일단 독고율이 조언한 대로 [교관직무서 – 강호행 전문]을 살피던 초운휘는 냉큼 책을 덮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럽네.”

이거 어쩐다.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위기에 봉착하게 될 줄이야.

끙끙거리며 흙바닥을 뒹굴던 초운휘의 시야에 수련에 여념이 없는 인간이 눈에 들어왔다.

방학임에도 좀처럼 쉬지 않고, 땀을 흘리기에 여념이 없는 녀석.

“남궁윤호.”

몸을 오뚝 세우고 부르자, 퍼뜩 놀란 남궁윤호가 떨그렁 검을 떨어트렸다.

“교, 교관님.”

“왜? 그렇게 놀라?”

“교관님께서 제게 말을 건 것이 열흘 만에 처음입니다.”

그랬나?

내가 좀 심했네.

“찾아가도 쫓아내시고, 영 제가 안 보이시는 것처럼 행동하셔서 진짜 유령이라도 된 느낌이었습니다.”

하하.

속없이 웃어 보이며 녀석이 물었다.

“제게 물으실 것이 있으십니까?”

“응.”

초운휘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너. 강호행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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