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적령기 무림교관-121화 (121/194)

제33장 독안신검 독고율

붓끝을 먹에 살짝 담근 후.

죽죽.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것들을 지워내고는, 말끔한 필체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이것으로 하시죠.”

종이를 흔들어 말린 다음, 내밀자, 기다리고 있던 학무원 문사가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이내 슥 살펴본 문사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과연!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감탄이 어린 시선을 맞추며 독고율이 말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강호네. 논리적인 대응도 나쁘지 않지만, 본질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야.”

“맞는 말씀입니다만.”

학무원 문사가 겸연쩍게 웃었다.

“독고 대협 같은 분께서 이런 사소한 일을 직접 챙기는 일은 흔치 않은지라.”

“미래의 동량들을 보살피는 일을 어찌 사소하다고 하는가.”

“그래도. 중책을 맡고 계신 것이 한 둘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학무원 문사는 대답이 궁색한 듯 보였다. 독고율이 정의로움을 담아 말을 이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특히 최근 주변에 불측한 자들이 횡행하고 있으니.”

“혹여라도 관도들에게 문제가 없도록 하려면 이것이 최선일세.”

“내 한 몸 희생해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그리해야겠지.”

독고율은 도장을 쾅쾅 찍었다.

“동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강호행은 걱정 말게.

독고율의 말에 학무원 문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독고 대협.”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결재 서류를 들고 줄 서 기다리던 문사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슬쩍 청각을 돋워보니.

“역시 일세의 대협이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을 대협께서.”

“아무래도 더 일로정진해야겠어.”

“저분께서 만들어나갈 강호에 한 손 보태야 하지 않겠나.”

경외감 어린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잘 먹힌 모양이군.’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주군을 뒤따르고 싶어 구실을 찾던 와중이다.

‘그렇다고 너무 기뻐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딱 두 번.

검지와 엄지로 눈가를 눌렀다.

‘그리고 피곤한 한숨 한 번.’

고도로 계산된 움직임에 문사들 사이에서 아아- 라는 반응이 재차 터져 나왔다.

‘다루기 쉬운 놈들이군.’

사막 토끼도 이놈들보다는 번거롭지 않을까?

생각하며 서류를 내려놓은 독고율이 말했다.

“다음!”

오늘도 은천관 장악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후우. 지치는군.”

아무리 독고율이라지만 아주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문서나 서류작업이 까다롭다.

최근 들어서는 총관주 백의판관 선인혁이 막강한 권한을 주고, 염화광도 마길상이 지원하는 터라 일이 부쩍 늘었다.

하루에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자코 정파의 미래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것은.

“모든 것은 주군을 위하여.”

중얼거리며 길을 가고 있자니, 저 앞에 일단의 무리가 몰려 있었다.

슬쩍 고개를 치켜드니, 상급 교관들이 작은 원을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걱정은 넣어두게.”

듣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자애로운 목소리.

“무리하게 날 위해줄 필요 없네. 수고로운 일이긴 하나 내가 자처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왕 노사.”

“강호행을 함께하는 것은 일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야.”

자네는 나를 가벼운 약속을 남발하는 사람으로 만들 생각인가?

짧은 질책에 상급 교관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상황을 본 독고율은 직감했다.

‘또 사람들을 속여 먹고 계시군.’

역시 관록은 대단하다.

자신은 꽤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이고 모범을 보여 이 자리에 올 수 있었건만.

아버지는 짧은 시간에 주변인들을 죄다 속여 먹고 있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구만리야.’

생각하고 있자니, 상급 교관들 너머에서 강렬한 전음이 날아왔다.

[율아.]

아버지 사마백이였다.

[이 더러운 정파의 얼간이들을 얼른 치워 버려라!]

배워야 할 것의 목록에 ‘웃는 낯으로 욕설하기’도 추가해 둘까?

***

등장만으로 상급 교관들을 흩어 버리자, 푸근한 인상이 사라지고 암혼흑풍사의 얼굴로 돌아왔다.

“버러지 같은 놈들.”

실눈 사이로 흉폭한 안광을 흘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괜찮다면 알아처먹을 것이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강호행에 따라가겠다고 하니, 저들의 문파에 초대를 하더구나. 얄팍한 것들.”

“곤륜파의 무공이 꽤 탐이 나는 모양이군요.”

“내가 방문한 날이 제 놈들 문파가 피로 씻기는 날인 줄 모르고.”

이를 갈아붙이며, 정성껏 키운 인재랍시고 은근슬쩍 데리고 왔는데, 일장에 머리를 깨부시고 싶었다느니, 마음 같아서는 다 죽이고 싶다느니 흉폭한 대꾸가 돌아왔다.

‘사마세가의 적통으로서 언제나 냉철하라 하시더니.’

아무래도 아버지도 주군과 관계된 일에는 도통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불퉁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도. 어쨌든 주군을 뒤따를 수 있게 되었구나.”

“성공하셨군요.”

“임시 교관에 대한 감시역으로 말이지.”

분명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다.

은천관주가 멍청이가 아니라면, 이런 귀한 고수의 조력을 마다할 리가 없을 테니까.

“너는 어떻게 되었느냐?”

“무리 없이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홀홀홀. 얼마만의 강호란 말이냐. 무려 주군과 함께.”

그건 그렇다.

‘몇 해 만이던가?’

한순간 사라진 주군에 망연자실하게 보낸 시간 너머에, 분명 강호를 질타하던 시간이 있었다.

두근. 두근.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있었다.

“주군과 함께 종횡강호라.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무슨 뜻이냐?”

“더 이상 주군께서 강호에 뜻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난 또 뭐라고.”

돌아오는 대꾸에 사마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주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용납 못 합니다.”

서슬 퍼런 경고에 사마백은 허허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백염을 쓸며 대꾸했다.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후회?

이어지는 목소리가 설핏 떨리고 있었다.

“너무 주군께 큰 기대를 얹은 바람에 이 늙은 것이 불편해지셨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

“내 불찰인 게지. 주군의 능력이 천하를 뒤덮음은 보았지만, 심중에 천하가 없음을 모른 채였으니.”

뒷짐을 진 채 한숨을 푹 내쉰 사마백이 말했다.

“‘그날’ 입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거늘.”

그날.

두 부자가 언급하는 ‘구원의 날’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온통 붉었다.

하늘은 화광이 충전해 멸망의 날이 도래한 것 같았고, 지천에는 시체가 그득했다.

사마세가에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절망하고, 죽음을 노래하게 만든 이들은 오독교.

혈교의 육마맥 중에서도 손속이 악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독교였다.

“고루마군! 네놈이 기어이!”

사마백은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그에 고루마군이라 불린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껄껄 웃었다.

“멍청한 자. 그러게, 경고하지 않았더냐. ‘놈’을 내어놓으라고.”

“혈교의 율법은 정녕 잊었더냐?”

“끌끌끌. 혈교의 율법?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팔짱을 낀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자존 이외에는 말이야.”

서슬 퍼런 독공이 부옇게 일어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커헉!”

“컥!”

가까스로 살아남은 가솔들이 목을 부여잡으며 피를 토했다.

타닥. 타닥.

중독되어 쓰러지는 사람들 머리 위로 불씨가 흩날렸다.

이어 순식간에 시체 타는 냄새가 장내를 메웠다.

사마율은 절망했다.

‘이제 끝이구나.’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 보려고 했건만, 이렇게 되었다.

사실 대충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의 혈교는 법도가 존재하지 않는 약육강식의 세계였으니까.

약자는 죽이고,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다.

한때 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마의 무종(武宗)은 종적을 감췄다.

강자의 여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음습함이 채웠다.

법도가 사라진 천박한 폭력만이 지배하게 된 세상.

그것이 작금의 혈교였다.

“굴복하라.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살려는 주지.”

“…그럴 수는.”

“거부한다면, 남은 인간들을 여기 모두 끌고 올 생각이야.”

그리고.

“여자들은 네 앞에서 범하고, 남자 놈들을 모두 죽여 피로 적셔주지.”

자, 선택해라.

“죽음이냐, 삶이냐?”

대답을 강요하는 고루마군의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어서.

울컥.

마주한 것만으로 사마백이 피를 토했다.

그때였다.

“교주님! 찾았습니다!”

한쪽에서 오독교의 교인 하나가 축 처진 소년 하나를 질질 끌고 나타났다.

“호오? 역시 여기에 있었군.”

“도련님! 안돼! …컥!”

퍼억!

왈칵 몸을 세우다 걷어차인 사마백이 바닥을 굴렀다.

“드디어 귀한 재료를 구했구나.”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소년을 향해 다가갈 때였다.

불현듯 소년이 눈을 떴다.

“뭐야. 성공한 건가?”

앳된 목소리도 울렸다.

왈칵 몸을 일으킨 소년은 주변을 휘 돌아보더니, 우드득 목을 돌렸다.

“뭐야-아.”

앳된 얼굴 위로 장난기가 어리더니, 눈이 반달을 그렸다.

“반가운 얼굴들이 꽤 있네.”

소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반갑다, 율아.”

독고율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지?’

저 소년은 대체 누구이기에.

그제야 사마율은 언젠가 아버지가 데리고 온 아이를 떠올렸다.

-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분이다.

라는 말과 함께.

금방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워낙 귀하게 대하는 터라, 얼굴을 직접 보기 쉽지 않았기 때문.

‘분명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던 것 같은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활달한 모습에 의아함이 생겼다.

하지만 의문은 소년의 말에 날아갔다.

“인마. 무인이 아무에게나 고개 숙이는 것 아니다.”

준엄한 말은 질책의 기색이 역력하여 사마율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사과부터 할 뻔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오독교도 황당했던 모양이다.

“네 이놈! 마군 앞에서 이 무슨 추태더냐!”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것 같은데….”

서슬퍼런 오독교 무사들의 살기 속에서 소년이 웃었다.

“우와. 반갑네.”

고루마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희한한 일도 있군. 분명 본교 비전의 ‘시독마공’을 펼쳐냈거늘.”

“치사한 것도 여전하고.”

자신을 둘러싼 보랏빛 연무 속에서 통통 뛴 소년이 말했다.

“X도 아닌 것도 여전해.”

고루마군의 입가가 죽 찢어졌다.

“재미있어. 쓸만한 실험체야. 넘기기는 너무 아까운걸.”

양손을 풀어낸 고루마군이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뚜벅. 뚜벅.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듯 거대한 위압감에 장내의 물건들이 퍽퍽 부서졌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의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야. 다시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예전에 치다 만 매가 있어서 아쉬웠는데 말이야.”

순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일로 와. X새끼야.”

그날.

고루마군 독 장로는 산채로 척추가 뽑혔고, 오독교의 절반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신화가 인세에 현신하는 순간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게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사마율이 대답했다.

“예전. 처음 주군을 뵈었을 때가 생각이 나서, 그만.”

“끌끌끌.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

어깨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대소하던 사마백이 수염을 쓸며 말했다.

“여하튼. 내가 다시 주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주군께 미움받는 것이니까.

“하지만, 강호행이 무료할 것이라는 걱정은 접는 것이 좋을 거다.”

“무엇 때문입니까?”

분명 주군은 평화로운 일상을 천명했거늘.

“하늘이 인재를 쉬이 세상에 내려보내더냐?”

“무슨 뜻입니까?”

“천인(天人)이라 칭해 부족함이 없을 분께서 세상에 나셨으니, 이제 천명(天命)이 움직일 테지.”

혹은 운명이던가.

들을수록 알쏭달쏭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그저.”

잠깐의 침묵 끝에 사마백이 덧붙였다.

“하늘이 부리는 운명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정신만 꽉 차리면 그만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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