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보충수업 (4)
토독. 토독.
뺨을 두들기는 차가운 감촉에 남궁윤호가 눈을 떴다.
시야는 어둑한 가운데, 차가운 물줄기가 톡톡 미간을 적시고 있었다.
‘밤이슬?’
몸을 일으켜 돌아보니, 주변에는 엎어지거나 고꾸라진 채 널브러진 관도들이 보였다.
“오늘도 먼저 깨어났군.”
교관의 배려인가?
‘자상한 분이니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뜻이겠지.’
우득. 우득.
상체를 일으켜 비명을 지르는 뼈마디를 풀어낸 남궁윤호가 묵묵히 일어나, 한쪽에 모닥불을 피웠다.
탁탁.
이제는 장난처럼 움직이는 손길로 불씨를 틔워 낼 수 있게 되었다. 바지런히 움직여 한켠에 마련해둔 장작을 가져와 모닥불을 지피고, 곁에는 척척 솜씨 좋게 천막을 쳤다.
천막 덕에 밤이슬을 맞지 않을 테니, 다음은 깨어났을 때를 위해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 차례다.
덜컥. 덜컥.
능숙하게 모닥불 곁에 철 냄비를 얹고 쌀과 물, 말린 야채 쪼가리를 넣고, 양념을 털어 넣었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제갈탄.
“이런. 내가 너무 늦었군.”
“하하. 머리에 까치집이 굉장하군.”
“뭐, 밤새 누워 있었으니까.”
뒤이어 백리설과 모용소혜가 동시에 눈을 떴다.
다행히 교관의 배려 탓인지 두 사람의 몰골은 한결 나았다.
“흠흠. 맛있는 냄새.”
“남궁 오빠. 배가 고파요오오.”
“하하. 넉넉히 준비했으니, 어서 요기나 해.”
어제 씻어둔 그릇에 따뜻한 국을 담아 넘기자 졸린 눈으로 죽을 떠먹은 모용소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그래?”
“예전에도 상당했는데, 이제는 진짜 장난 아니네요.”
대체로 평가가 박한 백리설도 찬사를 늘어놓았다.
“어머. 정말이네요. 본가의 숙수조차 비교가 안 될 독보적인 맛인걸요?”
“일전에 모의 훈련장에서 산 비전의 향신료 덕분일 겁니다.”
죽을 우물거리던 제갈탄이 목이 메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다, 윤호.”
“뭐, 교관님께서 무공 다음으로 성취가 놀라운 것이 요리라고 하긴 했지.”
“으엑. 교관님은 무인에게 못 하는 말도 없네요.”
“자부심을 가져요. 교관님의 입에서 나온 것을 생각하면 극상의 찬사일 테니까요.”
딱히 상관없는데.
남궁윤호는 조금도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잔뜩 떠들며 모두가 옹기종기 앉아 죽을 나누어 먹는 광경을.
말갛게 익어가는 모닥불이 각자의 볼을 발갛게 데우면서 말이다.
‘이런 것도 참 좋군.’
남궁윤호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다.
냉랭했던 가문에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을 단란한 시간.
다만, 이 고즈넉한 정경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에 백리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쳇. 벌써 일어났네요.”
돌아보니 어깨너머로 정신을 차린 언호승이 바닥에 주먹을 박아 넣고 있었다.
“제길! 제기랄!”
쿵쿵.
주먹질 소리에 천막 아래 잠들어 있던 이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하나같이 잔뜩 찌푸린 얼굴들.
‘저들은 뭐가 불만인 걸까?’
지금의 남궁윤호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차가워진 몸을 데우며 모닥불 곁에 둘러앉은 가운데.
“좀 이상하지 않아?”
언호승이 불쑥 말했다.
“맛이 이상했나? 나름 정성을 다해 요리했는데.”
“그게 아니고!”
언호승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외쳤다.
“너희 교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이지?”
“꽤 독특한 분이긴 하지.”
짧은 평에 언호승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독특한 사람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잖아.”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네.
“음. 자상하고 늠름한 분?”
“성격은 최악이지만요.”
백리설과 모용소혜가 끼어들었지만 언호승이 원하던 대답은 아닌 모양이다.
결국, 임소정이 끼어들었다.
“제갈 소협.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임소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 세 분은 동천관만 겪어와 모른다 해도, 한때 제갈가의 기재로 자라온 당신은 다르겠죠.”
“…뭐. 그렇지.”
“교관의 강함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녀의 말에 언호승이 왈칵 반색하며 외쳤다.
“수상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야. 일단 무공 수준부터 괴이쩍다고.”
무공수준이라.
가만 생각해보니 교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순수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난 진주언가의 대공자야. 그런 내가 일개 똥천관 보모자식에게 당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어머. 실력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네요.”
“너.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배워둬야 할 거야.”
“호호.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약골.”
소매로 입가를 가린 백리설과 언호승 사이에 불꽃이 튀겼다.
두 사람을 막아선 것은 제갈탄의 말이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이상할 정도의 격차인가?”
“윤호. 넌 교관의 무공 수준에 들어본 적 있나?”
장작을 던져 넣으며 남궁윤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응. 일류 수준이라고 들었다.”
“훗. 말도 안 되는 소리.”
“?”
언호승 또한 고개를 저었다.
“일류? 빌어먹을. 나도 일류에 발을 걸친 몸이라고.”
쌍둥이도 가세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애초에 은천관의 상위 서열을 노리려면 일류는 기본이야. 괜히 주목받는 후기지수가 아니라고!”
임소정이 제갈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갈 소협은 어떻게 생각하죠?”
“당연히 어느 정도 수준을 숨겼겠지. 강호에서 전력을 알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맞아요. 교관들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강한, 전력을 감춘 분도 있을 테죠.”
도산검림에서 살아가려면 실력의 삼 할을 감춰라.
오랜 강호의 격언이었다.
“문제는 그 간극이에요.”
삼 할. 하다못해 절반의 실력을 감춘다고 저와 같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일류는커녕, 윗줄의 고수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수준이야. 상급 교관도 이렇게 압도적이지는 않았다고.”
은천관 교관의 실력은 기본적으로 완숙한 일류.
개중에는 절정의 영역에 발을 들인 고수들도 있다고 했다.
다만, 상급 교관만큼은 완숙한 절정의 고수라 언호승은 말했다.
“어쩌면 상급 교관조차 눈 아래로 여기는 고수일지도.”
이야기를 듣던 좌중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절정의 경지. 그 경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자.
“절정초월.”
“초절정의 고수….”
검기(劍氣)의 제어가 극에 달해, 성강(盛彊)을 이루고, 비로소 베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강기(剛氣)의 영역마저 거머쥔 강자들.
이런 탈인지경의 고수들을 일컬어 초절정, 혹은 절정초월의 경지라 하였다.
천부적인 재능은 기본이고, 하늘의 운이 따라줘야 얻을 수 있다는 경지.
듣고 있던 모용소혜가 빽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교관님이 그런 대단한 사람일 리 없잖아요.”
생각 없이 주워온 강아지가 알고 보니 몹시 귀해 기를 수 없는 희귀 늑대라는 사실을 들은 아이처럼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초절정 고수는 걸음마다 강자의 품격이 남다르다던데.”
“존재하는 것만으로 천하를 떨쳐 울리는 위압감은 어떻고요?”
“강자의 느낌이라고는 애벌레 다리만큼도 없는 사람이라고요.”
모두는 떠올렸다.
걸음마다 게으름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모습과 존재하는 것만으로 속을 긁어대는 존재의 모습을.
‘그건 그래.’
순식간에 모용소혜에 설득당했다.
하지만 언호승은 끈질겼다.
“의아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 아니고서는 압도적인 강함을 설명할 수가 없어.”
“교관의 성격 때문 아닐까요?”
“교관의 성격?”
“다른 교관분들과 달리,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두들기는데 거리낌이 없는 분이라서?”
다른 교관분들은 관도를 상대로 적당히 여유를 둔다던데.
듣고 있던 남궁윤호가 손을 들었다.
“나도 여기에 한 표.”
이번에는 임소정이 도리질을 쳤다.
“농담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에요. 저만한 강자가 동천관의 교관이라니, 이상한 일이라고요.”
“초절정의 영역은 너무 과한 추측이겠지만, 교관의 실력이 이상한 것은 여전해.”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지.”
제갈탄이 말을 받았다.
“언호승. 일류와 절정의 차이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없다.
워낙 명확한 기준이 있으니까.
“검기를 피워 올릴 수 있게 되면 일류. 나아가 공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져 검기를 마음대로 뽑아낼 수 있으면 절정이라고 한다.”
“정론이로군. 어디까지나 경지는 공력의 고강함에 따른 구분일 뿐이야. 초식의 정교함이나 기발함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지.”
“…그 말은 임시 교관이 초식에 유독 강한 인간이라는 건가?”
“교관은 시골 문파 출신이니까. 영약 같은 귀한 것을 먹을 수 없었을 거야. 재능이 있어 검귀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심후한 공력의 고수가 되지 못하는 시골 무사는 얼마든지 있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군.”
귀한 가문에서도 영약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문의 손꼽히는 인재들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수상한 점은 여전하지만.”
되풀이되는 대화를 정리한 것은 남궁윤호였다.
“진짜 수상한 점은 그런 강자가 나 같은 둔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지.”
“…….”
“더하여. 숨은 강자가 지도해준다면 마땅히 기꺼워해야 하거늘, 수상한 구석부터 찾는 쪽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군.”
임소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분이네요.”
“당장 중요한 것은 모의훈련일 텐데, 굳이 교관의 실력을 문제 삼으려는 것은 자존심 때문으로 보이는데, 맞소?”
“…부정하지 않겠어요.”
“응. 인정해. 시골뜨기 교관에게 당해서야 마음부터 무너질 것 같으니까.”
동천관의 이름 없는 교관보다 ‘숨은 고수’에게 당했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니까.
이에 남궁윤호가 말했다.
“교관님께서 내게 한 말이 기억나는군.”
불과 얼마 전의 일이건만.
평생을 안고 가게 될 것 같은 한 마디의 가르침.
-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상대의 장점부터 보는 버릇을 익혀야 할 거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정리하면 어떨까?”
그의 한 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야 언호승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투덜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은 참 잘하는군.”
거기까지 말한 언호승이 남궁윤호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은천관에 대해서 뭣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언호승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따라와. 내가 현실을 보여주마.”
***
언호승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한 삼 층 전각이었다.
붉은 기둥에 화려한 장식이 양각된 모습은 화려함의 극치인지라 남궁윤호는 꽤 놀라 버렸다.
“엄청나군. 이곳은…?”
“촌스럽게 굴지 마라. 고작 식당일 뿐이니까.”
이 거대한 건물이 전부 식당이라고?
“심지어 가장 낡고 볼품없는 곳이야. 보충조 전용 식당이거든.”
정말이지 은천관은 동천관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입을 다물지 못하자 언호승이 피식 웃었다.
“놀라는 것은 이제부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