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적령기 무림교관-136화 (136/194)

제36장 백귀야행 (2)

쪼르륵.

어디서 구해왔는지 질 좋은 차까지 내어주며 사마백이 말했다.

“귀환한 주군을 가장 먼저 환대할 수 있다니, 노신의 크나큰 복이옵니다.”

뚱하니 보고 있자니.

“허나. 이 일도 머지않았군요.”

사마백이 소매로 눈가를 찍었다.

“곧 안주인이 생기실 테니까요.”

짐짓 슬픈 척을 해보지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빠르게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멀리서 지원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노신에게는 한걸음의 거리조차 충분히 멉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농담은 그쯤하고.”

진짜 온 이유가 뭐야?

사마백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긴히 전할 말이 있어 직접 왔습니다. 홀홀홀.”

“말해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초운휘가 바로 답했다.

“좋은 소식.”

“무림맹이 망천회에 대해 진심으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전의 혈루석과 팔천사도의 일을 언급한 후, 무림맹에 경고하겠다며 남아 있던 사마백이다.

느리기 짝이 없는 무림맹을 충동질해 소기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나쁜 소식은?”

“망천회의 뒤를 파던 중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망천회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마인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마인들이 나타나 무림맹과 부딪혔습니다.”

“최근의 사달은 그래서 일어난 것이겠네.”

“맞습니다. 뒷조사를 위해 나섰던 개방도 서른 명이 죽고, 백여 명이 크게 다쳤다더군요.”

이 때문에 무림맹은 물론이고 신무학관도 발칵 뒤집어졌다는 것이 사마백의 설명이었다.

“강호행에 딱 맞춰 사고가 터졌으니 머저리가 아니라면 이상함을 눈치채겠지.”

“하여, 저를 급히 이곳으로 보내게 된 것이죠.”

홀홀홀.

모든 것이 우연이고, 자신은 떠밀려 온 것뿐이라 주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사마 아재라면 이런 술책은 간단히 저지를 만한 인간이니까.’

물론 추궁해봐야 속내를 알려줄 리가 없으니 그러려니 해야겠지.

“좋거나 나쁜 소식은?”

“홀홀홀. 상황이 심각해지자, 강호행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여매홍이 말하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 말인즉.”

“치안이 안전한 데다, 곤륜의 전인이 비호하는 곳은 좋은 피신처가 되겠지요.”

이런 젠장.

안 그래도 인기 있는 부임지다.

‘안전까지 확보되었다면 이를 악물고 찾아올 것이 분명해.’

단숨에 한가로운 부임지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망했다. 일이 잔뜩 늘어나겠네.”

전혀 좋을 일이 없잖아.

“꼭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마백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사람이 몰릴수록 정실부인께서 방문하실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요.”

“알아. 아는데.”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은 기우이기를 빈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마지막 소식을 물었다.

“…나쁜 소식은?”

“감찰부가 생겼습니다.”

“뭐? 감찰부?”

그게 뭔데. 묻자 사마백이 설명했다.

“관도들의 행실을 단속하는 비밀 감찰부서입니다.”

불같은 사랑을 꿈꾸는 어린 영혼들의 족쇄 같은 존재지요.

돌아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초운휘가 탁자를 뒤집었다.

쾅!

“왜! 그따위 것이 생긴 거야?”

지금까지 없었잖아!

이제 막 색시를 찾아 색시탈혼할 계획인데 왜 지금!

자꾸 방해꾼이 생기는 거냐고!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자 사마백이 고저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왜. 제 아들 녀석이 교관의 직무 과중을 덜어준다며 남녀 혼용 수업을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덕분에 이번 강호행에 남녀 혼용 조도 꽤 생겼단 말이지.

교관과 관도들의 호평도 쏟아진다고 하였다.

“시작은 좋았지만 최근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뭐? 사고?”

“서옥랑이라는 관도가 밀회를 즐기다가 걸렸다는군요.”

현장에서 딱.

발각된 덕분에 남녀유별을 중시하는 학관의 높은 어르신들이 뒤집어졌단다.

“아오!”

기억이 되살아났다.

팔미로에서 색시와 같은 향을 풀풀 흘리며 다니던 여자아이.

어째 독고율이 접근하자 넙죽 따라와 살랑거린다 싶었더니.

“으드득. 발랑 까진 어린놈이 결국 사달을 일으켰구나!”

이를 갈아붙인 초운휘가 기대둔 검을 챙겼다.

“계획 변경이다.”

“어딜 가십니까?”

“청성파부터 조져야겠어.”

“주군. 고정하십시오.”

내가 고정하게 생겼어?

이 X발 청성파 새끼들을!

“참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혈풍을 일으키면 정실부인께서 도망칩니다!”

“으아아아아!”

빌어먹을! 일이 좀 풀리는가 싶었더니.

정말 강호는 뜻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

울적한 가운데 불려 나온 술자리.

묘진문에서 가도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객잔에 자리까지 잡아줬지만, 마음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최악의 소식으로 이미 마음은 무채색.

세상은 빛을 잃었다.

‘망했어. 망했어.’

세상 망한 얼굴로 술잔을 홀짝이고 있자니, 곁에서 여매홍이 이유도 모르고 미안해했다.

“기운 좀 내세요.”

모용선야도 입을 비죽였다.

“맞아요. 얼굴 좀 펴요. 기껏 미녀들과 함께하는 자리잖아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용선야를 바라보고는, 머리를 기울였다.

“미녀가…. 어디?”

아야.

양쪽에서 옆구리를 꼬집히니 꽤 아팠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초 교관님. 무슨 일 있었어요?”

“맞아. 나라 잃은 얼굴이던데.”

두 사람에게 감찰부에 대한 것을 묻자.

“어? 감찰부가 생겼어요?”

여매홍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고.

“어휴. 결국 그렇게 됐구나.”

모용선야는 탄식했다.

이유를 묻자 모용선야가 제 잔에 술을 채우며 대답했다.

“오던 중에 염문이 터졌거든.”

자겸 교관이 인솔하던 관도들이었지, 아마?

서두를 뗀 모용선야가 소채를 아작이며 말했다.

“청성파 출신의 여 관도와 중견 무가의 관도가 눈이 맞았던 모양이야.”

“난리가 날만 하네요.”

“응, 야심한 밤에 물레방앗간에서의 밀회라니.”

“어머. 뜨겁기도 해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눈이 맞아도 교관이 먼저거늘.’

무림맹의 애송이들은 법도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문제는 청성파 관도 쪽이야. 꽤 촉망받는 아이였다나 봐.”

여매홍이 금방 납득했다.

“알만하네요. 촉망받는 제자가 그저 그런 문파의 관도와 밀회를 즐겼으니.”

“응. ‘감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라며 노발대발했겠지.”

“청성파의 완고함은 유독 유명하니까요.”

대화를 들어보니 예전에도 간혹 일어나는 일인 듯했다.

“애초에 한창때의 아이들을 수련만 하라며 가두는 쪽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전통을 중시하고, 가벼운 자리에서조차 격식을 따지는 분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요.”

이어지는 뒷담은 두 사람이 학관에 다닐 때 괴담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었다.

대체로 구파일방의 꼰대들에 대한 험담이었다.

“밀회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맞아. 심지어 남자가 목을 축인 물에는 양기(陽氣)가 스며 불결하다는 교관도 있었어.”

“기억나요. 덕분에 물도 먼 우물에서 떠오게 시켰죠.”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개소리를 했나 물었더니.

“아미파의 교관 분이셨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째 색시도 남녀 사이의 접촉을 극히 꺼리더라니.’

아미파가 문제였구나.

‘청성파 다음은 아미파인가?’

색시탈혼이 실패하면 일단 두 문파부터 박살 내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울분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하거든.

“감찰단은 어떻게 되먹은 인간들입니까?”

상대에 대해 알아볼까 물어봤더니, 여매홍이 대답했다.

“무림맹이나 신무학관의 은퇴한 분들이세요.”

모용선야도 덧붙였다.

“기본적으로는 그렇지만, 감찰부는 조력자들이 더 무서워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거든요.”

기가 찬 초운휘가 물었다.

“무림인은 이해하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왜 끼어듭니까?”

“그야 돈이 되니까요.”

여매홍이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그랗게 만들며 설명했다.

“밀회를 제보하면 학관에서 사례금을 지급하거든요.”

모용선야도 긍정했다.

“맞아. 밀회에 연루된 문파에서 함구하는 조건으로 뒷돈을 건네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있고요.”

“…….”

이렇게 쓸모없는 구석에서 진심일 수 있다니.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무림맹?’

울적해 하고 있자니 여매홍이 기운 내라며 웃었다.

“너무 걱정 마요. 게으름뱅이 교관을 감시하는 조직은 아니니까.”

아니, 딱 정곡인 것 같습니다만.

“맞아. 관도와의 불같은 사랑을 꿈꾸는 망측한 짓만 저지르지 않으면 무사하니까.”

정곡 맞네.

더없이 우울해지는 밤이었다.

***

터벅. 터벅.

엉망이 된 몰골로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떡이 졌고, 얼굴이나 손등에는 시커먼 때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으으으으.”

하지만 제 상태에 대한 자각이 없이 사내는 걷고 걸었다.

처음은 그저 산을 넘고자 걸었다.

다음은 물가를 따라 걸었다.

이후는 엉망진창이었다. 발길이 닿는 곳이 있으면 걸었고, 바위가 가로막으면 부수며 나아갔다.

‘얼마나 걸어온 거지?’

사내, 곤야평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온몸에 흘러넘치는 힘에 취해 벙긋벙긋 웃을 뿐이다.

“흐흐흐흐. 노부도 이제 천하의 강자다.”

흐흐흐흐.

흐릿한 눈으로 걷던 차에 바스락 소리가 들리자 고개가 돌아갔다.

시야 속에서 거대한 대호가 이쪽을 향해 수염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크르르릉.”

이쪽을 주시하며 몸을 낮추는 대호의 움직임은 몹시 위협적인 것이었지만.

“흐흐흐흐흐.”

힘에 취한 곤야평은 도리어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공의 구결부터 떠올렸을 테지만, 힘이 넘치는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허허-헝!”

산을 떨쳐 울리는 포효와 함께 달려드는 작은 산만한 호랑이를 보며, 곤야평은 그저 서 한 손을 들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커헝!”

달려든 대호가 허공에서 덜컥 멈춰 섰고, 곤야평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케르릉! 커헝!”

허공에서 목이 잡힌 대호가 당황해 허우적댔다.

체중을 실어 덮치면 거대한 황소마저 풀썩 쓰러지고 마는 것인데, 이 먹잇감은 뭔가 다르다.

“커헝! 커허헝!”

이변을 직감한 대호가 몸부림치며 휘적였지만, 목을 쥔 곤야평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압도적인 힘.”

우두둑. 우두둑.

허공에서 낚아챈 대호의 목에서 위험한 소리가 들렸다.

콰드드득.

이내 대호의 머리가 왼쪽으로 휙 돌아가더니 추욱 늘어졌다.

산채로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이다. 놀라운 괴력이었다.

“흐흐흐. 허기지던 차에 잘되었구나.”

까득. 우두둑.

호랑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곤야평이 한참 동안 갈증을 달랬다.

오직 목덜미에서 흐르는 향긋한 향유만이 갈증을 멈추게 하는 터라 쉬지 않고 허겁지겁 얼굴을 묻었다.

“크---헉.”

잠시 후에 목에서 얼굴을 뗀 곤야평이 중얼거렸다.

“부족-해.”

분명 이것보다 갈증을 덜어주던 것이 있었는데.

“맞아. 얼마 전에 분명.”

중얼거린 그가 멀리서 들려온 소리를 포착하며 고개를 돌렸다.

“향긋한 것들이다.”

멈춰 섰던 곤야평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이내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가볍게 땅을 박차며 날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피막을 펼친 그의 뒤로 시커먼 악기가 자욱하게 흩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