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실력증명 (5)
“네년의 뻣뻣한 고개부터 꺾어줘야겠어.”
스릉.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고쳐 쥐고 있던 찰나였다.
“손봐주고 싶은 건 네 정신머리랍니다.”
사뿐. 사뿐.
검을 품에 안은 백리설이 자박자박 걸어온다. 이에, 문득 엄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속도가.’
톡톡 발끝으로 땅을 차는 것처럼 뛰는데, 어느 순간.
“헉.”
눈을 깜빡하니, 코앞까지 쇄도해 있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웅웅웅웅.
품에 안은 네 자루의 검이 소름 돋는 검명을 울려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동천관의 애송이가 검명을 울려?
검명(劍鳴)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검이 검객과 하나가 되어야 선보일 수 있는 신기(神技).
“잡종개도 매 맞는 이유는 알아야겠죠? 과분하겠지만요.”
하지만 놀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검집에서 들썩이던 검 하나가 솟구쳐 오른 탓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온 일격에 엄호는 기함하며 검을 휘저었다.
채채채챙!
‘무겁다.’
삭풍처럼 몰아치는 검격을 막은 것은 좋았지만, 손목이 뻐근해졌다.
상대가 가볍게 날린 검격에 실린 역도가 범상치 않다는 뜻임을 어찌 모를까.
“첫째. 남의 것에 손을 댄 죄.”
가가가각! 따악!
검영 하나를 놓쳤다 싶은 순간, 검날을 긁으며 솟구친 검신이 따앙. 손목을 때렸다.
“절도죄랍니다.”
휘익.
이번에는 또 다른 검이 솟구쳤다.
‘쌍검의 고수?’
이 속도에 쌍검을 쓴다니.
대경한 엄호는 재빨리 검신을 흔들어 상대의 검을 쳐내며, 크게 휘저어 새롭게 솟구치는 검을 때렸다.
“둘째는. 더러운 혀로 저를 언급한 죄.”
짜악!
초식을 이어가던 엄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지나간 검신이었다.
‘언제 검을 뽑았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순간에 경시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뒤이어 찾아온 것은 경악과 엄청난 크기의 자괴감이었다.
“셋째가 가장 중요해요. 감히 저 천박한 제갈 놈의 애인 운운한 점.”
거기까지 말한 백리설의 검이 삭풍처럼 움직였다.
쉬쉬쉬쉭.
품에 안은 검집을 허공에 던지더니, 양손에 쌍검을 쥔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찔러온다.
“헉!”
수십 개의 검영이 베어오자, 엄호는 조금의 방심도 없이 전력으로 검을 움직였다.
따다다다당!
하지만 쉽지 않았다.
촤악!
미간에 핏물이 튀었다.
어느새 검기가 이마를 훑고 간 것이다.
촤악!
콧등이 뜨거웠다.
투두둑 코피가 흘러내렸다.
따당!
“호호호. 저를 불쾌하게 한 손은 이제 필요 없지 않아요?”
이 미친 여자가.
정신없이 검을 막고 피하는 엄호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분명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빠르고 묵직한 검격을 얻으려면 십 년을 꼬박 수련해도 부족하지 않은가.
“잠깐.”
뭔가 착오가 있다.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려 했지만.
사뿐. 사뿐.
상대는 한걸음만으로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날카로운 검격을 베어오고 있었다.
쉬익!
서슬 퍼런 파공성에 정신이 번쩍 든 엄호가 재빨리 검을 세워 팔방으로 베었다.
따다다다당!
간신히 비켜냈다.
떠엉!
하지만 하나를 놓쳤다.
‘이상하다? 분명히 쳐냈는데.’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발끝으로 검을 차올리며 새로운 검을 뽑아 드는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실로 기이막측한 검법이었다.
‘이대로는 필패다.’
또다시 수십 개로 분화하는 검영에 엄호는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일검법이 아니면 안 돼.’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심지어 개인적인 일로 사문의 비기를 펼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 아쉽기도 해라.”
하지만 소매를 입가로 가시고, 자신을 조롱하는 여인을 본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분노가 이성을 압도했다.
‘저년에게 한 방 먹여줘야 해.’
그것은 광견으로 불리며 우월감을 채워왔던 존재의 증명이자.
구파일방의 한 축인 점창파의 문도로서, 이렇게 꼴사납게 패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으아아아아아!”
처음으로 엄호가 단전의 공력을 일으키며 검을 세웠다.
우우우우웅!
일방적인 수세에 몰린 와중이라, 전력을 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점창파가 공들여 키운 인재답게 짧은 찰나에 한자나 되는 검기를 피워낸 것이다.
“흥!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어머. 꼴같잖게 엄살이 심하네요.”
“사일검법의 위력을 목도하는 것이 좋을 터!”
우웅!
사일검법의 근간이 되는 낙일진결이 기혈을 내달리자, 엄호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낙일. 해 질 녘의 노을.
진결. 그것을 닮은 진기.
단전에서 일어난 붉은 기운이 손목을 타고 검신에 옮겨간 순간.
웅웅웅웅.
검신이 떨리며 검기가 짙어지더니 검 끝에 붉은 불꽃을 피워냈다.
“맙소사! 저건 위험해!”
“점창파의 성명절기야!”
“미친놈! 비무에서 살초라니!”
관도들이 떠들어댔지만, 엄호는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벤다! 무엇보다 빠르게.’
빛살마저 갈라낸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사일검법 제 일 초 일수초현!
- 일 초식. 현재를 베어낸다.
그가가각!
바람을 꿰뚫는 검격이 검 끝과 상대를 관통하는 가장 짧은 거리를 점했다.
쉬아아악!
검이 가상의 선을 따라 매끄럽게 베어내며 펑펑 파공음이 터져 나갔다.
“이런 기파라니!”
“검이 사라졌어?”
무지몽매한 것들.
검의 궤적조차 보지 못하다니.
하지만 엄호는 관도들의 반응으로 확신했다.
‘제대로 들어갔다.’
상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 승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엄호는 기함하고 말았다.
“어머. 이건 좀 놀랍네요.”
파팍!
상대의 손에 검이 사라졌다 싶었더니.
“크아아악!”
어느새 두 개의 칼이 양 발등을 꿰뚫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신법이 봉쇄되었다.
“잡종개도 빌어먹고 살려면 한 수는 있다는 것이겠죠.”
촤악!
동시에 필승의 초식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따다다당!
춤을 추듯 너울너울 움직이며 펼쳐내는 검로에 사정없이.
촤악! 촥!
일격필살의 초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악몽이야.’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엄호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촤악!
검에 꿰인 두 발에 멈춰선 순간, 일수초현의 초식을 쪼갠 검격이 옆구리를 훑었다.
“커헉!”
비명을 지른 순간, 이번에는 어깨가 화끈거렸다.
“아악!”
또 다른 검이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촤악! 촤악!
뒤이어 몸을 베고 가는 서늘한 참격. 마치 서서히 말려 죽이겠다는 듯 거죽만을 베고 가는 검은 정말이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커억! 컥!”
두 발을 채집된 곤충처럼 지면에 박힌 채 검을 받아내던 엄호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두려움에 휘적이던 손발로 조악하게 권법을 펼쳐 맞서려 했다.
“어머.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나요?”
우득.
흐느적 권법을 펼치던 손목이 꺾였다.
“커헉.”
발등을 꿰뚫은 검을 뽑으려 했다.
“잡종개는 건강하네요.”
촤악!
등판만 베이고 말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백리설은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음을.
촤촤촤촥!
피를 갈구하는 광기에 찬 학처럼.
양팔을 너울거리며 피보라를 만들어내기를 그치지 않았다.
‘사람 살려….’
무차별적인 폭력에 엄호는 사고하기를 멈췄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죽는다.
이대로는 죽고 만다.
다급해진 엄호가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 항복.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아무리 격한 싸움이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무.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 하앙보….”
하지만 막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와드득.
“케헥!”
뭔가 입을 뚫고 들어오더니 목구멍을 치고 훅 빠져나갔다.
후드득.
뜨거운 피와 함께 이빨 몇 개가 툭툭 떨어졌다.
그제서야 엄호는 자신의 목젖을 친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머. 얼마 전에 산 신발인데...”
슥슥.
예쁜 당혜였다.
꽃 장식이 된 신발을, 이제는 피가 흥건한 당혜를 슥슥 땅에 닦는 상대를 보며 엄호는 절망했다.
‘이 여자는...’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 없구나.
나를 살려줄 생각이 없구나.
“게에에에엑….”
고통에, 수치스러움에 울어보려고 했지만, 이빨이 부서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 아직 패하지 않았다고요?”
아니야.
‘항복. 항복했다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상대는 엄지를 치켜 보인다.
“의기를 높이 사서, 저도 마지막까지 정성껏 상대해 드리죠.”
엄호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
지켜보던 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공이 떨어지는 이들이 본 것은 많지도 않았다.
비무가 시작되고.
양팔을 펼친 소녀가 소매를 펄럭이며 움직인다 싶더니, 엄호의 검이 날아갔다.
안목이 있는 이들은 좀 나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그들의 충격은 한결 더 했다.
언호승이 얼떨떨해 중얼거렸다.
“사일검법을 파훼했어?”
“…한순간에 검법의 맥을 끊었어.”
임소정의 졸린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핑그르르. 푹.
심지어 저 미친개가 검마저 놓쳤다는 사실에 쌍둥이도 기가 막힌 듯했다.
“전투 중에 검을 놓치는 수치스러운 일을, 엄호가 당했다고?”
“이거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검사는 죽을 때까지 검을 쥐고 죽는 것이 미덕이다.
대 점창파의 제자인 엄호가 패배한 것도 모자라, 검을 놓치고 기절했다니.
더욱 충격은 소녀의 반응이었다.
“어머! 필살의 죽은 체하기인가요?”
“저 알아요. 기절한 척 속이고, 방심했을 때, 공격할 속셈이죠?”
“악적! 저는 속지 않아요!”
퍽퍽퍽퍽!
괴상한 주장을 하며 소녀는 정성스럽게 엄호를 때려눕혔다.
그리고는 아예 기절한 채 엎어진 그를 퍽퍽 걷어차기 시작한다.
이것을 보다 못한 엄호의 동료가 나섰다.
“멈춰! 승부가 났어!”
“방금 잡종개가 ‘아직이야.’라고 중얼거렸어요.”
“기절했어! 이미 의식이 없다고!”
“뭐요?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다고요?”
퍽퍽!
신명 나게 걷어차는 아담한 발길질에 엄호는 꿈틀꿈틀거리기만 했다.
지켜보던 언호승이 중얼거렸다.
“비무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네.”
“…응. 그런 것 같지?”
“재능이 어떨지는 몰라도, 성격만은 검후님보다 더한 것 같은데.”
강력한 무공과 북풍한설을 닮은 성정으로 남해도를 평정한 검각의 전설.
“…동감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임소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저. 저.”
말려야 한다.
예상외의 결과에 은천관의 교관 둘이 개입하려 했지만.
“워워. 어딜 가십니까?”
“제갈 관도. 비켜라.”
“고작 관도들 사이의 비무 아닙니까? 지켜보시지요.”
“저게 어딜 봐서 비무란 말이냐.”
“비무가 아닐 것은 또 뭡니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두 교관이 시선을 나누며 실력행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빙글빙글 웃던 제갈탄이 곁에 선 남궁윤호를 향해 말했다.
“윤호. 재미있는 것 알려줄까?”
“뭘 말이지?”
“교관과의 비무도 꽤 재미있단 말이지.”
“꽤 구미가 당기는군.”
“예전과 지금 교관 수준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살펴보고 싶은데, 어디 시간 좀 내주시렵니까?”
슬쩍.
검에 손을 올리는 제갈탄의 모습에 두 교관은 잊었던 악명을 깨달았다.
‘교관 사냥꾼.’
동료 교관들을 은퇴하게 만든 제갈세가 광인의 검이 얼마나 매서웠는지를.
오싹. 오싹.
몸이 떨려왔다.
못 보던 사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기세가 목덜미를 스쳐 가는 것만 같았다.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갈탄도 문제지만, 이쪽도….’
동천관의 지박령이라더니.
남궁세가에서 버려진 둔재라더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준다고?’
이건 일개 관도의 기세가 아니다.
만약 남궁세가의 결정이 사실이라면 진지하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덜덜덜덜.
움직여야 하는데 발이 쉽사리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퍽퍽퍽퍽!
그 사이, 둔탁한 폭력이 이어지고.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아이를….”
“으앙. 미안해요.”
퍽퍽퍽퍽!
작은 아이가 기묘한 기합을 지르며, 관도 둘의 팔을 꺾고 있었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