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소호에 부는 화마(火魔) (3)
확연히 가까워진 화마의 벽에 소호성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성벽보다 훨씬 커다란 불의 벽이 시커먼 연기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피난에 불평을 하던 사람들도, 두려움에 입을 닫고 오직 성에서 멀어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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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움직임에도 한 마디의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행군.
그것은 무척 엄숙하면서도, 불행한 것이었다.
털썩.
“도와, 도와주세요!”
간혹 낙오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묵묵히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의 침묵에 묻혀 버린다.
실로 엄숙하면서, 끔찍한 행군이 멈춘 것은 어느덧 한나절하고 반이 지나, 달이 휘영청 떠오른 때의 일이었다.
***
저 멀리서 타오르는 불의 벽은 먼 거리에서도 밤의 어둠을 밀어내며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아. 고향이 사라지는 건가?”
“삼 대를 이어 살아오던 곳인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지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눈에 담긴 것은 화마(火魔) 자체라기보다는 너머의 절망이었다.
끔찍한 분위기 속에서 피난민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던 초운휘는 투덜댔다.
“완전 난장판이네.”
“하루아침에 고향을 버리게 되었으니까요.”
적게는 수년을, 길게는 백여 년을 터를 잡고 살던 이들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도망을 쳐야 했으니.
여매홍이 속삭였다.
“대체 어떤 자들일까요? 망천회라는 자들은.”
“보면 모르겠습니까?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을 보면 X 또라이 쉐기들이죠.”
“확실히 정신이 나간 자들임에는 분명해요. 강호에 사교와 마인이 득세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런 무참한 일을 벌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무려 한 개의 성을 불태워 버리려는 미친 짓이다.
관부는 물론 무림까지 전부 적으로 돌리는 것은 저 마교조차 불가능한 일.
듣고 있던 백리설이 끼어들었다.
“교관님. 혹시 망천회라는 자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으세요?”
“왜 내게 묻는 거야?”
“교관님이라면 전지전능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완벽한 분이니까요.”
귀찮아만 하던 초운휘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내가 좀 그렇지.”
“유능한데다 똑똑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교관님. 알려주세요.”
“그레에?”
나중에 교관 평가서에 꼭 그대로 쓰렴.
“망천회. 하늘을 무너트리겠다는 허황된 소리를 떠드는 놈들답지 않게, 치밀한 자들인 것 같다.”
“단순한 광신도가 아닌 건가요?”
“그냥 미친놈들이라면 오히려 편하지. 하지만, 이놈들은 더 악질이야.”
손가락을 들어 초운휘가 한켠을 가리켰다.
“성을 불태우는 놈들 주제에, 꽤 전략적인 것 같지 않냐?”
“전략적이라뇨?”
“아주 미친 놈들이라면 그냥 사람들이 죽던 말던 가만히 둘 거야.”
그런데 상황이 조금 미묘하다.
“공포감을 극대화하면서, 이쪽에게 선택지를 강요한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듣고 있던 남궁윤호가 반문했다.
“그럼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린 것도….”
“다 계획이 있어서겠지.”
제갈탄은 쉽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교관님. 이번 일은 무림을 넘어 천하에 공분을 일으킬만한 큰일입니다. 광인들의 망상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초운휘가 검지를 세워 양쪽으로 흔들었다.
“쯧쯧. 제갈아. 매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라.”
“하지만.”
“…….”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네가 아는 한계 안에서 대처하려고만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수에 뒤통수가 깨질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엄중하게 질책하는데 옆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멋져. 역시 연상….”
“서 관도. 교관님에게서 떨어지세요.”
피곤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초운휘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때는 더 대비를 단단히 해야지.”
“초 교관님. 무슨 대비를 말이에요?”
스으윽.
비통에 젖어 있는 피난민들을 돌아보며 초운휘가 덧붙였다.
“아마 나라면 이곳에 장난질을 쳐뒀을걸?”
써먹을 말도 많잖아.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교관. 상급 교관이 도착했어!”
언호승이 달려와 후발대의 도착을 알렸기 때문이다.
***
장철심은 합류하자마자 은천교관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무사하군.”
마지막에 도착한 후발대는 경력이 많은 은천교관.
그리고 왕우와 모용주, 백리선호를 비롯한 감찰부의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피로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지만, 장철심은 기체 없이 불러 모은 이유를 설명했다.
“경험이 있는 이들은 대략 눈치챘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
“상급 교관. 불길로부터 안전한 곳까지 온 것 같습니다만,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한 젊은 은천교관의 질문에 장철심이 노고수들을 돌아보았다.
끄덕.
경험이 많은 이들은 피난민을 보며 하나같이 우려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를 알고 있는 장철심이 설명했다.
“급하게 나오는 마당에, 많은 것을 챙기지 못했을 거야.”
긴급 대피령이었으니까.
“우선은 식량이 부족할 것이네. 추수를 앞둔 탓에 챙겨올 수 있던 양식이 많지 않을 거야.”
“필요하다면 건량이라도.”
젊은 은천교관의 대답에 장철심이 눈매를 좁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 육포와 건량 같은 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나.”
건량은 비싸다.
특히 교관들에게 지급되는 흔한 육포도 농민이나 하층 사람들에게는 구경조차 못 할 값비싼 물건이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교관이 바로 사과를 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지.”
듣고 있던 모용주도 가세했다.
“더욱 큰 문제는 양식을 챙겨오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라는 점일세. 굶주린 자들은 어찌하겠나?”
“그건….”
“아마 곁에서 얻으려고 할 거야. 허나, 제 먹을 것도 부족한 마당에 어찌 쉽게 양식을 내어주겠나?”
“…….”
이쯤 되면 상황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젊은 교관도 역시 위험한 것을 직감했는지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설마. 약탈이라도 하려는 것은.”
“십중팔구 일어날 것이네.”
장철심이 모두를 이곳에 불러 모은 이유도 바로 이 점이었다.
“갑작스레 자네들을 호출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야.”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굳이 민초들의 일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신무학관은 무공을 수련하는 무관 이전에, 정파의 의기를 드높이고자 기체를 세운 곳이다.
“확정된 불의를 알고서도 넘어간다면 어찌 정파의 인재를 길러내는 요람의 수호자를 자처할 수 있겠나.”
장철심이 손가락을 펴들었다.
“앞으로 나흘. 나흘이면 남궁세가와 상인들이 지원을 해주기로 약조하였네.”
그 말인즉.
“그때까지 무슨 수가 있더라도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야.”
거기까지 말한 장철심이 단단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상급 교관의 직권으로 이 자리에서 새로운 의뢰를 내리지.”
-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관도들과 함께 치안을 단속하게.
장철심의 말에.
“넷!”
교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세우며 외쳤다.
***
“초 교관님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여매홍이 신기한 듯 물어왔다.
아까 말한 대로 장철심 교관도 불길한 사건을 직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겠지.
“뭐, 어느 정도는요?”
“벌써 움직이네요. 확실히 이번 강호행은 공적을 세울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
그녀의 말대로 은천교관들은 새로운 의뢰를 시작하기 위해 부산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관도들에게 돌아가 새로운 의뢰를 전달하기 위함이겠지.
“우리도 어서 갈까요? 서두르지 않으면, 모든 공을 가져가 버릴 거예요.”
의욕을 보이는 그녀에 초운휘가 두 손을 깍지껴 올리며 마냥 웃었다.
“그야 두고 봐야 알 일이죠.”
***
첫날 밤.
확실히 은천관 관도들은 꽤 쓸모가 있었다.
비록 돈 셀 줄도 모르는 데다, 상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샌님들이었지만, 무력 하나만은 괜찮은 수준이니까.
“싸움을 벌이려던 왈패, 네 명을 제압했습니다.”
“밤중에 도둑질을 하려던 배수 열둘을 붙잡았습니다. 상급 교관.”
“불침번을 서며 치안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모두 통제 가능합니다.”
혼란을 틈타 행패를 부리거나 도둑질을 하려던 이들은 관도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공 하나 정도는 볼만하니까.”
아무리 동네에서 힘자랑한다는 왈패라도, 무공을 제대로 익힌 관도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더러는 무공을 익힌 이들도 있었지만, 교관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하나 같이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
“초 교관님. 괜찮을까요?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가는 공을 세울 기회가 없을 텐데.”
“걱정 없습니다. 곧 기회가 올 테니까요.”
둘째 날도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둘째 날 밤.
결국 사달이 일어났다.
“뭐야! 이놈이 내 물건을 훔쳤다니까? 증거? 내 말이 증거야!”
험악한 왈패의 고함에 관도들이 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왈패들이 가세했다.
“무공만 고강하면 다야? 무고한 사람 이렇게 괴롭혀도 되냐고!”
왈패의 주장에 여기저기에서 동조의 고함이 들려왔다.
“맞아! 너희가 판관이라도 되냐고!”
“힘으로 제압하면 다냐?”
“그래! 죽여! 죽여!”
악으로 깡으로 나오는 왈패들에 이번에는 관도들이 당황했다.
- 정의를 관철한다.
간단한 정의는 정의를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자 흔들렸다.
더욱이 왈패들은 어린 관도들이 세상 경험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놈들은 우리를 다치게 못 해.”
“맞아. 강호인들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을 공격할 수 없거든.”
“후후. 생각보다 간단하잖아?”
“샌님들. 클클클.”
은천관도들의 약점을 알게 된 왈패들이 일으킨 소동에 둘째 밤은 소란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허. 이걸 어쩌지?”
“저 불량한 자들이 우리를 노린다면.”
“이거 괜찮을까 모르겠군.”
암울한 현실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피난 행렬 사이에서 절망의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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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아침.
“이대로는 어렵습니다.”
간신히 교관들이 뛰어다니며 큰 사고를 막았지만, 벌써부터 치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역시 그렇군.”
장철심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야. 관도들에게 일반인에 손을 대라고 할 수도 없고.”
“상급 교관.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몇몇 교관들이 의견을 냈지만, 도통 마땅한 것이 없었다.
“어쩐다….”
싶던 차였다.
불쑥.
절대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손이 올라왔다.
“이거 해결하면 가산점 줍니까?”
“…끄응. 초운휘 임시 교관.”
“가산점 주면 제가 해결해 볼게요.”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은천교관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임시 교관. 자네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본관들이 생각이 없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같은가?”
“대책 없이 싸움을 걸어서야, 학관이 욕을 먹기 때문이네.”
“예전처럼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까불어서 되는 일이 아니야!”
자존심 높은 은천교관들이 떠들었지만, 초운휘는 휘파람만 불었다.
여유로운 꼴을 보던 장철심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자네 자신이 있는가?”
“그럼요.”
“다시 말하지만 학관의 이름에 누가 돼서는 안 될 것이야. 또한, 무고한 자를 힘으로 핍박해서도 안 되고.”
가장 까다로운 점이었다.
비록 흑도의 인물이라 하나, 증거가 없이 몰아세우는 것은 정파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별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그럼에도 초운휘는 웃었다.
“그런 것도 못 해서 어디 교관질 해 먹겠습니까?”
자존심에 상처 입은 은천교관들의 얼굴이 일제히 험악해졌다.