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적령기 무림교관-98화 (98/194)

제27장 보충수업 (5)

사사사사삭.

복면인들이 낙엽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각자 거리를 좁히고 방위를 바꿔가며 서슬 퍼런 포위진을 만들고는 일제히 살기를 피워 올렸다.

스스스스스.

휘몰아치는 살기에 낙엽이 일제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럼에도 노인은 여전히 품에 검을 안은 채 미동도 없었다.

“흐음.”

심지어 눈까지 감는다.

적이 보이지도 않는지 혼자 사색이라도 하는 투였다.

“미친 늙은이였군.”

짧은 조소와 함께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찔렀다.

파파파팟.

허공에 날려 올라간 낙엽들이 소름 끼치는 살기에 팍팍 쪼개졌다.

기파에 예기를 담는 경지.

완숙한 절정의 고수들이 일제히 들이친 순간.

노인의 신형은 순식간에 난도질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노인이 움직였다.

처음의 한 수는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탁.

게으른 노인이 파리를 쫓듯 한쪽 어깨를 튕긴 것뿐이니까.

취릭.

하지만 작은 몸짓에 노인의 품 안에 곱게 잠자고 있던 검이 폭사되듯 솟구쳤다.

촤아아악!

서슬 퍼런 예광이 줄기줄기 흐르는 검이 야공에 솟아올랐을 때.

촤악!

복면인 하나가 검광을 번뜩이며 노인의 정수리를 쪼개왔다.

순간 비로소 눈을 뜬 노인의 안광이 번뜩였다.

“갈!”

촤악!

허공을 솟구치는 검을 잡은 채 비조처럼 신형을 뽑아 올리자, 복면인의 검기와 몸이 한가지로 쪼개지며 양쪽으로 분리되었다.

푸화하학!

허공을 수놓는 피 안개.

“헛?”

달려들던 복면인들이 헛바람을 삼킨 순간,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노인이 검 끝으로 지면을 긁으며 재차 솟구쳐 올랐다.

촤악!

촤촤촤촤촥!

노인의 검 끝에서 일어난 은하수 같은 검기 다발이 달려들던 복면인들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채챙!

더러는 검을 세워 막거나.

우웅!

공력을 일으켜 튕겨내려는 자도 있었지만.

쩌저저정!

푸화화확!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검이 깨지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실로 경악할 만한 한 수에 취걸개가 대경하며 외쳤다.

“은하분광검! 과연 천하의 절기 중의 절기로다!”

과연 한때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곤륜파의 절기가 아닌가.

“은하분광검? 설마!”

지금까지 위세 등등하던 장득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독비검객 왕우!”

비명 같은 외침에도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복면인들 사이에 떨어져 내리더니 무차별적으로 검격을 날려대는데, 그 모습이 흡사 양 떼 안에 뛰어든 야수 같았다.

쿵쿵. 촤악. 챙!

오른발로 진각을 쿵쿵 밟으며, 검을 찌르고 베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신속한지, 노인이 움직이면 뒤따라 은하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막아! 저자를 막아!”

복면인들의 실력도 간단치 않았다.

상당한 경험이 있는지 동료들이 죽건 말건 금방 혼란을 수습하며 면밀한 포위진을 만들어냈다.

“검진으로 맞선다.”

“놈은 혼자다.”

“공력이 무한하지 않으니 힘을 뺀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역시나 검예에 비해 공력이 일천한 노인이 처음으로 멈춰 섰다.

“상당한 자들이군.”

손아귀에서 비명을 지르는 애검을 본 노인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뚫어내기 쉽지 않다면 돌아갈 수밖에.”

조금 전까지 야수처럼 몰아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훌쩍 꽁무니를 빼는 노인.

쿠쿵.

강력한 진각을 밟으며 일장 여나 솟구쳐 오른 그를 향해 복면인들이 으르렁거렸다.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네 목을 두고 가라!”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새가 아니고서야 날지 못하고, 추진력이 떨어지는 순간 균형을 잃고 낙하하기 마련이니까.

무방비한 상대를 꿰어 버리는 것은 간단한 일.

하지만 이것을 본 장득은 외쳤다.

“안-돼!”

문득 떠올랐다.

강호에 회자되는 신공절학 중에는 가끔 상식을 무로 돌려 버리는 기이한 무공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장득은 허공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전설적인 신법을 알고 있었다.

‘놈이 진정 독비검객이라면.’

허공에서 싸워서는 절대 안 된다.

독비검객(獨飛劍客).

허공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는 고독한 검객일지니.

아니나 다를까.

일장 여를 솟구친 노인이 떨어지기를 거부한 채 거꾸로 서더니, 팽이처럼 휘도는 것이 아닌가.

파라라락!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노인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더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네 번이나 기이하게 허공을 차며 움직이는 신형.

촤! 촤! 촤! 촥!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허공을 차 방향을 바꾼 신형이 용트림을 하는 듯 움직였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핫하! 곤륜의 지맥이라더니, 온갖 정수는 모두 익혔구나!”

뒤이어 따르는 은하수 같은 검광.

결과는 참혹했다.

푸화아악!

후두두둑.

“아, 안돼. 진짜 독비검객일 줄은….”

허공에서 혈우와 육편으로 화한 복면인들을 보는 장득의 동공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흔들리는 망막에 어느새 사뿐히 내려서 검 끝에 영롱한 기운을 피워내는 노인이 맺혔다.

검강(劍鋼).

검기가 투명하게 뭉치며 만들어낸 진짜배기 검강의 현현에 장내에 열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검강이라니!”

“무명노인이 어떻게…. 설마.”

“피해! 검강의 여파가!”

회오리치는 열풍에 휘청거리는 복면인들의 목소리에 경악이 어렸다.

하지만 노인이 한발 빨랐다.

사---악.

일섬(一閃).

한줄기 검광이 번뜩였다.

어두운 가운데 생겨난 작은 실선은 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나무며, 돌이며, 심지어 생명까지 모두.

피핏!

이마에 생겨난 실선을 따라 머리 뚜껑이 스르르 잘린 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가각.

어깨에서 옆구리로 이어진 실선을 따라 상체가 스르르 무너졌다.

사람은 물론이고 검과 병기도, 심지어 등 뒤에 있는 모든 것이 실선을 따라 잘린 채 기울어졌다.

노인의 검이 지나간 자리, 오 장(십오 미터) 안의 모든 것이 베어지고 쪼개졌다.

압도적인 검격.

“쿨럭.”

노인이 휘청거렸다.

“버리면 얻을 것이 있다더니.”

쉬운 일은 아니군.

노인이 휘청거렸다.

***

“안 돼!”

순식간에 반쪽이 되어 나뒹구는 수하들을 보다 못한 장득이 달려 나가려 했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해!’

저런 고수가 무림맹에 가담한다면 회에 큰 위험이다.

혈루석의 탈취에 실패한 지금, 독비검객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사도님을 위하여!’

하지만 그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으니.

“허허. 어디를 가는가?”

“이익. 거지. 비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노인의 신위에 기세가 산 취걸개가 쌍장을 흔들었다.

우우우우우웅.

한층 더 매섭게 울어대는 경력에 장득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제길. 좋지 않다.’

감추어 두었던 마기를 개방하며, 한층 더 열기를 피워 가려 했지만.

“제법 따스하구나. 하지만 너 혼자라면 노부가 어려울 성싶으냐?”

“으득.”

“망천회의 개종자야. 네 목을 두고 가거라.”

더 이상 보호할 것이 없어진 취걸개는 아까처럼 수세적으로 나가지 않았다.

카강! 콰드득!

작정하고 펼쳐내는 항룡십팔장에 장득의 화기가 깎여 나갔다.

쾅! 콰쾅!

장득이 나름 마공을 격발시켜 대항하려고 했지만, 항마의 기운이 잔뜩 담긴 개방의 항룡십팔장은 이마저도 허용치 않았다.

쿵. 퍼펑.

잠깐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엄중한 초식이 이어지며, 채 오십여 초가 지나기도 전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퍼억!

취걸개의 쌍장이 장득의 가슴께를 꿰뚫자 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쾅!

어찌나 강력한지 장력의 여파가 장득의 등 뒤에 존재하는 이장 여 거리의 지면을 황폐하게 만들며 흩어졌다.

“크…억.”

온몸을 헤집는 공력에 장득은 눈을 까뒤집었다.

“끄르르륵.”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은 피는 내장마저 곤죽이 되었다는 반증일지니.

취걸개가 싸늘하게 말했다.

“외롭게 죽어라. 하나씩 지옥으로 보내주마.”

장득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그 뒤는 간단했다.

펑! 퍼펑!

한쪽에는 강력한 장세를 펼쳐내는 개방의 고수.

또 한쪽은 잊혀진 곤륜파의 절기를 펼쳐내는 전대의 고수.

노련한 두 고수의 합공에 복면인들이 모두 몸을 눕히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지독한 놈들이었소.”

“그러게 말이오.”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부쩍 지쳐 버렸다.

“노구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군.”

“말년에 고생을 시켜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왕 형.”

“…왕 형이라니. 농담 아니었소?”

“하하. 이 거지. 평생 거짓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소이다.”

“개방의 장로와 호형호제라니, 강호를 떠난 뒷방 늙은이에게는 너무 과분한 호칭이외다.”

“낄낄낄.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오. 평생 외롭게 살다가, 말년에 간신히 생긴 형님을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끄응. 그래도….”

“포기하시오. 방주께서도 못 꺾은게 이 거지의 고집이니까.”

강짜를 부리는 모습에 왕우의 웃는 낯이 어두워졌다.

그러건 말건 취걸개는 절대로 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강호의 선배인데다, 이 거지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뭐 어떻소?”

결국 왕우가 두 손을 들었다.

“취 형. 이것으로 타협하지.”

“제(弟)가 아닌 형(兄)이라니. 아쉽지만 일단은 알겠소이다.”

나름 만족한 듯 킬킬거린 취걸개가 말했다.

“왕 형은 공력을 회복하고 있으시오. 나는 살펴볼 것이 있으니.”

운기조식을 하는 왕우를 두고, 취걸개는 한참을 시체 사이를 오가며 살피기를 이어갔다.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온 취걸개를 보며 왕우가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그게…. 아는 얼굴이 꽤 있소.”

“망천회의 졸개들이 무림맹에 깊숙이 침투했다는 뜻이겠군.”

“단순한 졸개면 이해하겠는데…. 낭월도까지 있을 줄은.”

“낭월도라면?”

“낭월도 단요. 부현지부의 빈객이외다. 대외적으로는 명망 높은 협사인데, 사실은 맹에서 파견한 감찰요원이요.”

“맹의 내밀한 인사마저 포섭할 정도라면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군.”

“그러게 말이오. 일전의 축출로 일소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망천회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오.”

이걸 어쩐다.

근심 가득 중얼거린 취걸개가 한참 고민하더니 물었다.

“참. 일전에 왕 형이 해준 이야기 있지 않소?”

“무슨 이야기 말인가?”

“혈루석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던 말 말이오.”

기억을 떠올린 왕우가 수긍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했지.”

“그렇다면 참으로 위험한 일이오. 이런 미친 일을 벌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필시 그렇겠지.”

“미루어 짐작건대, 혈루석이 하나가 아니라 한들 수는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묘하게 확신 어린 말에 왕우가 물었다.

“어떤 연유에서 확신을 하는 겐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군.”

왕우의 말에 취걸개가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간단한 셈법이오. 몇 번이나 엄중한 감사를 벌였을 때도 잡지 못했던 배신자들이, 이 돌을 보고 달려왔거든.”

“…필시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이겠지.”

“중요하다 한들 흔한 물건이라면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지 않았겠지. 워낙 치밀해 꼬리를 잡기도 힘든 자들이, 오늘처럼 헐레벌떡 달려오는 일도 처음이었고.”

충분히 수긍할만한 논리였다.

개중에는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니 분명 무림맹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언제나 은밀하게 일을 획책하는 이들답지 않았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군.”

“역시 왕 형이시오. 이 거지의 마음을 찰떡같이 이해하는군.”

호들갑을 떨던 취걸개가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혈루석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니, 그 점을 이용하는 거지.”

“…어떻게 말인가?”

“이 돌을 미끼로. 놈들을 유인하는 것이오.”

“혈루석으로 유인을?”

가히 파격적인 계략에 화들짝 놀라는 왕우를 보며 취걸개가 웃었다.

“무림맹으로 함께 가야 할 이유가 늘었소. 왕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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